나그네 패션의 완성... 하지만 남편은 '울상'

[어느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⑥] 싱가포르의 밤

등록 2013.07.31 08:43수정 2013.07.31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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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밤 ⓒ Dustin Burnett


지난해, 9개월 동안 남편(미국인)과 인도·네팔·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 기자 말

싱가포르로 가는 밤 버스. 내 다리는 모기 탓인지, 계속 바른 약 때문인지, 밤새 버스에 내내 앉아 있었던 탓인지, 계속해서 부어오르고, 굳어졌다. 게다가 지독한 간지러움의 고통은 심해져만 갔다.


한국에서 짐을 급하게 싸느라 가져온 게 없던 나는 옷가지도 몇 개 되지 않았다. 무릎 나온 추리닝 바지 하나에 반바지 하나, 물이 다 빠진 후줄근한 반소매 남방과 늘어난 긴소매 셔츠뿐이었다. 부유하기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이 도시에서, 더운 날씨에 무릎 나온 긴 추리닝을 입거나 부어오른 다리가 훤히 보이는 짧은 반바지를 번갈아 가며 입었다. 간단한 짐을 담은 검은 봉지까지 하나 들어주니 가히 '패션의 완성'이었다. 어차피 떠날 나그네 신세. 아무리 부가 넘치고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많은 나라라지만, 거지꼴로 다닌다 한들 그다지 창피하지는 않았다.

아픈 사람한테 여행 못하니까 병원에 못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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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고층건물 ⓒ Dustin Burnett


남편 더스틴은 내 뒤로 걸으며 자꾸만 내 다리를 확인했다. 그럴 때마다 점점 어두워지던 더스틴의 얼굴은 급기야는 울상이 됐다. 다리가 부은 사람은 난데, 내가 더스틴을 위로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아무래도 병원에 가야겠어. 독이 계속 그렇게 부어오르는데 정말로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런데 병원비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우리, 보험도 없잖아."
"…. 그건 그래. 그리고 병원에 한 일주일 정도 입원을 하라고 할 수도 있어. 여행을 해야 하는데."

철없는 둘의 대화. 애초에 장기 여행을 떠나면서 여행자 보험 하나도 들지 않은 그 대담함 혹은 그 멍청함은 무엇이며, 다리가 이 지경이 됐는데, 뭐? 일주일간 여행을 못하기 때문에 병원에 갈 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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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푸드코트의 치킨라이스 ⓒ Dustin Burnett


미련한 우리가 병원 대신 간 곳은 리틀 인디아였다. 신비로운 향료를 접목한 만병통치 연고 같은 것을 팔 것만 같았다. 말이 리틀 인디아지, 아직 인도에 발을 들여보지 못한 우리의 눈에 이곳은 그야말로 울긋불긋 신세계, 인도 그 자체였다. 눈에 선한 주홍빛·분홍빛 사리천들과 코를 찌르는 힌두사원의 향내를 지나 약국으로 들어갔다. 눈이 큰 인도계 점원이 우리를 맞았다.

"모기 알레르기에 바를 약을 찾고 있어요."
"모기요? 어디 한 번 봐요."

다리 한두 군데 동전 만한 크기의 모기 자국 정도가 있을 줄 알았던 점원은 내 다리를 보고 그 큰 눈을 더 크고 휘둥그렇게 떴다. 별 효과가 없을 거라며 점원이 쥐여 준 히말라야(인도 화장품 브랜드) 크림을 샀다. 역시 별 효과가 없다. 차라리 강렬한 커리의 맛이 고통을 잊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우리는 길가의 인도 식당으로 가서 커리와 난을 시켰다. 기똥찬 맛이, 과연 그 순간의 고통을 잊는 데는 극효가 있었다.

싱가포르에서 반 고흐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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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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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밤 ⓒ Dustin Burnett


싱가포르는 완벽한 도시였다. 부유한 경제와 깨끗한 도시 환경, 잘 차려놓은 박물관과 쇼핑 시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싸고 맛있는 길거리 음식. 거기에 말레이시아 못지않은 다민족, 다종교 사람들이 빚어내는 문화적 독특함. 하지만 이런 완벽한 곳에서도 우리에게 닥쳐오는 복병이란 항상 존재했으니 그것은 다시 한 번, 빌어먹을 '설 연휴'였다. 싱가포르는 인구의 80%가 중국계인 나라로, 설 연휴에서 벗어나고자 도망쳐 나온 말레이시아와 다름없는 곳이었다. 독 안에 든 쥐가 된 기분이다.

연휴 덕에 도시 대부분의 상점과 레스토랑이 문을 닫은 탓에 갈 곳이 없었다. 다행히, 박물관은 모두 열었다. 싱가포르에서는 주말과 공휴일 그리고 평일 6시 이후에는 국립 박물관의 문을 무료로 연다. 싱가포르 국립 미술관에는 마침 반 고흐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온갖 계획은 말아 먹었어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렇게 횡재를 하는 것이 인생인 건가. 어쩌면 여행을, 인생을 계획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전전긍긍하지 말고, 반드시 멋진 여행이 돼야 한다고 초조해하지 말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불안해하지 말고. 바람이 이끄는 대로, 발길이 닿는 대로.

그러다 보면, 말레이시아까지 와서 갈 곳 없는 팔자가 될 수도 있고, 모기떼의 공격을 받게 될 때도 있을 것이며, 또 언제는 우연히 들어온 미술관에서 반 고흐의 걸작과 느닷없이 조우하기도 하는 것이겠지. 나는 나의 행운에 감사하며, 아주 오랫동안, 화가가 화폭에 담아 놓은 진한 붓 터치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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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미술관,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 Dustin Burnett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심한 간지러움의 고통으로 길을 걷다가도 멈추고, 사진을 찍다가도 멈추고, 밥을 먹다가도 멈춰야 하는 상황이 계속됐다. 이렇게 되자 철없는 우리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큰마음을 먹고 병원에 가기로 했다.

"수지, 다리가 너무 심하게 부어서 병원에 가보려고. 보험이 없는데, 혹시 얼마나 나올지 알아?"

병원에 가기 위해 호스텔을 나서면서, 오전에 한참 수다를 떨었던 캐나다 친구에게 물었다.

"글쎄 보험에 안 들었다면 꽤 나올지도 모르겠는데. 아, 그러지 말고, 내가 항히스타민제가 있는데 그걸 복용해봐."

잠깐만 기다리라며 방으로 들어간 샤이아 라보프를 닮은 잘생긴 캐나다 친구는 항히스타민제 한 갑을 통째로 내게 내밀었다.

"두 알 정도만 받을게. 일부러 챙겨온 걸 텐데."
"아니, 난 괜찮아. 혹시나 해서 가져온 거고, 약을 너무 많이 가져와서 짐만 되거든. 걱정하지 말고 받아."

자기 짐도 제대로 챙겨오지 못하는 어설픈 우리와는 다르게, 자기 짐도 꼼꼼히 챙기고 남에게 베풀 것까지 흘러넘치게 가지고 다니는 이런 사람들도 있다. 모기 알레르기 증세는 이후로도 계속됐기 때문에, 샤이아 라보프 청년이 준 항히스타민제는 여행 내내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으로 유용하게 사용됐다. 준비성은 없어도 인복은 있나 보다.

제야의 밤보다 더 소중한 내 인생의 동아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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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설축제 ⓒ Dustin Burnett


설 전날 밤의 싱가포르는 제야의 종소리를 듣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들썩였다. 각국의 요리가 모여든 시끌벅적한 푸드코트에서 중국 음식과 인도 음식을 주문해 먹고 자정을 기다리는 사람들 행렬에 끼었다. 대형 스크린 화면 안에서는 싱가포르의 연예인들이 갖은 쇼를 벌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올해가 가고, 다음 해가 오는 것이 이 세상 가장 큰 축복이라도 된다는 듯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람들의 들뜬 마음이 싱그러운 싱가포르의 밤 공기를 채웠다. 나는 그 틈에 서서, 밤이 되자 더 부어오르는 다리를 염려했다. 다리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신체 일부가 남과 다른 채로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매일 이런 시선을 받으며 살겠지. 나는 더스틴에게, 제야의 종소리는 됐고, 그만 숙소로 돌아가자고 했다.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지만 우리가 머무는 12인실 도미토리룸은 텅 비어 있었다. 다들 이 도시의 어딘가에서, 달이 선물한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즐기고 있겠지. 샤워를 하고, 도미토리룸 구석의 벙커 침대에 누웠다. 불안했다. 부어오른 다리 때문에 불안한 건지, 며칠 있으면 가게 될 인도 때문에 불안한 건지 모르겠다. 혹은 인생이 통째로 불안한 건지도.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듯, 벙커 위 칸에서 더스틴의 손이 내게로 내려왔다. 나는 말 없이 더스틴의 새끼손가락을 꼭 잡았다.

괜찮다. 다리도, 인도도, 인생도. 다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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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미술관 ⓒ Dustin Burnett


#싱가포르 #싱가포르 여행 #배낭여행 #동남아 #부부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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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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