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늙은 나를 단번에 알아볼까?"

동갑내기 친구의 첫사랑 이야기... 3년 만에 친정나들이 한다네요

등록 2013.09.05 16:02수정 2013.09.05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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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장을 봐서 오다가 미용실 문을 밀고 나오는데 동갑내기 친구를 만났습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녀는 싱긋 웃으며 물었습니다.


"내 머리 어때?"
"좋아, 파마가 아주 잘 나왔네."
"일부러 뽀글거리게 했어. 한 석 달쯤 버티려고 말이야."

동갑내기는 언제나 뽀글뽀글 파마를 합니다. 그리고는 그때마다 '한 석 달쯤 버티려고 말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때마다 나도 파마가 잘 나왔다고 칭찬합니다.

동갑내기 친구가 올케와 사이가 나빠진 이유

오늘은 동갑내기 얼굴이 햇살을 품은 듯이 아주 밝아 보입니다. 파마 끼가 없어져서 새로 파마를 한 게 아니라 나들이 채비를 한 듯합니다. 은행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길에 갈림길이 나오자 동갑내기가 걸음을 멈춥니다. 높은 은행나무들을 올려다보며 말합니다.

"이파리들도 참 무성하지. 친정 동네 둑길에 미루나무들이 생각나네."


a 이파리들도 참 무성하지 친정동네 둑길에 미루나무들이 생각나네

이파리들도 참 무성하지 친정동네 둑길에 미루나무들이 생각나네 ⓒ 김관숙


잔주름이 바글거리는 눈가와 달리 그녀의 눈빛이 소녀 같습니다. 동갑내기가 먼 시골 친정집 동네에 사는 첫사랑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합니다. 미루나무들이 줄지어 간 둑길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습니다. 나는 장바구니를 추스려 들면서 내 갈 길로 가려고 하는데 동갑내기가 바로 앞에 긴 의자로 가서 "아이고, 무릎이야" 하면서 앉습니다. 할 수 없이 나도 옆에 가서 장바구니를 놓고 앉았습니다.  

"올케 팔순잔치가 내일모레야. 내일 아침 차로 친정에 가려고 파마했지."
"좋겠다, 나들이 가고…. 근데 올케와 화해했나 보네."


동갑내기가 올케와 사이가 나빠져서 친정 대소사까지 발을 끊고 산 지, 벌써 삼 년이나 되었습니다. 몇 년 전 서울에서 살던 동갑내기의 첫사랑이 정년퇴직하자, 부인과 같이 시골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느 날인가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친 이른 아침에 논물을 살펴보고 오던 올케와 첫사랑인 그가 좁은 논길에서 딱 마주쳤습니다. 늘 인사만 하고 지나가던 그가 그날은 깊이 눌러 쓴 밀짚모자를 조금 위로 제치면서 조용히 말을 건네 왔다고 합니다. 

"그 친구, 여전히 건강하지요?" 
"우리 아가씨요? 그럼요!"
"그때는 자전거도 잘 타고, 하모니카도 잘 불고, 순수 소설책을 끼고 사는 문학소녀였지요. 지금도 여전히 책 많이 읽지요?" 
"아이고! 문학이고 뭐고, 그 딴 거랑 담쌓고 산 지 오래됐다고요. 사십 중반에 남편 죽었지, 미국 유학 보낸 외아들 뒷바라지 하느라고 고생을 엄청나게 했죠. 그 손자까지 길러줬지…. 그러고 나니까 머리는 하얘지고 늙고 기운 떨어지고…. 아주 딴 사람이 돼버렸다고요."

그날 올케가 전화로 그를 만나서 주고받은 이야기를 했을 때 동갑내기는 펑펑 울면서 소리, 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아 창피해! 나, 다시는 친정에 안 가! 안 간다고!"

그제야 올케는 자신이 시누이의 자존심을 지켜주지 못한 것을 깨닫고는 가슴을 쳤다고 합니다. 밭일 한 번 안 하고 공부만 하면서 곱게 자란 시누이가 시집 가서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아오느라고 또래보다 더 늙어 보이는 모습이 늘 가슴 아팠는데, 그 아픔 덩어리가 자기도 모르게 그런 식으로 툭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고 합니다.

그 순간에는 그 남자가 그 옛날에 시누이를 배반한 첫사랑이라는 것을 깜박했다면서 올케가 전화통이 불이 나도록 빌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동갑내기는 첫사랑과 한동네에 살면서 초·중·고등학교를 자전거 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같이 다녔습니다. 첫사랑이 학교가 먼저 끝나는 날이면 자전거를 세워놓고 그늘 진 미루나무 둑길에 앉아 하모니카를 불면서 자신을 기다려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그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변했습니다. 여자 친구가 생겼고, 그 여자와 결혼했고 처가 덕으로 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후 머리가 하얘진 지금까지 동갑내기는 그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어떻게 화해했는데?" 
"며칠 전부터 매일같이 올케가 잔치에 꼭 오라고 전화하지 뭐야. 자기가 정말로 잘못했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래서 전화로 화해했어."
"잘했네. 정말 잘했어."
"실은, 내가 건강할 때 한 번이라도 더 친정엘 다녀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어. 참! 집에 별일 없으면 내일 나랑 우리 친정에 같이 가자고. 올케 팔순 잔치도 보고 미루나무 둑길도 걷자고. 신작로를 확장하는 바람에 둑길이 많이 잘려나갔지만 말이야."
"정말 가보고 싶네. 근데 내일은 우리 영감님 건강검진 날이야. 내가 따라가 줘야 한다고."
"그렇구나!"
"근데, 며칠이나 있다가 올 건데?"  
"한 일주일쯤…. 부모님 산소에도 가고 쑥 개떡도 만들어 먹어야지."

마음 같아선 동갑내기를 따라가서 동갑내기의 소녀 시절이 어려 있는 그 미루나무 둑길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억척스럽게 농사를 지으면서 집 안을 이끌어왔다는 여장부 같은 올케도 만나보고 싶습니다.

"어쩌면 그 사람을 논길에서 만날지도 모르겠네." 
"논길에서 마주치면 그 사람이 나를 단번에 알아볼까?"

노후가 되면 가슴 속 깊은 상처들을 스스로 치유

그 옛날에 배반당한 아픔은 아픔이고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그리움은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나이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노후가 되면 가슴 속에 깊은 상처들을 스스로 치유하면서 모든 이에게 너그러워진다고 합니다. 아마 동갑내기는 요즘 그렇게 너그러워지기 시작했나 봅니다.

"난 그 사람을 단번에 알아볼 것 같은데 말이야."   

내 생각에도 동갑내기가 첫사랑을 단번에 알아볼 것만 같습니다. 동갑내기의 두 눈에서 그것을 느꼈습니다.

문득 내 단발머리 시절에 그 아이가 떠오릅니다. 아침에 책가방을 들고 골목길을 나서면 교모를 단정히 눌러 쓴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전차 길을 등지고 가로수인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 서 있다가 나를 보며 활짝 웃었습니다. 내게 말을 걸거나 따라오거나 하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전차 정류장을 향해서 가면 그 아이는 자신이 다니는 학교가 있는 방향으로 가는 또 다른 전차 정류장을 향해 몸을 돌리곤 했습니다. 서너 발자국을 가다가 돌아다보면 그 아이도 나를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도 나도 히죽 웃었습니다. 그뿐입니다. 그러면 온종일 기분이 좋았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 아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가 국외로 이민 갔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플라타너스 나무 밑이 허전해 보였습니다. 그 아이의 늙은 모습이 궁금합니다. 어떤 모습일까. 그려지지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단번에 알아본다면 말이야, 그 옛날에 배반당한 아픔이 보상될 것 같아!"

나는 그런 보상이 어디 있느냐고 하려다가 그만둡니다. 먼 하늘을 보는 동갑내기의 아픈 가슴 속이 헤아려졌습니다. 올케의 말대로 고생을 '엄청나게 해서' 딴사람이 되어버린 동갑내기의 늙은 모습을 그 사람이 단번에 알아본다면…. 그 눈빛은 분명 그 옛날 미루나무 둑길에서 하모니카를 불어주던 그 순수한 눈빛일 것입니다. 동갑내기는 아직도 그 눈빛을 못 잊었나 봅니다.

그 사람이 동갑내기를 단번에 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동갑내기가 오랜 세월 동안 가슴 깊숙이에 묻어 둔, 푸르다 못해 이제는 까맣게 변해버렸을 멍을 꺼내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 후 마음 편히 친정 나들이도 다니면서 즐거운 노후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첫사랑 #하모니카 #순수한 그 눈빛 #미루나무 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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