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할까 두려워 돌아온 땅, 두고두고 후회했다

[불혹 배낭여행기 마지막 회] 다시, 길 위의 날들을 꿈꾼다

등록 2013.10.11 11:54수정 2013.10.11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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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적된 역사 속을 유영할 수 있는 이탈리아 로마. 그러나, 내게는 '닥쳐온 육체적 고통' 탓에 두려움의 기억을 남긴 도시로 남아있다. ⓒ 서지은


2011년 초가을. 한국의 가을 하늘빛을 닮은 청옥빛 바다가 일렁이는 이탈리아 나폴리.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한 병원. 예기치 않게 찾아온 키 큰 동양인 하나 때문에 응급실이 시끌벅적해졌다.

그 동양인이 사용하는 서툰 영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콧수염 멋진 나이 지긋한 의사. 비스킷처럼 똑똑 부러지는 이탈리아어로 간호사를 불러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의사를 데려오라 했다.


10분쯤 지났을까. 흑진주처럼 검은 머리칼에 다갈색 눈동자가 매혹적인 젊은 여자 의사가 그 동양인 앞에 섰다. 이어지는 질문.

"눈이 갑자기 나빠졌다고? 어떻게? 혹시, 마약했니?"
"한 2주쯤 됐다. 오른쪽 눈 시력이 급속히 저하됐다. 푸른색과 초록색의 구별이 힘들다. 마약은 하지 않았다. 위스키와 와인은 많이 마셨다."

질문은 다시 이어졌다.

"너 어디서 왔는데? 몇 살이야?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니? 여권은 가지고 있지?"
"제발 하나씩 물어다오. 나 영어 잘 못해".

캐틀링 기관총처럼 쏘아대는 빠른 이탈리아식 영어 발음에 그 동양인은 반쯤 혼이 나가 버렸다.


이러다 장님이 되면 어쩌나... 돌아올 짐을 꾸리다

그날, 바로 그 '동양인'인 나는 40년을 살아온 한국에서도 해보지 않았던 CT(컴퓨터 단층촬영)를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경험했다. 젊은 여의사가 내 눈을 뒤집어 까고, 무릎이 고무망치에 제대로 반응하는지 체크하고, 등과 배에 청진기를 가져다 대고….

여하간 2시간 넘게 난리를 친 후에야 1차 검진결과가 나왔다. "뇌에는 문제가 없으며, 반응신경에도 별다른 이상소견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안과 검사를 해봐야 하는데 우리 병원엔 안과가 없다. 소견서를 써줄 테니 근처에 있는 안과를 찾아가서 2차 검사를 받아보라"는 게 나폴리의 예쁜 여의사가 내게 전한 검진 결과의 요지.

이탈리아 미녀 의사의 하얀 가운에서 풍겨오던 향긋한(?) 크레졸 냄새가 갑자기 짜증으로 바뀌었다.

'이러다 실명하면 어쩌지'라는 극단의 공포가 밀려왔다. '할 수 없구나. 돌아가자'라는 푸념이 머릿속에서 이어진 게 다음 수순. 아무런 계획 없이 한국을 떠나 아시아와 중동, 유럽을 떠돈 지 10개월이 지나던 무렵이었다.

장님이 되더라도 말이 통하는 곳에서 제대로 된 진찰이나 한 번 받아보자는 소박하고도, 절박한 심경. 이후 로마에 며칠 머물면서 귀국 항공권을 예약하고, 카타르의 도하를 거쳐 엄마가 사는 경상남도 마산까지의 리턴 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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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낯선 공간에 혼자 버려지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두려움 읽히지 않는 이 어린 수도승을 보라. 새로운 길은 언제나 '미지의 공간'에서 발견돼 온 것이 아닌가. ⓒ 홍성식


후회 그리고, 다시 떠날 날을 기다리며

마침내, '말이 통하는' 한국의 안과 의사와 처음 만난 날. 이탈리아어로 쓰인 '소견서'를 내밀었다. "아이구, 어쩌죠. 나는 이태리어를 하나도 못하는데. 진즉에 좀 공부를 해둘걸"이라며 웃는 그 앞에서 나도 함께 웃었다. 솔직해서 믿음직스러웠다.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건 때론 치유보다 더 큰 위로를 준다.

몇 가지 검사를 거쳐 한국 의사가 내린 진단은 심플했다.

"망막에 안개가 낀 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완치까진 한 3개월 걸릴 것 같은데, 심각한 병은 아니니 걱정 마세요".

원인이 불분명한, 급격한 시력 저하와 파랑과 초록이 구별되지 않는 다소 희귀한 안과 질환의 치료가 시작됐다. 그 3개월 내내 나는 돌아온 걸 후회했다.

'죽을병도 아닌데, 다시 나가서 세상을 떠돌기가 쉽지 않을 텐데 왜 그만한 것에 겁을 집어먹고 돌아왔을까'라는 자책. 이탈리아 이후 일정으로 세워둔 계획들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프랑스 파리에서 한동안 머물며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공동묘지 '페르 라세즈'를 찾아가 짐 모리슨과 발자크의 묘비 앞에서 취하도록 위스키를 마시고,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정글 속 또바 호수에 밤이 내리면 전설 속 괴물과 수영을 하고 싶었는데….

비단 나뿐일까? 후회의 한숨은 인간 모두의 것이다. 또한, 후회 속에서도 시간은 간다. 이탈리아에서 부랴부랴 한국으로 돌아온 지도 2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바로 그 해의 기억을 책으로 묶어낸다.

한동안 잠잠하던 방랑벽은 다시 요동치고, 정주하는 삶이 아닌 떠도는 삶의 매혹이 다시 심장 속에서 혀를 날름댄다.

언젠가부터 여행은 내게 현실이 아닌 꿈의 영역이다. 남아메리카의 땅끝 파타고니아 혹은,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에 홀로 서있는 꿈을 꾸고는 한다. 그 꿈이 비루하고 초라한 오늘의 현실을 견디게 해준다는 걸 애써 부정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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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과 늙음을 구분하는 지표는 '도전'의 의사를 가지고 있으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다시 먼 곳으로의 여행을 꿈꾸는 나는 나이와 상관없이 '도전하련다'라고 말하는 인간으로 남고 싶다. ⓒ 강건모


다시 '떠돎'을 계획하는 건 버릴 수 없는 가장 큰 내 꿈이다. 사르트르로 하여금 '20세기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는 헌사를 바치게 한 체 게바라. 그가 말했다. "인간은 꿈의 세계에서 내려오는 존재"라고. 게바라 역시 혁명가이기 이전에 끊임없이 새로운 세상을 떠돌고자 했던 여행가였다.

나, 떠돎에 대한 제지할 수 없는 열망으로 다시 흔들리고 있다.
#불혹 배낭여행기 #이탈리아 #세계여행 #배낭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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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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