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남자들의 '우정'과 '의리', 왜 이렇게 불편할까

[영화평] 곽경택 감독의 <친구2>

13.11.17 16:40최종업데이트13.11.17 16:40
원고료로 응원
친구에게.

친구, 잘 지내는가.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벌써 25년이 넘었네. 긴 세월이지. 그래도 우리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이렇게 유지되고 있다는 게 난 놀랍기만 해. 더군다나 자네와 나는 법률가와 교육자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긴 세월을 함께할 만한 공통점이 별로 없다는 말일세. 그렇다면 우리 둘 사이를 여태껏 이어온 끈은 무엇일까. 나는 오늘 그 이야기를 한 번 하고 싶네.

어제, 내가 '형님', '동생'으로 부르기도 하는 선생님 몇 분과 함께 곽경택 감독의 <친구 2>를 보고 왔네. 개봉 첫날이었는데, 무려 30여만 명이 보고 갔다더군. 이 정도면 일단 '대박'이라는 말을 써야겠지. 전작인 <친구>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이런저런 기사와 인터뷰를 보았네. 전작 덕분인 것 같더군. 안 그랬겠나. 2001년에 <친구>를 본 관객이 800만을 훌쩍 넘었네.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숫자였지. 오죽하면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영화라는 식의 평가가 나왔겠는가. <친구>가 만든 유행어는 또 어떤가. '고마 해라 마이 묵었따 아이가', '내가 니 시다바리가' 등의 유행어는 복제에 복제를 거듭해 영원한 명대사의 반열에 오른 지 오래됐지.

난 공교롭게도 <친구>를 부산 옆 동네인 마산에서 보았네. 대학 선배가 소개한 한 여자와 연애하고 있을 때였지. 난 그때 폭력이 넘쳐나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화면이 내내 불편했어. 부산 사투리를 거칠게 구사하는 잘 생기고 멋진 배우들의 모습도 낯설었지. 무엇보다도 주먹 세계를 아련하게 바라보는 듯한 감독의 시선은 정말 참기 어려웠어.

그녀는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내게 멍한 표정을 지었어. 난 지금도 그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 그때 그녀의 표정은 내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지.

'남자들은, 아니 수컷들은 다 저래요? 무슨 우정이 저런대?'

그건 사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해. 자네도 알지 않는가. 내가 '우정'이니 '의리'니 하는 말들을 얼마나 싫어하는가를. '우정'이나 '의리'와 같은 말은 동문회나 동창회에 가면 정말 배 터지게 얻어먹고 오는 말 아닌가. 동창회나 동문회에 열성적인 자네와 달리 난 중학교든 고등학교든 동창회·동문회에 두어 번밖에 나가보지 않았네. 그곳에서 질주하듯 오가는 '우정'과 '의리'에 질렸기 때문이야. '우정'과 '의리'가 어디 말로만 이루어지는 것인가 말일세. 

곽경택 감독의 '우정과 의리론', 정말 불편했다

영화 <친구2>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내가 '우정'과 '의리'를 왜 싫어하는지는 전작을 통해 설명해 주고 싶네. 그러기 전에 우선 이 말부터 해야겠어. '우정'과 '의리'는 그것이 없는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이라는 것. 있으면 좋겠는데, 없으니 말이라도 해서 있는 척이라도 하고 싶은 거지. 돈 많은 부자는 적어도 결코 겉으로는 돈 많다고 하지 않는 걸 생각해 보게나.

내가 보기에 <친구>의 '준석'과 '동수'에게는 '우정'과 '의리'가 없었어. 그걸 바라고는 있었지. 어린 시절에는 '우정'과 '의리'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도 많이 했어.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어. 그들이 진정한 '우정'과 '의리'를 나누기에는 그들의 세상이 너무나도 거칠었어. 그들만의 '우정'과 '의리' 대신에 욕망과 배신이 지배하는 생지옥이었던 거야. '우정'과 '의리'는 그 생지옥의 고통과 두려움을 희석시키는 순간의 진통제였을 뿐이지.

내가 너무 삐딱한가? 그럴지 모르겠네. 세상엔 참된 우정을 나누고 인간적인 의리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없지 않으니까 말일세. 그런데도 나는 더 삐딱한 말을 하고 싶네. 친구를 배신하지 않으면 '우정'인가? '형님', 혹은 '아우'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게 진짜 '의리'인가? 그렇게 '우정'과 '의리'로 하나가 된 그들이 있어 세상은 아름다워지는가?

그래서였을까. 동료 선생님들과 영화관에 가기까지 제법 망설였어. 조폭들을 미화하고, 폭력적인 '우정'과 '의리'를 설파하는 듯한 전작의 시선을 다시 볼까 염려했던 거야. 하지만 '다시 한 번'을 떠올렸네. '공짜 영화'에 혹하지 않을 도리도 없었네('형님'처럼 모시는 선생님이 영화비를 쏴 주었지. 그렇다면 '의리'를 아는 '형님'인가.).

처음엔 내심 기대를 안 한 게 아니었네. 표를 끊고 5분 정도 기다리다가 한 장짜리 영화 홍보지를 보았어. 훑어보다 보니 약간의 기대감이 생기더군. <친구>가 남자들의 '과거'를 추억하는 영화였다면 <친구2>는 남자들의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영화가 되었으면 한다는 감독의 말이 보였기 때문이야. 내딴에는 그 '미래'를 통해 전작의 폭력적인 '우정과 의리론'을 나름대로 극복하고 있으려나 여겼지.

하지만 그런 '혹시나'의 기대는 '역시나'로 여지없이 무너졌네. 결론적으로 말하건대, <친구2>에 그려진 곽경택 감독 특유의 '우정과 의리론'은 정말 불편했어. 남자들의 뻔한 '우정'과 '의리'를 '향수'로 장식한 전작과 비슷하게, <친구2>는 '우정'과 '의리'의 대책 없는 '미래'를 그린 것이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어. 내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시게. 그러려면 영화 이야기를 조금은 하지 않을 수 없겠네.

<친구>에서 '우정'과 '의리'의 핵심 당사자는 '준석'과 '동수'였지. 하지만 '동수'는 죽고 '준석'은 감옥으로 갔어. <친구2>는 '동수' 자리에 그 아들인 '성훈'을 집어넣었지. 그러고는 그를 17년간 감옥살이를 한 '준석'과 짝을 지웠어.

'성훈'은 자신을 믿었던 유일한 '남자 어른'인 '준석'을 진짜 믿고 따르네. 그런데 그는 과거에 '준석'의 오른팔이었다가 현재에는 '준석'의 적이 된 '은기'로부터 비밀스러운 과거 이야기를 듣지. 이 때문에 겪는 혼란과 갈등이 극의 절정과 대단원으로 이어지는 구도일세.

이들이 만든 결말은 어땠을 것 같은가? '미래'를 언급한 감독의 말을 참조한다면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게야. 문제는 그렇게 그려진 '미래'가 나로선 도무지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안 간다는 데 있어. 구체적인 그림이 없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미래라고 하면 될까. 감독이 인물들에게 안겨준 유일한 대비책이 있긴 하네. 그게 바로 감독 특유의 '우정과 의리론'일세.

하지만 생각해 보게. '우정'과 '의리'만으로 어떻게 미지의 미래를 살아가겠는가. 흐르는 시간은 과거의 위악과 폭력의 기억을 추억으로 만들기도 하지. 그렇다면 혹시 그 추억의 힘으로 아름답게 포장된 채 되살아난 '우정'과 '의리'가 살아가는 힘을 줄 수 있을까. 아마도 감독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렇게 결말이 '낭만적'으로 그려졌겠는가.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수컷' 문화, 이젠 벗자

영화 <친구2>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영화에서 '우정과 의리론'은 세상을 지배하는 거의 유일무이한 키워드네. 그것은 이 세상을 보는 눈을 결정하네. 세상 일을 가르는 유일한 잣대가 되기도 하지. 이게 온당한가. 자네도 잘 알겠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얼마나 복잡한가. '우정'과 '의리'만으로 가를 수 없는 일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인간사의 어려움과 관계의 미묘함은 '우정'과 '의리' 따위로는 도저히 다 설명하지 못하지. 당연히 절대 그래서도 안 되고!

<친구2>도 그런 점을 알고는 있었던 것 같아. <친구>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았던 '역사'가 <친구2>에서 그려졌기 때문이야. <친구2>에는 '준석'의 아버지 '철주'가 나오네. '철주'는 인간적인 '주먹의 시대'를 대변하는 1960년대 인물로 그려져. 하지만 그는 한일 정치 관계의 지형속에서 적극적인 변모를 도모해. 이 과정에서 돈을 끌어 모으고 '부산'의 뒷골목을 평정하지. 부산의 '철주'와, 그 뒤를 잇는 '준석'에게는 그 나름의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뒷배경이 있었던 셈이야.

'성훈'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일부러 도식적으로 보자면 '성훈'은 비정한 '칼의 시대', 혹은 '돈의 시대'를 표상하네. 영화에는 '준석'이 '성훈'에게 깡패 세계의 '형님, 동생 호칭론'을 설파하는 대목이 나오네. '돈만 주면 됩니다'는 '성훈'의 말에 '준석'은 '돈이 다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예의 '형님, 동생 호칭론'을 이야기하지. 그 호칭론 담화를 통해 감독은 '주먹의 시대'와 '칼·돈의 시대'를 대비하려고 했던 것 같아.

그런데 조금 혼란스럽지 않은가. 난 도대체 아직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이 대목에서 감독이 말하려고 했던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세상을 지배하는 주요 수단이 '주먹'에서 '칼'과 '돈'으로 바뀐 깡패 세계의 역사적인 변화상일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컷'들이 갖는 '우정'과 '의리'의 의의일까.

전자라면 <친구2>는 <범죄와의 전쟁>(감독 윤종빈, 2012)의 아류가 되겠지. 하지만 단언컨대 그것은 감독의 진짜 의도가 아니었을 거야. 후자라면? <친구>의 유일무이한 후속작이자, 평소 곽 감독이 싫어한다는 '형만한 아우 없다'고 할 때의 그 '아우'가 되지 않을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내가 보기에는 감독의 초점이 바로 여기에 놓여 있지 않았을까 싶어.

요컨대 <친구2>는 감독 특유의 '우정과 의리론'을 살리기 위해 동원된 '역사'가 결코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는 말일세. 어떻게 되었으면 더 좋았을까. 나는 그 '역사'가 전혀 무용했다고 말하고 싶네. 부자지간인 '철주'와 '준석'은 그렇다 치세. 그런데 '성훈'과 '철주'는 어떻게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난 그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가 없었어.

친구, <친구2>의 '우정과 의리론'을 '까는' 이유가 있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그것은 '수컷'들의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지배를 정당화하기 때문일세. (말만의 것일지라도) 대한민국에서 '우정'과 '의리'가 빠진 수컷들의 관계를 상상할 수 있겠나. 어쩌면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수컷'들의 권력 관계가 바로 이 '우정과 의리론'으로 작동된다고 보아도 되지 않을까.

'우정과 의리론'은 '수컷'들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부풀려 인식하도록 하네. '우정'과 '의리'로 뭉쳐진 관계에서 수컷들은 전능감을 느끼기도 하지. 그런데 이렇게 한껏 고양된 자기 정체감과 전능감은 현실적이고 상식적인 판단을 힘들게 하지. 그때부터는 '우정'과 '의리'만이 판단의 유일한 준거가 되는 '악순환'이 펼쳐질 뿐이야.

왜 '악순환'일까. 이때의 '우정'과 '의리'가 결코 진정한 의미의 우정과 의리가 아니기 때문일세. '악순환'속의 '우정'과 '의리'는 그저 벌거벗은 자기 욕망의 외투일 뿐이야. '준석'이 '성훈'에게 던진 치명적인 한 마디가 있네.

"니 내랑 부산 접수할래?"

이제 내 말의 결론을 짐작할 수 있겠는가. '준석'과 '성훈'에게 '우정'과 '의리'는 '부산 접수'의 수단일 뿐이야. '우정'과 '의리'가 노골적인 자기 욕망의 하수인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지. 이때 우리는 '우정'과 '의리'를 무엇으로 대신 불러야 할까.

그런 추악한 하수인의 지배를 받는 대한민국 '수컷'의 세계는 얼마나 삭막한가. 나는 이 나라를 '우정'과 '의리'로 뭉친 동창회와 동문회, 또는 동기회가 지배하는 나라라고 말하고 싶네. 아주 대놓고 자신들만의 리그를 만들어가고 있는 지금 이 나라의 권력층을 보게. 자네가 일하는 법조계의 기수 문화나 동문회 문화는 또 어떤가. '의리'를 유난히도 중시하는 이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싶긴 하네만 말일세.

친구, 난 우리 사이에 깊은 '우정'과 '의리'가 있음을 믿네. 자네도 분명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런데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이고 싶어. 나도 물론 그러겠지만 자네도 그 '우정'과 '의리'를 우리 둘 사이만의 관계에 국한해서 받아들이지 말았으면 좋겠어. '우정'과 '의리'를 통해 작동되는 인간 관계나 '우정'과 '의리'가 투사되는 관심사의 범위를 넓히자는 게지.

'우정'과 '의리'가 '나'의 관계망을 넘어 '우리'와 '모두'의 것으로 향할 때, 가령 "남자가 좀 대차게 살아야 안 되겠습니까."('성훈'의 대사)에서 파생되는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수컷' 문화도 줄어들지 않겠는가 말일세. 난 곽 감독이 그리고 싶었을 '남자들의 미래'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믿고 싶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친구2> 곽경택 감독 '우정과 의리론'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