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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없는 정부가 불러낸 철 지난 이 영화

[리뷰] 민간 의료보험의 실체를 밝히다, 마이클 무어의 <식코>

13.12.22 10:32최종업데이트13.12.22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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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코 포스터 ⓒ 식코 공식 사이트

지난 15일 서울 여의도 공원에서는 의사 2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의료제도 바로세우기 전국의사궐기대회'가 열렸다. 영리병원과 원격진료 허용은 거대 자본의 의료시장 잠식을 불러오고 이는 결국 의료민영화로 이어진다는 의사협회의 주장에 맞서 정부는 의료 부문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것일 뿐 의료 민영화와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양측의 대립은 더 첨예해지는 모양새다.

그런데 이 장면 어디서 많이 봤다. 2008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임기 초 의료민영화로 시시비비를 따졌던 그 일련의 사건들. 이 유쾌하지 않은 기시감을 뒤로 하고 떠오른 영화가 있다. 바로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

<식코>는 2008년 4월 우리나라에 개봉한, 소위 좀 지난 영화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 개봉 9일 만에 2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할 정도로 예상 외의 흥행을 거뒀다. 당시 쟁점이었던 의료민영화 문제로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렸던 <식코>. 이 영화가 이 시점에 다시 주목 받고 있는 건 어쩌면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과연 <식코>가 들려주는 민간 의료보험의 실상은 어떨까?

아름답지만은 않은 나라, 미국

미국은 서구 국가 중 유일하게 의료보험을 민간기업에 위탁한 나라다. 3억 명이 넘는 인구 중 의료보험 가입자는 약 2억 5천만 명, 미가입자는 약 5천만 명. 흥미로운 건 <식코>는 의료의 사각지대에 놓인 '안타까운 5천만 명'의 이야기가 아닌 의료보험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 받는 '운수 좋은 2억 5천만 명'에 대한 보고서라는 점이다.

<식코>는 뚜렷한 의도가 보이는 영화다. 민간 의료보험제도의 폐해를 여과 없이 보여주려 노력한다. 영화는 한 남자가 찢어진 자신의 무릎을 직접 꿰매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차분한 분위기의 BGM 덕분에 이 장면은 더 기괴하게 느껴진다. 바로 뒤의 에피소드는 더 가관이다. 작업 중에 왼손 중지와 약지를 잃은 남자. 이 남자는 6만 달러의 중지와 1만 2000달러의 약지 중 하나만 선택할 것을 강요 받는다. 결국 그는 합리적(?)으로 약지를 선택하고 중지와는 이별하고 만다.

계속해서 영화는 의료보험에 가입했지만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옮기는 데 주력한다. 중산층의 삶을 이어가다 의료혜택을 받지 못해 한 순간에 파산해 버린 부부의 사연, 40도가 넘는 고열에 쓰러진 딸을 응급실로 옮겼지만 해당 '보험사 계열 병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치료 거부를 당해 딸을 잃은 엄마의 이야기, 보험사에서 약 처방을 거부하는 바람에 남편을 암으로 떠나 보낸 부인의 사연 등. 극중 마이클 무어의 내레이션처럼 "보험회사라는 것은 우리를 살려줘야 하는 사람들"이지만 오히려 보험가입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아이러니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안녕'하지 못한 자본의 논리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생활수준을 자랑하는 미국의 의료 상황은 왜 이렇게 된 걸까? 대형 의료보험회사인 휴매나 생명의 의학고문으로 일했던 린다 피노 박사의 1996년 5월 30일 의회석상 양심 증언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저는 공적으로 털어놓을 것이 있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1987년 어느 봄날, 저는 의사로서 한 사람에게 꼭 필요한 수술을 불가했습니다. 그 수술은 목숨이 걸린 일이었고 그는 사망했습니다. 제가 한 그 일은, 회사 자금 오십만 달러를 아끼는 일이었습니다. 저의 행동은 의학고문이라는 간판을 유지하게 해주었고 의료서비스업계에서 제 승진도 보장했습니다. 직장에서 제 일은 저의 전문 감정이라는 것을 이용해 제가 근무하는 기업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의료민영화의 논리는 '자본'이다. 보건복지부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원격진료 대상자는 약 870만 명. 따져보시라. 원격진료 기기를 팔아 먹기 위해 법이 허용되길 손꼽아 기다리는 기업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뿐만 아니라 영리병원이 허가되면 동네 구멍가게가 기업형 슈퍼마켓에게 자리를 빼앗긴 것처럼 동네의원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되고 의사들은 자본의 피고용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 과정에서 국민의 건강은 뒷방 늙은이 취급 당할 것이 불 보듯 뻔한 것이고.

촘스키는 자신의 저서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에서 "공공기업의 민영화는 공공기업을 민간 기업이나 외국계 다국적 기업에 넘기려는 속임수일 뿐이다. 이런 민영화는 대체로 부패한 정부에서 주로 시행된다"고 밝힌 바 있다. 촘스키의 견해, 즉 민영화의 부작용이 사회적으로 공유되자 정부는 작전을 바꾼 모양이다. 민영화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민영화는 절대 없으니 믿어 달라"며 진정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새로운 프레임을 짜고 있다. 그러나 지난 1년간 대선 공약을 단 한 건도 이행하지 않은 정부에게 신뢰를 보내달라는 말은 내 새뱃돈을 맡아주겠다는 엄마의 약속만큼이나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국민을 두려워하는 정부? 정부를 두려워하는 국민

영화 종반부, 마이클 무어는 의료보험혜택을 받지 못하고 질병에 시달리는 몇몇 출연자를 데리고 쿠바로 간다. 폐질환을 앓고 있는 레지는 미국에서 120달러에 육박하는 하는 호흡기가 쿠바에서는 단돈 5센트라는 사실에 망연자실한다.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며 울먹이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분노인지 체념인지 모를 떨림이 묻어 나왔다.

이 장면은 의료민영화의 단면을 그대로 설명해준다. 사람들이 <식코>에 관심을 두고 '함께 보기 운동'까지 일으켰던 이유는 이 영화가 옆집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집 이야기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리라.

미국과의 의료보험 체계를 비교하기 위해 프랑스로 간 마이클 무어는 한 프랑스 여자와의 인터뷰를 영화 속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이 나라에서 모든 것을 움직이는 건, 여기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정부는 반대를 겁내고 국민의 반응을 무서워합니다. 오히려 미국 사람들은 정부라면 옴짝달싹 못하잖아요."

미국이라고 쓰고 한국이라고 읽어보라. 낯설지 않다고? 나도 그렇다. 가슴 속에 중국발 미세먼지가 가득 찬 기분이다.

식코 마이클 무어 의료민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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