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여자, 세상 끝에서 밀양을 외치다

남미 9개국, 80여 도시를 돌며 '송전탑 반대' 사진을 찍다

등록 2013.12.31 16:13수정 2013.12.31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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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마추픽추에서 든 '밀양 송전탑 반대' 피켓 ⓒ 김은희





"오빠가 배낭 사줬으니까 나는 마추픽추에서 피켓 만들어 오빠 사무실 홍보 해줄게."
"좋지! 아, 근데 마추픽추에서 밀양 송전탑 반대 피켓 들고 사진 찍어서 블로그에 올려 보는건 어때? 송전탑에 대해서도 널리 알릴 수 있고, 의미도 있고 괜찮을 것 같은데?"

부끄럽게도, 오빠와 이런 대화를 하는 중에도 난 밀양 송전탑 건설 문제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그 당시 나의 관심사는 온통 며칠 후면 떠날 '남미여행'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오빠의 뜬금없는(?) 제안 때문에 나는 밀양 송전탑 관련 정보를 찾기 시작했고, 문제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될수록 마음이 불편해졌다.

'동양 최대 규모의 전력량'을 자랑하는 송전탑이 내 고향 밀양에 세워지면, 엄청난 전자파가 발생해 인근 지역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음이 구간'이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평생을 땅만 일구며 순박하게 살아온 지역 시골 어르신들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점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페루·볼리비아에서 든 '밀양 송전탑 반대' 피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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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이과수폭포에서 든 '밀양 송전탑 반대' 피켓 ⓒ 김은희


그렇게 무거운 마음을 가득 안고 꿈에 그리던 남미, 콜롬비아에 도착했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10배는 더 멋지고 매력적인 콜롬비아를 여행하던 중 오빠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레포츠의 천국이라 불리는 콜롬비아의 작은 도시, '산힐'에서 작은 문구점을 찾았다. 도화지를 산 후 배낭 깊숙이 넣어뒀던 매직을 꺼내어 오빠와 의논한 문구를 정성스레 적었다.


'내 고향 밀양에 송전탑을 세우지 마세요! 핵발전소가 없는 태양과 바람의 나라를 꿈꿉니다.'

애초에는 마추픽추에서만 밀양 송전탑 반대 피켓을 들고 사진을 찍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왕 하기로 한 거 뉴스에서조차 보도를 자제하고 있는 내 고향의 문제, 밀양 송전탑 이야기를 나라도 좀 더 열심히 알리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래서 방문하는 도시마다 송전탑 반대 피켓을 들고 사진을 찍어서 페이스북과 내가 운영하는 블로그, '시골여자의 촌티나지 않는 여행'에 올리기로 했다.

페루의 공중도시 마추픽추의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배낭을 열어 송전탑 건설 반대 피켓을 꺼냈다. 마추픽추의 감동에 빠져있는 여행 동행자들에게 "나 이거 중요한 거야, 빨리 사진 좀 찍어줘"라며 채근하기도 했고, '소금호수'라 불리는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으로 투어를 떠날 때 내가 가장 먼저 챙긴 것도 송전탑 반대 피켓이었다.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어있는 웅장한 이과수폭포에서는 매의 눈으로 적당한 외국인 관광객을 콕 찍어서는, 피켓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관광지뿐만 아니라 해발 4060m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시인 볼리비아의 '포토시'에서도, 아르헨티나에 있는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도시 '우수아이아'에서도, 에콰도르 해발 4100m 안데스 산맥 줄기에서도, 페루의 수도 리마 광장에서도 어김 없이 난 피켓을 들었다.

80여개 도시를 여행하며 찍은 밀양 송전탑 반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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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 우유니 사막에서 든 '밀양 송전탑 반대' 피켓 ⓒ 김은희


그렇게 나는 240일 동안 남미 9개국, 80여개 도시를 여행하면서 틈틈이 송전탑 반대 사진을 찍었다. 물론 너무 바쁘게 노느라 사진을 찍지 못한 곳도 꽤, 솔직히 엄청 많다. 하지만 나는 이 메시지를 적은 종이를 마치 로또 1등에 당첨된 복권을 간직하듯 혹시 찢어지지는 않을까, 잊어버리지는 않을까 싶어서 제일 안전한 곳에 보관하며 그렇게 여행을 다녔다.

송전탑 반대 피켓을 들고 사진을 찍고 있으면 여행지에서 만난 외국 친구들이 질문을 하곤 했다.

"종이에 적힌 글이 너희 나라 말이야? 무슨 내용이야?"

마음 같아서는 내가 사는 곳 밀양이 어떤 도시인지 부터 시작해 그곳에 건설되는 송전탑의 전력이 어쩌고저쩌고, 주민들이 어쩌고저쩌고. 정말 침을 튀겨가며 설명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들에게 모나리자의 애매한 미소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 남미이지 않은가! 게다가 자기소개도 아닌 밀양 송전탑 관련 이야기를, 영어도 아닌 스페인어로 해야 한다니...

스페인어로 이런 내용들을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765kV의 고압 송전선이 밀양이 아닌 내 머릿속을 지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자랑스러운, 아니 자랑스럽고 싶은 밀양의 딸이 아니던가. 호스텔에서 열심히 사전을 찾아 밀양 송전탑에 관한 이야기들을 스페인어 문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어설프게 작문한 문장을 외워 더듬더듬 현지인 친구들에게 입술을 바르르 떨며, 손과 팔은 더 바쁘게 움직이며 대충 설명했다. 친구들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잘 해결됐으면 좋겠다"고 했으니 내 설명이 어느 정도 전해지긴 했나보다.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여행자의 관심'이라는 폴더를 만들어 남미를 여행하면서 찍은 밀양 송전탑 반대 사진을 올리기 시작한 후, 몇몇이지만 함께 송전탑을 반대해주는 사람이 생겨 뿌듯했다. 또 남미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 여행자가 "아 시골여자님! 밀양 송전탑 반대하시는 분이죠? 블로그에서 봤어요"라며 내게 먼저 인사를 해 줄 때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내 고향 밀양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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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엘찰튼 피츠로이에서 든 '밀양 송전탑 반대' 피켓 ⓒ 김은희


밀양 송전탑 반대 현장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진 못했지만, '나로 인해 이 문제에 대해서 단 한 명이라도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생긴다면 내게는 기쁨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응원해 주시는 분들이 계서서 정말 행복했다.

8개월 동안 남미의 여러 나라들을 방문했고 입이 쩍 벌어지고 가슴이 먹먹해질 만큼 아름다운 도시들을 가봤지만 그곳에서 나는 단지 여행자일 뿐이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 하지만 고향은 어떤가? 굳이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라는 이런 사전적인 의미가 아니더라도 고향은 내 마음의 안식처이자 나의 모든 것이다.

면적은 서울보다 넓지만 인구는 10만도 채 안 되는 소도시 밀양, 사람소리보다 새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리는 아름다운 밀양, 하늘에 총총 떠있는 별을 볼 수 있는 맑은 공기가 머무는 내 고향 밀양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남미여행은 2012년 12월부터 2013년 7월까지 8개월 동안 다녀왔습니다.
#밀양송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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