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예산 심사... 오히려 마음이 불안하다

[보좌관 일기] 시민 삶에 영향 미치는 정부 예산... 이렇게 심사해도 될까?

등록 2013.12.31 16:14수정 2013.12.31 16:14
1
원고료로 응원
a

여야가 국정원 개혁법안과 새해 예산안을 일괄 처리키로 합의한 시한인 30일 자정을 넘기자, 새누리당 최경환 원내대표가 본회의장에서 대기중이던 의원들에게 여야 협상 진통으로 본회의가 연기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 남소연


국회는 지금 예산과 법안 심의가 한창이다.

지난 10일부터 예산결산특별위원회(아래 예결특위) 예산안등조정소위원회(보통 계수조정소위라고 함)의 예산안 심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상임위원회별로도 예산심사소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가 날마다 열리고 있다.

비좁은 소위원회 회의장이 의원들과 보좌진, 전문위원, 입법조사관, 정부 관료들로 북적북적 붐빈다. 본인 질의 순서가 아닐 경우 드나들기도 하는 상임위 전체회의와 달리 소위원회는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자리를 뜰 수 없다. 게다가 상임위는 하루만 열리지만 소위원회는 1~2주 동안 거의 매일 진행된다. 종일 회의 배석하고, 돌아와 다음날 회의를 준비해야 하는 보좌진에겐 소리 없는 중노동의 시간이다.

예산 심의... 국회 보좌진에겐 중노동의 시간

예산소위가 끝나자마자 법안소위 위원으로 사보임(국회 상임위나 특위 위원을 교체하는 절차)하였다는 의원실의 후배에게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의원실은 보통 한 개의 소위 활동만을 하는데, 연이어 두 소위를 한다는 건 마라톤 풀코스를 뛰자 마자 북한산 등반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철인 3종에 버금간다 해도 의정활동의 실질적 성과는 예산과 법안으로 증명되는 것이니 소홀히 할 수 없다. 순전히 긍정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그동안의 노력이 결실 맺는 시기이기도 하다.

철이 철이니 만큼 오늘은 예산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 한다. 국회 관련 용어는 낯설고 어렵다. 예산 영역은 더하다. 미리 말했으니 마음 편히 전문용어를 사용하겠다.

예산안 심의는 국회의 중요한 권한 중 하나다. 헌법은 예산안의 편성·제출권은 정부에, 심의·확정권은 국회에 주어 균형을 이루도록 하고 있다.


심의는 연말에 진행되지만 예산안 편성은 중앙관서의 장이 중기사업계획서를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제출하는 1월 31일부터 시작된다. 기획재정부는 예산안 편성지침을 각 부처에 시달하고(4월 30일), 부처는 지침에 따라 예산요구서를 제출한다(6월 30일). 기획재정부는 각 부처 요구안을 심사 조정한 후, 차관회의, 국무회의, 대통령 승인을 거쳐 회계연도 개시 90일 전(10월 2일)까지 국회에 제출한다.

예산 편성이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는 반면 심의는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다. 올해만 봐도 10월은 국정감사가 있어서 사실상 예산심의가 불가능했고, 11월엔 여야 대치국면이었으니 12월에야 비로소 본격적 심의가 진행됐다. 해마다 양상은 비슷하다. 일찍 시작하면 11월, 늦어지면 12월, 아주 늦어지면 12월 말까지 간다. 시간의 양이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지만 현재 주어진 시간은 깊이 있는 심의를 하기에 너무 짧다.

예산안 심의는 단순히 정부의 예산 '지출 계획'에 대한 승인이 아니다. 예산안에 첨부되는 서류만 해도 세입세출예산 사업별 설명서, 예산안심의자료 및 부속서류, 성과계획서, 성인지 예산서, 조세지출예산서, 독립기관(국회, 대법원, 헌법재판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및 감사원 예산감액 내역 및 의견서 등이 있다. 이와 별도로 기금운용계획안, 국가 재정운용계획, 임대형 민자사업 한도액안, 임대형 민자사업 정부 지급금 추계서, 공공기관 중장기 재무관리계획, 국가보증 채무관리 계획 등의 서류가 줄줄이 있다.

a

'크리스마스 선물로 등록금 '반값' 주세요' 산타복장의 대학생들이 24일 국회 앞에서 국가장학금 예산을 증액하라며 박근혜 대통령의 '반값등록금' 공약 이행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이희훈


제목만 따라 읽어도 숨찬 서류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제대로 심의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제 아무리 능력 있는 보좌관이라도 국정감사 이후 짧은 기간에 이 모든 것을 소화할 수는 없다. 그러니 총체적 국가재정을 들여다보는 데 여력을 쏟기보다 사업별 심의에 집중하게 된다.

심의 절차는 국회법에 규정되어 있다. 정부의 시정연설, 상임위 예비심사, 예결특위 종합심사 후 본회의에서 심의·확정한다. 상임위에서 여야가 치열한 토론 끝에 증액에 합의하더라도 실제 반영은 어렵다. 법적으로 상임위 예비심사는 '존중'하도록 되어 있을 뿐 강제성이 없기 때문이다. 예산 심의에서 존중한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와 달리 감액은 민감하다. 상임위에서 삭감한 금액을 예결특위에서 다시 증액하려면 소관 상임위원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명확한 법조문의 중요성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결국 예산안에 대한 실질적 심의는 예결특위에서 이루어진다. 특히 사업 하나하나를 심의하는 계수조정소위에서 핵심적 논의가 이루어진다. 계수조정소위는 과거 보좌진 배석도 없이 비공개로 회의를 진행하여 비민주적 절차, 쪽지예산에 대한 논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계수조정소위를 예결특위 위원장, 여야 간사 3인 회의로 대체한 적도 있었으니 심의 절차의 투명성이 확보되었다고 온전히 신뢰하기 어렵다.

그 짧은 시간에 예산안을 심의하라니

올해 예산안 심의는 겉보기엔 상당히 평온하다. 국가보훈처의 경우, 야당이 편향적 안보교육과 불법적 대선 개입 책임을 이유로 기본경비 10% 삭감과 국가보훈처장 사과를 주장하면서 정회되기도 하는 등 마찰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다른 해만큼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진 않다. 드디어 협의의 정치가 통하는 국회가 된 것인가?

분명히 다들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잘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내 유전자 어딘가에 삐딱함이 각인되어 있는 듯하다.

예전에는 예산과 법안 심의 과정에서 정부의 일방적 강행에 맞서 점거농성과 몸싸움도 불사했다. 이런 방법밖에 없는 것인지 답답했지만 소수 정당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처음엔 싸우면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중엔 우리 힘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우리가 싸운 만큼 더 나빠지는 것은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은 과거의 방식으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새로운 답답증이 생겼다.

정부는 2014년 재정운용방향으로 국정과제 실천과 건전재정 기반 확충을 제시하였다. 국정과제를 중심으로 재정구조를 재편하겠다고 한 만큼 2014년 예산안은 정부가 지난 5월 제출한 '국정과제 이행을 위한 재정지원 실천계획', 이른바 '공약가계부'의 실행계획이다. 그렇다면 좀 더 치열한 심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불통을 자랑으로 여기는 정부 앞에서 대선불복 구호가 허공에 떠도는 기분이 드는 것은, 국회가 스스로의 권한을 최대한 활용하여 박근혜 정부의 독주를 견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예산안 심의에 있어서 국회의 권한이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총세입, 총세출, 재정수지, 채무 등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쉬운 일이었으면 진작 이루어졌을 것이다.

정부는 해마다 향후 5년 동안의 재정운용 계획을 수립한다. 중장기적 국가재정운용계획은 국회에 제출만하지 심의를 받지 않는다. 국회에 심의권이 없다 보니 정부는 제멋대로 중기재정운용계획을 수립한다.

a

박원석 정의당 의원. (자료사진) ⓒ 남소연

박원석 의원이 기획재정부가 2012년에 제출한 국가 재정운용계획(2012∼2016)과 2013년에 제출한 계획(2013∼2017)을 비교한 결과 불과 일 년 만에 대폭 수정된 것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2014년에 대한 계획을 비교해 보면 재정수입은 396조 원에서 371조 원으로 25조원 감소하고, 국세수입은 239조 원에서 219조 원으로 20조 원이 감소했다.

국가 채무비율은 재정의 중장기 지속가능성을 파악하는 매우 중요한 개념인데 2015년에 30% 이내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했던 국가채무가 2017년에 겨우 35% 수준을 달성하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또, 2012년 자료에서는 국가 채무 중 적자성 채무의 비율이 해마다 감소하여 2016년 47.6%까지 감소할 것으로 계획하였으나 2013년 자료에서는 반대로 해마다 비중이 증가하여 2016년 53.6%까지 증가할 것으로 수정되었다.

설명 없는 정부... 국회는 뭘 할 수 있을까

올해 제출된 국가 재정운용계획은 박근혜 정부가 제출한 첫 번째 중기재정 계획으로 향후 5년간 박근혜 정부의 재정운용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전년도 계획에서 큰 폭으로, 그것도 나빠지는 방향으로 수정되었다면 이에 대해 명확한 설명이 있어야 하지만 정부는 별다른 설명이 없었다.

정부가 마음대로 세운 중기 재정운영계획에 따라 분야별로 지출한도가 정해지고, 이에 맞춰 단년도 예산이 편성되니 그 안에서 지출을 확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사업별 예산을 소폭 조정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단년도 예산안만 심사해서는 전략적 재정 배분에 대한 검토가 불가능하다. 국회의 예산안 심의 권한은 딱 거기에 머무르고 있다. 이 틈에서 의원들이 확보할 수 있는 건 지역구 관련 예산뿐일지도 모른다.

주어진 권한은 막강하나, 권한이 온전히 행사되지 못하는 건 시민권을 배제당한 시민들만이 아니다. 시민권과 차이가 있다면, 국회의 예산심의권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권한을 행사하지 않을 권한이 없다. 권한에 제한이 가해진다면 이를 온전히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과거의 방법을 사용할 수 없는 지금, 정치권은 새로운 시험대에 서있다. 평온한 예산안 심의가 불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산심의 #예산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단독] 윤석열 장모 "100억 잔고증명 위조, 또 있다" 법정 증언
  4. 4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5. 5 '휴대폰 통째 저장' 논란... 2시간도 못간 검찰 해명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