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학생이 다시 광장에 나오기 위하여

[게릴라칼럼] 철도노조 파업철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

등록 2013.12.31 21:46수정 2013.12.31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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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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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총파업 대회, 수만명 운집 28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민주노총 총파업 1차 결의대회'에 파업중인 철도노조 조합원 등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수만 여명 참가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광장에 들어서지 못한 참가자들은 일부 도로를 점거한 채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 남소연


대학가에 여전히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던 시절, 보통 '학원자주화 투쟁'(학자투쟁)이라 불리던 교육문제로 데모를 할 때의 일이다. 보통 오후 2시에 모여서 집회를 하고 3시 30분에서 4시 즈음에는 '교육부 진격 투쟁'을 했다. 본대가 교문 앞을 나서면 전투경찰이 가로막는다. 그러면 본대가 전투경찰 앞에서 일정 시간 대치 후에 뒤로 빠지고, 사수대라 불리던 전투조가 앞에 나선다. 돌을 던지고 최루탄이 발사되면 어느 순간 화염병이 등장했다.

"우리는 교육부로 갑니다!" 찢어지는 외침이 계속 울러 퍼지고, 지루한 대치는 밤늦은 시간까지 계속됐다. 교육부로 가려는 본대와 이를 막으려는 전투경찰의 충돌은 학교 앞 거리를 화염병과 돌덩이가 나뒹구는 전쟁터로 만들었다. 

오후 5시쯤, 한 여학생이 물었다

어느 날이다. 한창 격렬한 대치가 이루어지던 오후 5시쯤, 한 여학생이 투쟁을 이끄는 지도부에 다가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지금이 5시인데, 이렇게 해서 언제 교육부로 갑니까? 교육부 직원들은 6시면 퇴근할 텐데요. 지금 지하철을 타고 가도 퇴근 시간에 맞추지 못할 텐데, 계속 이러고만 있으면 교육부는 언제 갑니까?"

그랬다. 소위 '선수'들은 알고 있었다. 교육부 진격투쟁이라는 것이 진짜 교육부로 가려 했다기보다 격렬한 대치를 이끌어 쟁점을 이슈화하기 위한 명분이었다는 것을. 그러나 운동권과 거리가 멀지만 투쟁의 명분에 공감해 본대에 선 여학생은 정말 교육부로 찾아가 항의해야 한다고 믿었고, 단지 의견을 전하겠다는데 이를 막는 전투경찰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루한 대치에 교육부로 갈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정말 교육부로 가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그럴 의지는 있는 것인지 지도부에게 묻고 있었다.

듣고 보니 그랬다. 소위 '운동권'으로 불리던 '선수'들과 평범한 대학생활을 즐기다 명분에 공감해 집회에 참여한 그 여학생 사이에는 어떤 인식 차이가 있었다. 그때 그 지도부가 뭐라고 했어야 옳았을까? "교육부 진격투쟁은 그냥 명분이에요"라고 했어야 할까, 아니면 다른 답을 내놨어야 할까?


함께 분노했던 시민들에게 뭐라 대답해야 하나

철도노조 파업 철회로 대단히 예민한 말들이 오고 가고 있다. 혹여 어떤 비판이, 최장 시간 파업을 어렵게 마친 앞으로도 징계와 해고의 위협에 시달릴 노조원들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을지 어떤 말도 꺼내기 조심스러운 상황이다. 그렇지만 파업 철회를 둘러싼 이런저런 인식 차이가 존재하고, 상이한 인식 간에 날선 공방이 일어나는 상황은 이 싸움이 그다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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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에게 끌려나온 경찰 28일 민주노총 총파업에 참가했던 참가자들과 대치하던 한 경찰이 병력 대오에서 시민들 사이로 끌려 나오고 있다. ⓒ 이희훈


그러나 이런 공방 와중에도 소위 '선수'들 말고, 예전에 '교육부는 안 가냐'고 묻던 그 여학생처럼 의연한 공분으로, 참을 수 없는 분노로 28일 거리에 나섰던 대중에게 전달되는 메시지는 매우 부족하다. 이런저런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 말고, 집회에 익숙한 사람들 말고, 22일 경찰의 민주노총 침탈에 분노해 28일 '민주노총 총파업 1차 결의대회'에 함께한 사람들은 철도노조의 파업 철회에 대단한 허무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박근혜? 국가기관이 대선에 개입한 것이 확실하니 책임져야 한다. 공안탄압? 선거부정을 덮으려는 정부의 생존전략이니 돌파해야 한다. 퇴진을 위한 실제적 행동? 정말 말이 아닌 정권 퇴진을 위한 실제적인 행동이 나와야 한다.'

또한 그들은 아마도 사상 최장기라는 철도노조의 파업에 마음 졸였을 것이다. '생계는 어쩌나? 저러다 해고되면 어쩌나? 그들을 위해 내가 뭐라도 할 일이 없을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서툰 솜씨로 피켓도 만들고, 플래시몹도 제안해보고, 이런저런 중요한 주말 약속도 미루고 28일 거리에 섰을 것이다.

생계박탈 위협에 처한 철도노조원들을 위해 후원이라는 것도 했을 것이다. 민주노총에서 1월 9일 총파업을 한다지만, 도대체 철도노조원들이 1월 9일까지 어떻게 버티라는 말이냐는 한탄도 했을 것이다. 몇몇 지도부가 외친 구호처럼, '정권 퇴진'을 위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심각하게 고민도 했을 것이다. 그런 고민과 사색으로 주말과 휴일은 흘렀다.

그런데 30일 월요일 아침에 불현듯 솟아오른 '파업 철회'라는 속보는 많은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곧이어 '파업 철회는 오보'라는 소식이 나오자 '그럼 그렇지' 했을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파업 철회는 사실'이라는 소식이 나왔을 때, 허무함이 밀려왔을 것이다.

28일과 30일 사이

단지 파업 철회라는 결과 때문이 아니다. 그 과정 때문이다. 오랜 시간 힘겹게 버텨준 철도노조원들에게 손가락질 할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28일의 격렬한 구호와 30일의 난데없는 속보 사이의 거리는 너무 짧았다. 당시의 구호에 '국회에서 소위라도 만들라'가 포함돼 있었다면, 국회 합의 내용에 최소한 '파업 참가자들에 대한 징계 철회'가 포함돼 있었다면, 허무감은 적었을 것이다. 국회 소위 결성이 '사실은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라는 언론기사로 알려지지 않고 공개적으로 진행됐다면, 그토록 당황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불가피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올바른 대응은 "철도노조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우리의 힘은 아직 여기까지다. 그렇지만 우리, 그들을 믿고 끝까지 싸워보자" 정도일 것이다.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고 허무하겠지만, 우리 포기하지 말자"고 다독이는 것일 테다. 그런데 일부의 반응은 당혹스럽다.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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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환 철도노조 위원장 격력하는 KTX 범대위 31일 오후 서울 중구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열린 철도노조 파업중단과 현장투쟁 전환에 따른 KTX 범대위 입장발표 기자회견에서 박석운 KTX 민영화 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 상임대표(왼쪽)와 권영국 변호사가 김명환 철도노조 위원장과 악수를 나누며 격려하고 있다. 이날 이들은 "철도 노동자의 파업투쟁에 성원해 주신 국민들에게 감사 드리며 철도 민영화 저지 투쟁은 계속 할 것이다"고 말했다. ⓒ 유성호


"뭐 다른 수 있어? 철도노조 혼자 죽으라고? 그들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어? 할 만큼 했잖아? 대안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거야? 민주노총도 총파업을 계획하고 있고 국회소위도 있으니까 거기에 기대를 걸어보자고."

철도노조의 파업 철회를 옹호하고 그들의 헌신적 투쟁을 인정해주기 위한 반응이라는 것은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이런 반응은 소위 '선수'가 아닌 '능동적 대중'들에게 대단히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 있다. 물론 박근혜 정권에게도.

참여율은 자신의 참여로 인해 무엇인가 바뀔 것이라고 인식하는 데에서 폭발적으로 상승한다. 그리고 그 실제적 가능성과 상관없이, 자신이라도 참여해서 무엇이라도 해보려던 이들은 파업 철회 과정을 지켜보며 자신의 무력함을 확인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단지 철도노조 파업만이 아니라, 이 잘못된 정권을 바꾸는 데 이제 자신이 더 이상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떠오를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여전히 철도노조를 지지하고 응원한다. 파업 철회의 불가피성도 인정한다. 지금 시점에서 소위 '선수'들이 다른 '선수'들 사이의 논쟁에서 철도노조에 힘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순수하게 참여하고 이 싸움을 헌신적으로 지지해온 능동적 대중이 느끼는 감정에도 관심을 보여야 한다.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느낄 수도 있는 허무함도 고려한 메시지가 나와야 한다.

결과가 뻔하지 않기 위하여

진보운동과 제도정치는 선순환 관계여야 하지만, 지금은 이 연결고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운동의 무력감과 제도정치로의 쏠림은 대중 참여를 높이거나 지속시키기 어렵다. 국회 소위가 만들어졌지만 그것이 광장에 모인 이들을 대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무르익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면 피켓을 만들고 거리에 나서야 할 동기는 더욱 사라진다는 딜레마에 빠진다. 2008년 촛불 이후에 그랬던 것처럼, 단지 선거 결과만을 목 빠져라 기다리는 것 외에 별다른 길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잘못된 메시지는 이것이다. 우리의 힘이 부족했다는 솔직한 성찰보다 당연한 귀결이라는 항변이 강조되는 주장, 퇴진 대상으로 규정한 이들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제도화된 공간에 희망을 걸자는 제안, 일정 수준 이상의 희생을 요구하지 말라는 저항의 한계선, 좋은 때를 기다리자는 근거 없는 대기론. 선수들 사이에서는 통용될 수 있는 주장인지 모르겠지만 28일이 시작이라 믿었던 이름 없는 이들에게는 무력감의 확인이다.

만일 예전 그 교문 앞에서, '왜 교육부로 안 가냐'는 여학생에게 "몰라서 묻는 거야? 그것은 그냥 명분이잖아. 우리 대표단이 따로 약속 잡아서 면담할 계획이야"라고 했다면, 그 여학생은 다시는 집회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지도부에 대한 배신감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참여가 이 싸움의 향방을 좌우할 정도로 의미 있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12월 22일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상승한 대중적 분노와 국민적 저항과, 이를 사회혼란으로 규정한 정권 사이에 존재하던 불안한 균형추가 이미 저편으로 기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앞으로 예정된 여러 싸움에서 능동적 대중이 사라진 채 선수들만의 싸움이 된다면, 그 결과는 뻔하기 때문이다.

새해를 맞이하는 지금, 한국 노동운동은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를 안게 됐다.
#파업철회 #민주노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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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생활속 진보를 꿈꾸는 소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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