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떼와 함께 나타난 '금지', 그리고 공포

[강기희 장편소설 <원숭이 그림자> ⑤] 늙은 고라니의 분노(1)

등록 2014.01.01 15:09수정 2014.01.06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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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원숭이 그림자>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작품 무대는 '피스'라고 하는 숲이며, 부정선거로 당선된 숲통령 먹바위 딸과 평화를 염원하는 숲민들의 한 판 대결이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숲을 무대로 한 우화소설이지만, 지금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이자 저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연재를 무사히 끝낼 수 있도록 독자 여러분의 아낌없는 격려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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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강기희


숲얼단의 진압과정에서 사라진 아이


숲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한창 짝짓기를 하거나 사랑을 노래해야 할 시간임에도 숲은 무서울 정도로 무표정했다. 왁자하게 숲을 뛰놀던 멧돼지도 고운 걸음을 자랑하던 사슴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키 높은 나무의 열매를 따주던 기린도 며칠째 보이지 않았다. 어쩌다 지나가는 청설모나 토끼도 무엇엔가 쫓기는 듯 휭하니 자리를 뜨거나 누군가를 찾는 듯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모두가 숨죽인 숲에 늙은 고라니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는 어디가 아픈지 걸음을 떼면서도 자주 숨을 헐떡거렸다.  

"혹, 우리 아이 못 보셨소?"

길모퉁이에 자리를 잡은 늙은 고라니는 아무나 잡고 물었다. 생김새를 이리저리 설명해도 다들 고개만 흔들 뿐 아이를 보았다는 이는 없었다.

"그 댁 아이가 대체 어딜 갔기에 그렇게 찾소?"


둥지를 나서던 검은 등 뻐꾸기가 물었다.

"며칠 전 숲 광장으로 간다고 나갔는데 여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오."
"에구, 숲 광장에 갔으면 그 댁 아이도 뭔 일을 당한 게 틀림없군요."
"뭔 일이라니요?"

검은 등 뻐꾸기의 말에 늙은 고라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자세한 건 나도 모르오. 다만 어제 새벽 숲얼단이 먹바위 딸 퇴진을 외치던 시위대를 진압했는데 그 과정에서 죽은 이도 있고 숲감옥으로 잡혀 갔다는 이도 있다고 해서 하는 말이오."
"죽…어요?"

그렇게 묻는 늙은 고라니의 심장이 쿵하고 요동쳤다.

"들리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나도 잘은 몰라요."

검은 등 뻐꾸기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숲감옥은요?"
"북쪽 어디에 있다는 얘기만 들었지 가본 적이 없어 나도 모르오."

검은 등 뻐꾸기가 그렇게 대답하곤 푸드덕 날았다.

도토리 준다는 공약은 거짓말!

늙은 고라니는 대명천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벌렁벌렁하며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그 착한 아이가 감옥이라니, 늙은 고라니는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늙은 고라니는 눈물을 쏟으며 그날 밤 아이를 집에 붙잡아 두지 못한 걸 후회했다.

"이놈아, 선거니 뭐니 하는 것도 있는 놈들이나 하는 놀음이다. 니 깐 게 그런 판엔 왜 끼어들라 하나!"
"우리가 투표한 걸 저놈들이 다 불태웠다고 하잖아요."

"그건 다 빨갱이 놈들이 꾸며낸 말이니 한 귀로 흘러 보내 거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도 못 들어봤더냐."
"하참, 먹바위 딸이 부정선거로 숲통령에 올랐다는데 그걸 어떻게 그냥 둬요."

"부정선거 한다고 해서 숲통령이 된다면 나 같은 년도 숲통령 하겠다."
"그게 아니라니까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잔말 말고 집에 있자. 그래야 도토리 열 가마를 받을 게 아니냐."
"어머니도 도토리 준다는 말에 먹바위 딸 찍었어요?"

"그럼 이놈아. 우리 같이 힘도 없는 늙은 것에게 도토리 열 가마가 어디냐."
"그거 다 거짓말이에요."

"거짓뿔은, 그 분은 그럴 분이 절대로 아니다."
"먹바위 딸이 어떤 여자인 줄 몰라서 그렇지요. 알고 나면 어머니도 실망하실 거에요."

"이놈아, 먹바위 딸이라니! 공주님한테 그럼 못써!"
"아, 내가 미친다니까. 암튼 내 잠시만 나갔다 올 거니 그리 아셔요. 혹 늦더라도 끼니 잘 챙겨 드셔야 해요. 알았죠?"

"이놈아, 나가면 안 된다. 나도 듣는 귀가 있으니 제발 당분간만 집에 가만히 있거라. 어미 부탁이다."
"잠깐이면 된다니까요!"

그 밤 아이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잠깐이었다. 그러나 잠깐이면 된다는 아이는 며칠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검은 등 뻐꾸기의 말대로라면 그 사이 숲얼단의 진압이 있었고 많은 이들이 죽거나 숲감옥으로 잡혀갔다는 거였다. 

'우리 아이에게 무슨 일이?…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늙은 고라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숲 광장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아이가 갔다는 숲 광장은 생각보다 멀었다. 작은 개울을 건너 험준한 고개 하나를 넘었음에도 숲 광장은 보이지 않았다. 가는 길 곳곳에 검문을 하는 초병이 서 있었고, 그들은 신원을 확인한 후에야 가던 길을 가게 해주었다.

늘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무슨 사달이라도 있어 그런지는 초행길을 나선 늙은 고라니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평생을 S·피스 변방에서만 살아왔던 늙은 고라니에게 피스 숲은 광활한 대지와 같았다. 늙은 고라니가 아픈 몸을 이끌고 죽자 하고 걸었지만 길은 가도 가도 끊어지지 않았으며 수갈래로 뻗어 있는 길은 그 끝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원숭이 떼가 만든 '금지'라는 말, 그 위력은 여전

다시 고개 하나를 넘은 늙은 고라니는 그늘도 없는 평지를 지나 완만한 등성이에 올랐다. 산 아래로 제법 큰 호수가 나타났고 호수 건너편에 숲 광장으로 짐작되는 넓은 버덩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기로군.'

늙은 고라니 그렇게 중얼거리며 호수로 내려갔다. 목이 마른데다 무엇보다 호수를 가로질러 가면 땀도 식힐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호수는 높은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있었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려보아도 틈 하나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철조망은 이중으로 설치되어 있어 멀리서 달음박질을 한다 해도 두 개의 철망을 무사히 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늙은 고라니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철조망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벼락같이 큰 고함이 들려왔다.

"이봐, 거기서 뭐하는 거야! 썩 물러나지 못해!"

소스라치게 놀란 늙은 고라니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머리부터 땅에 박았다. 죽은 듯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고함소리가 또 들려왔다.

"여긴 출입금지 구역이라는 팻말이 안보여!"

큰 일이 벌어진 건 아닌 듯싶어 슬며시 고개를 돌려보니 총으로 무장을 한 족제비가 팻말을 툭툭 치고 있었다.

"그, 금지요? 아이고! 자, 잘못했습니다. 목이 말라서 물을 급히 찾는다는 게 그만……."

글을 배운 적 없는 늙은 고라니로서는 출입금지라는 말에 덜컥 겁부터 집어 먹었다. 뭔가 잘못된 곳에 와 있거나 와서는 안 될 위험한 장소에 머물고 있음이 분명했다. 늙은 고라니는 본능적으로 몇 걸음 물러섰다.

언젠가부터 금지라는 말은 하지 말라는 건 해서도 안 되고 알지 말라는 건 알아서도 안 되고 오지 말라는 곳엔 다가가서도 안 되는 불멸의 금기였다. 금지를 어겼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간다는 사실 정도는 늙은 고라니도 잘 알고 있었다.

원숭이들이 피스를 점령하기 전까지만 해도 피스엔 금지라는 말이 없었다. 그동안엔 누구 하나 군림하는 자 없이 모두가 평등한 삶을 이어왔으니 감출 것도 막을 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랬던 피스에 원숭이 떼가 들어왔고, 그들은 곧장 피스점령법을 제정 반포했다. 그 법에 가장 많이 들어있는 단어는 '금지'라는 말이었다.

원숭이들이 처음 금지라는 말을 만들어 시행에 들어갈 때만 해도 그 말이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죽음까지 동반하고 있다는 걸 아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원숭이들이 금지한 것을 어긴 죄는 가차 없었고 그 자리에서 물고기 밥으로 던져졌다.

그 모습을 목격한 피스 숲민은 비로소 원숭이가 만든 금지라는 말에 대한 위력을 실감했으며 금지라는 말만 나와도 진저리를 쳤다. 그렇게 만들어졌던 금지라는 말은 원숭이 떼가 떠난 뒤에도 남아 지금까지 그 위력을 떨치며 숲민을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알았으면 얼른 꺼져!"

족제비가 총부리를 겨누며 턱짓을 했다.

"고, 고맙습니다!"

늙은 고라니는 스스로 운이 좋았다는 생각을 하며 족제비를 향해 극진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곤 몸이 아픈 것도 잊은 채 산자락으로 뛰었다. 늙은 고라니의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즈음 호수는 나무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늙은 고라니는 그제야 숨을 헐떡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에구, 이놈의 다리만 성해도 벌써 숲 광장에 당도했으련만.'

늙은 고라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통증이 일고 있는 다리를 주물렀다. 아이가 있었다면 이럴 때 어미의 다리를 잘도 주물러 주었을 것이다. 아이는 목이 다르다 하면 물을 가지고 왔고 약으로 쓸 풀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 풀을 찾아왔다.

늙은 고라니가 생각하기엔 효자도 그런 효자가 없었다. 그런 생때같은 아이가 어디로 갔는지 아니면 어떻게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으니 늙은 고라니의 애간장이 바작바작 타들어갔다.

"이놈아, 대체 어디 있더냐!……."

늙은 고라니가 호수 건너편을 바라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강기희 기자는 소설가로 활동중이며 저서로는 장편소설 <은옥이 1.2>, <개 같은 인생들>, <도둑고양이>, <동강에는 쉬리가 있다>, <연산> 등이 있으며, 청소년 역사테마소설 <벌레들> 공저로 참여했습니다.
#국정원 #부정선거 #고라니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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