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다르크가 죽은 이유... 지금 알면 더 섬뜩

[서평] 아마존크로싱 최초의 밀리언셀러 <사형집행인의 딸>

등록 2014.01.02 11:18수정 2014.01.03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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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집행인의 딸> 책표지. ⓒ 문예출판사

잔 다르크(1412~1431)는 프랑스의 영웅 소녀다. 그녀는 평범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났다. 불과 16세 나이에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벌어진 백년 전쟁에 출전해 눈부신 전과를 거뒀다. 프랑스 샤를 7세의 즉위에도 적극 관여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오래가지 않았다. 1431년, 마녀로 낙인 찍힌 잔 다르크는 화형장의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그녀 나이 고작 열아홉 살 때였다. 스무 살도 채 안 된 소녀가 마녀라는 사실을, 7번이나 마녀 재판을 담당한 당대의 재판관들은 어떻게 입증했을까. 그나저나 그녀는 과연 진짜 마녀였을까.


올리퍼 푀치의 <사형집행인의 딸>은 17세기 독일 바바리아 주의 숀가우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한 역사·추리물이다. 언론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 소설은 독일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러다 비영어권 도서를 영어권에 소개하는 아마존크로싱이 이 작품을 출간한 후 100만 부가 넘게 팔렸다. 이 작품을 밀리언셀러로 만든 흥행 코드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마녀'였을 것이다. 1659년 4월 24일 아침, 쇠락한 강변 도시 숀가우의 부둣가에 심하게 부상을 당한 소년이 발견된다. 숀가우 짐마차꾼 요제프 그리머의 아들이었다. 소년은 곧 목숨을 잃고 만다. 신망 잃은 동네 의사 보니파츠 프론비저의 아들 지몬 프레비저가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다.

지몬은 아이의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등을 덮고 있는 셔츠도 세게 잡아당겨 찢어버렸다. 사람들 사이에서 신음 소리가 일었다.
한쪽 어깨뼈 아래에 손바닥만 한 기호가 있었는데, 지몬이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빛바랜 보라색 원 밑에 불쑥 튀어나온 십자가가 붙어 있었다.
                                      ♀
순간적으로 부두가 완전한 침묵에 잠겼다. (43쪽)

'완전한 침묵'의 이유는 기호(♀) 때문이었다. 숀가우 사람들에게 그것은 마녀의 표식이었다. 그들에게는 70년 전 일어난 처참한 기억이 있었다. 불과 두 세대 전에 "시민들 절반이 나머지 절반을 마녀로 고발"(83쪽)해 "피가 개울이 돼서"(83쪽) 흐른 '마녀 사냥'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짧은 침묵 속에서 그들은 분명 70년 전의 대학살극을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분노와 저주의 표적이 된 사람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거리의 고아들에 다정다감한 그녀, 순식간에 마녀 돼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죽은 아이의 아버지가 기호를 보고 떠올린 '마녀'는 홀로 살아가는 산파 마르타 슈테흘린이었다. 그는 자기 아들이 그녀와 친하게 지낸 것을 생각해냈다. 그는 분노의 목소리로 슈테흘린을 마녀로 지목했다. 숀가우의 아이들 대다수가 그녀 손을 거쳐 이 세상에 태어났다. 거리의 고아들은 다정다감한 그녀를 엄마나 이모처럼 따랐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들 때문에 그녀는 순식간에 마녀가 돼버렸다.

슈테흘린이 마녀가 되는 것은 숀가우의 유력자들에게도 결코 나쁘지 않았다. 숀가우의 실질적인 지배자이자 권위로 똘똘 뭉친 법원 서기 요한 레흐너와 속물적인 시장·시의원 들은 처음부터 슈테흘린이 마녀라는 사실을 기정사실화했다. 신속하게 슈테흘린에 대한 심문 개시가 결정되었다.

하지만 주인공인 사형집행인 야콥 퀴즐은 그녀가 무고하다고 확신한다. 퀴즐은 슈테흘린을 안심시킨다. 본격적인 심문을 펼치기 전에 그녀에게 강력한 진정제를 줘 고통을 못 느끼게 도와준다. 하지만 상황을 악화하는 일들이 연이어 벌어진다. 제2, 제3의 아이가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일이 터진 것이다.

소설의 나머지는 퀴즐과 지몬, 퀴즐의 딸 막달레나가 사건을 해결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전형적인 추리소설 기법에 따른 구성이다. 올리퍼 푀치의 세밀한 정경 묘사는 압도적이다. 카메라 앵글이 눈앞의 정경을 남김없이 훑는 듯하다. 작위적인 인물 묘사나 우연적인 몇몇 상황 설정 대목만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잘 써진 추리소설이다. <사형집행인의 딸>을 밀리언셀러로 만든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사형집행인의 딸>의 고갱이는 정작 다른 데 있다. 밀리언셀러 대박 흥행 코드의 핵심이자 작가 올리퍼 푀치의 주제 의식 등이 농축되어 있는 '마녀'가 그것. 마녀 모티프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마녀'는 사악하면서도 신비로운 이미지를 함축한다. 상상력을 자극한다. 비밀의례나 사술(邪術) 등을 포함해 당대의 금기를 환기하도록 한다. 마녀 심문에서 이뤄지는 야만적인 고문, 잔인한 처형 등도 독자들의 흥미를 이끄는 요소들이다.

이것들보다 좀 더 본질적인 요소가 있다. 그 누구라도 마녀 사냥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는 것. 부당하고 억울한 희생자가 언제든지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전율을 가져온다.

옛날 그 일이 있었을 때 가장 타격을 받은 것은 그다지 부유하지 못한 일반 시민들이었다. 농민, 젖 짜는 여자, 농장 일꾼······. 하지만 여관 주인이나 판사의 아내가 고발당하기도 했다. 그들은 고문 끝에 자기들이 주술로 우박을 동반한 폭풍을 불러왔으며 신성모독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심지어 자기 손주를 죽였다고 자백한 사람도 있었다. 그때의 공포는 지금도 깊이 박혀 있었다. (83쪽)

70여년 전인 16세기 말, 숀가우에서 일어난 대대적인 마녀 사냥에 대해 전지적인 서술자가 언급해주는 내용이다. 마녀 사냥의 일차적인 표적은 '농민'이나 '농장 일꾼'과 같은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슈테흘린처럼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 놓여 있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마녀 사냥의 광기 어린 칼날은 이들만을 향하지 않았다. '여관 주인'이나 '판사 아내'와 같이 사회·경제적으로 유력한 집안의 여자들도 표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비운의 마녀 처형하려면...

이유가 있었다. 우선 마녀임을 밝히는 데 마녀인지 아닌지를 밝히는 증거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비운의 마녀를 처형할 수 있으려면 자백만 있으면 됐다. 레흐너 서기를 포함해 숀가우의 유력자들이 극악스럽게 고문에 집착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일방적으로 이뤄지는 마녀 지명 뒤에는 가혹한 고문이 수반하는 심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죔쇠로 손가락을 으스러뜨리기, 벌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살을 지지기 등은 약과였다. 마녀의 몸에 바윗덩어리를 매달아 관절에서 뼈를 빼버리는 무시무시한 고문도 있었다.

"마녀에게 물의 시험을 받게 하는 건 어떻소?" 구빈원장 빌헬름 하르덴베르크가 제안했다. "몇 년 전 아우크스부르크에서도 그 시험이 실시된 적이 있소. 마녀의 엄지를 발가락과 함께 묶은 뒤 물에 던지는 거요. 여자가 수면으로 떠오르면 그건 마녀가 그 여자를 도와줬다는 증거이니 여자는 마녀지. 만약 여자가 가라앉으면 무고한 것이지만, 어쨌든 여자를 제거할 수 있소." (406~407쪽)

마녀로 지목되는 순간이 바로 마녀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 덫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녀 사냥의 광기가 더욱 공포스러운 이유가 있다. 공동체 전체를 단번에 궤멸시킬 수 있는 저주와 불신의 바이러스가 그것. 광기에 빠진 마녀 사냥꾼들은 결코 '괴물'이 아니다. 평범하고 선한 이웃들이다. 그런 그들이 평소 못마땅하게 여긴 이들을 마녀로 고발한다. 우리 가슴 속의 마녀 사냥꾼이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숀가우의 많은 부인들은 마녀와 어울린 다른 마녀들이 누군지 짐작하고 있었다. 눈빛이 사악한 옆집 여자, 저쪽 뮌츠 거리에서 구걸하는 여자, 아무것도 모르는 착한 남편의 뒤를 쫓아다닌 하녀······. (326쪽)

마녀 사냥꾼은, "실제로는 마녀가 없다 해도, 범인은 항상 필요"(125쪽)한 사람들이었다. 가령 법원 서기 레흐너와 같은 숀가우의 유지들에게는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 유지가 마녀가 필요한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역설적이게도, 마녀가 그들 권력자들의 힘을 유지해 주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었던 것이다.

1659년의 독일 숀가우에서 일어난 마녀 심문은, 다행히도 광기 어린 마녀 사냥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사형집행인 퀴즐의 지혜와 용기, 막달레나를 사랑하는 청년 의사 지몬의 사랑과 열정 그리고 지몬을 사랑하는 막달레나의 당돌함과 현명함이 힘겹게 만들어낸 결과였다.

하지만 문제의 발단이 된 기호(♀)의 정체가 풀리는 순간, 우리는 마녀 사냥의 광풍이 이토록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시작될 수도 있구나 하는 걸 절절히 실감하게 된다. 소설 절정의 끝자락에서 노구의 시의원 아우구스틴이 지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마녀를 이용해 자기들의 이속을 챙기던 당대 권력자들의 뻔뻔스러운 민낯을 그대로 보여 준다.

불행한 잔 다르크에게는 퀴즐이나 지몬과 같은 행운의 조력자가 없었다. 전쟁 중 인질이 된 잔 다르크가 마녀로 몰린 것은 프랑스와 영국 모두로부터 버림 받은 정치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당시 끝까지 신의 계시를 믿는 독실한 신앙인 잔 다르크는 권력자들에게 성가신 존재였을 뿐이다.

슈테홀른이나 잔 다르크 이야기는 우리에게 '마녀 정치학'을 말해 준다. 위선적이고 파렴치한 권력자들과 이기적인 소시민들은 '마녀'를 매개로 하나가 된다. 희생물이 되는 마녀 덕분에 권력자들은 자신의 힘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다. 소시민들은 눈엣가시 같은 이들을 없애버림으로써 자신들의 이속을 좀 더 챙길 수 있게 된다.

하지만 1659년으로부터 두 세대 전쯤에 숀가우에서 일어난 마녀 사냥 이야기를 떠올려 보라. 그것은 자기 파멸적인 '마녀 정치학'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마녀 정치학'을 믿는 이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 전체를 단번에 쓸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덮고 나서, '종북몰이'라는 현대판 '마녀 사냥'이 횡행하는 대한민국을 떠올리는 이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덧붙이는 글 <사형집행인의 딸> 올리퍼 푀치 지음 ․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 12. 20 | 574쪽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사형집행인의 딸

올리퍼 푀치 지음, 김승욱 옮김,
문예출판사, 2013


#<사형 집행인의 딸> #올리퍼 푀치 #김승욱 #문예출판사 #마녀 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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