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숙인 남양유업 지난해 5월 9일 오전 서울 중구 브라운스톤 LW컨벤션센터에서 김웅 대표이사와 본부장 이상 간부들이 '대국민사과 기자회견'을 하며 고개숙이고 있다.
권우성
"물건 못 받는다고? 그딴 소리하지 말고 알아서 해. 죽여버린다 진짜 XX. 그럼 빨리 넘기던가. 씨X 잔인하게 해줄게 내가. 핸드폰 꺼져 있거나 하면 알아서 해. 당신은 XXXX 그게 대리점장으로 할 얘기냐 이 XX야. 당신 얼굴 보면 죽여 버릴 것 같으니까 XX아. 자신 있으면 들어오든가!"지난해 5월, 남양유업 직원이 대리점주에게 일방적으로 욕설을 퍼붓는 녹음파일이 공개됐다. 역시 파장은 컸다. 주식이 한 주에 100만 원을 넘어가는 몇 안 되는 기업 중 하나였던 이 회사의 주가는 폭락했다.
이 막말 파문은 대기업의 무자비한 밀어내기 관행을 알리는 도화선이 됐다. 유통업계가 약자인 대리점에 대하여 불공정 거래를 통해 밀어내기식 영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파만파로 커져갔다. 사회 전반에 팽배했던 '갑의 횡포'와 '을의 눈물'에 대한 유사 사례들도 봇물을 이뤘다.
외견상으로만 변한 '갑의 횡포' '을의 눈물'핑계 대기에 급급했던 남양유업은 뒤늦게 사죄를 했지만, 이미 불매운동 사태까지 벌어진 후였다. 특히 편의점들이 불매운동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물론 나도 기꺼이 동참했다. 아이들의 먹을거리를 만드는 기업에서 이런 짓을 벌이다니, 절대 용납하지 못할 일이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갑의 횡포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다고 생각했다.
나 하나 동참한다고 크게 바뀌진 않겠지만, 문제의 핵심을 알리고 장기적인 해결책을 이끌기 위해서는 개인의 작은 노력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아이들에게 줬던 우유나 유산균 음료 등 남양유업 제품을 비록 몇 백 원이 더 비싸더라도 다른 제품으로 과감히 바꿨다.
이후 남양유업은 거짓 변명과 외면으로 일관했다가 결국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열고 공개사과와 재발방지 대책 등을 약속했다. 공정거래위원회도 남양유업의 불공정 행위에 대해 123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한 데 이어 서울우유, 한국야쿠르트, 국순당 등 다른 업계로 조사를 확대했다.
체감상 별반 다를 게 없었지만, 외견상으로만 보면 많이 변한 듯했다. 유통업계는 앞 다퉈 상생협약식을 체결하고 윤리경영을 강조하며 '집안 단속'에 나섰다. 빙그레는 협력업체와 대리점의 불공정 거래 행위는 물론 재판매와 가격 유지 행위에 일벌백계 방침을 세웠고, 현대백화점은 전 협력사와의 모든 거래 계약서에 갑과 을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기로 했다.
나 하나 불매운동 동참, 괜한 일?
그리고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파문 이후 몇 달이 지나자 남양유업은 언론에 그다지 크게 오르내리지 않으면서 조용히 재기를 다졌다. 남양유업은 슬슬 가격인하 공세를 벌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동네마트 진열대에서까지 '1+1' 덤 행사를 벌이며 소비자를 현혹했다. 또 남양유업은 회사 이름보다는 '몸이 가벼워지는 시간'이라는 이름의 차음료로, '화학첨가제가 없다'는 프OO카페라는 이름의 커피로, '남양'이란 이름은 슬쩍 가린 채 소비자들 곁에 다시 다가서려 했다.

▲남양유업 횡포에 분노한 대리점 업주들 지난해 5월 7일 오후 서울 중구 남양유업 본사 앞에서 남양유업대리점협의회 회원들이 물량 떠넘기기와 영업사원의 폭언에 항의하며 남양 제품을 거리에 내팽개치고 있다.
유성호
그렇게 남양유업은 다시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려 했다. 불매운동 시작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1+1'과 대폭할인이라는 무기로 급신장하더니, 급기야 점유율을 거의 회복했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왔다. 오히려 반사효과를 누렸던 동종업계가 주춤한 상태였다. 결국 곤두박질친 남양유업의 매출은 급신장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품질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슈가 잊히자 매출이 빠르게 회복된 것이었다.
물론 불매운동이 품질이 나빠서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도덕성이었다. 아마도 이 기회에 기업들도 각성하고 착한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었으리라. 하지만 해도 너무하다. 너무 빠르다. 사람들은 벌써 다 잊었나보다. 분노는 쉽게 잊고 또 쌓이면 타오르는 그런 것이 결코 아니리라. 언제 그랬냐는 듯 너무 쉽게 잊고 흘려버리는 우리의 습성은 지금 이 시간에도 지속하고 있다.
불매운동보다 중요한 건 '근본적 해결책' 요구이런 결과가 나오니까 기업들이 소비자를 우습게 보는 거 아닌가. 이러니 기업이 아무리 큰 죄를 져도 1년만 딱 버티면 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양은 냄비는 빨리 끓고 빨리 식는다. 우리 스스로가 변혁의 의지가 없다면 우리는 그저 양은 냄비에 불과하다. 부도덕 기업에 대해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지난 24일 서울중앙지법은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된 남양유업에 대해 벌금 1억2000만 원을 선고했다. 법원은 남양유업이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밀어내기'에 대한 시정조치를 받았음에도 재차 범행한 점, 남양유업이 시장과 국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점을 들어 "비난 가능성(비난받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지적했다.
이 판결은 특히 지난 2009년까지 남양유업 대표이사 등 전직 임원들의 책임을 적시했다. 김 판사는 판결문에서 "수회에 걸쳐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시정명령을 받거나 법원으로부터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선고받았고, 대리점주들로부터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받아왔으며 밀어내기 영업방식에 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의 언론보도나 방송 등을 접했고, 법률자문 결과 공정거래법 위반에 해당된 소지가 많다는 취지의 답변을 얻어 위법하다는 사정을 잘 알고 있음에도 이를 명시적·묵시적으로 지시·묵인·조장·방치해왔다"고 지적했다.
남양유업은 이미 지난해가 아닌 2009년부터 자사 제품이 밀어내기 식으로 판매되고 있다는 관행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동안 철저히 묵인하고 외면하며, 비공식적으론 장려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저 분노만 치밀 뿐이다. 또한 연 매출이 1조3650억 원(2012년 기준)에 달하는 기업이 국가의 시정조치를 무시한 대가가 고작 벌금 1억2000만 원이라니, 허탈하기까지 하다.
소비자들의 불매운동이 더욱 힘을 받으려면, 정부가 대기업의 횡포를 방지할 수 있는 근본적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 지금은 소비의 윤리성에 대한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다. 진정한 '슈퍼 갑'은 다름 아닌 소비자라는 걸 대기업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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