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삼각관계를 특별하게 만드는 체호프의 마법

[서평] 안톤 체호프의 <공포 : 한 친구의 이야기>(1892)

등록 2014.02.12 11:26수정 2014.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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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단편선> 표지 ⓒ 민음사, 2002


여러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떨 때 공포를 느끼나요? 어린 시절 개에 물렸다거나, 물에 빠진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특정 대상이나 장소에 대한 공포를 가질 수도 있겠죠. 저 같은 경우는 인간관계에 대한 공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는 좋은 소리만 하던 사람이 제가 없는 장소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전해들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면서 느꼈던 충격은 그 다음에 맺는 인간관계에 신경을 쓰게 만든 것 같습니다.

체호프의 작품 중에 <공포 : 한 친구의 이야기>(이하 공포)라는 짧은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사할린 섬>(1892)을 발표한 직후 그는 요양차 멜리보호에 머물면서 많은 작품들을 썼는데 <공포>는 이 시기에 쓰여진 작품입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흔히 '체혼테'시기에 쓰여진 유머가 가득한 단편들과는 성격을 조금 달리합니다. 다양한 경험을 하고 난 이후에 쓰여진 작품들은 이전의 작품들보다 훨씬 진지하고 더 원숙해진 기교로 독자들에게 독특한 울림을 남깁니다.


인생의 불가해성에 대한 공포

작품에 등장하는 주된 인물은 4명입니다. 작품의 화자인 '나', 농장을 경영하는 성공적인 지주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실린', 그의 사랑스러운 아내 '마리야 세르게예브나', 그리고 귀족집안 출신이지만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는 '40인의 순교자'라고 불리우는 사내까지 말이죠.

그런데 이 작품에서 '드미트리 페트로비치'가 공포를 느끼는 대상은 대단히 추상적이면서도 그의 주위에 찰싹 달라붙어있습니다.

"우리 인생이나 저승 세계나 매한가지로 불가해하고 무섭습니다. 유령을 두려워하는 자라면 나도, 저 불빛들도, 그리고 저 하늘도 두려워해야 마땅하지. 왜냐하면 이 모두가 잘 생각해보면 저승의 망령들만큼이나 불가해하고 환상적이니까. (...) 당신이 친구라서 고백하지만, 나는 이따금 괴로울 때면 나 자신이 죽는 순간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곤 합니다. (...) 하지만 단언컨대 그것이 현실보다 더 무섭지는 않았어요. 유령이 무서운 건 사실이지만 그러나 현실도 무섭습니다. 친구, 나느 삶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두려워해요. (...) 정상적이고 건강한 인간은 자기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여길 테니까. 하지만 나는 이 '어느 정도'라는 느낌을 잃어버린 채, 하루하루 공포에 중독되고 있어요."

하루 하루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얼마나 두려웠던지 드미트리 페트로비치는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일에 몰두하느라 농사 일로 자신을 혹사시키고 밤에 깊이 잠드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사실 화자 '나'는 드미트리 페트로비치의 아내 마리야 세르게예브나에 대한 연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드미트리 페트로비치가 자신의 공포를 설명하면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줍니다.


"당신이 보기에 그토록 행복할 것 같은 나의 가정 생활이라는 게 사실은 나의 가장 큰 불행이자 공포입니다. 나의 결혼은 기묘했고 어리석었습니다. (...) 나는 그녀에게 다섯 번이나 청혼을 했지만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던 그녀는 매번 거절했습니다. (...) 결국 그녀는 승낙을 했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정숙한 아내가 되겠어요.' 라고......."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던 결혼생활 자체도 드미트리 페트로비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겁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 때문에 더 큰 공포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간 '나'는 드미트리 페트로비치가 일찍 잠에든 그의 집에서 마리야 세르게예브나에 자신의 감정을 밝히고 둘은 사랑을 나눕니다.

뻔한 삼각관계를 특별하게 만드는 체호프의 마법

단편적인 사건에만 집중하면 이 이야기는 아름다운 미모의 아내가 남편의 친구와 불륜을 벌이는 뻔하디 뻔한 삼각관계 로맨스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체호프가 여기저기 놓아둔 소설적 장치들로 인해서 이 이야기는 아직도 읽히는 명작으로 남았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요소는 대비되는 인물의 배치입니다. 아름다운 아내, 자신만의 농장 등을 가지고 있는 드미트리 페트로비치는 하루 하루의 삶이 주는 공포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몰락 귀족인 '40인의 순교자'는 비록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을지언정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죠. 드미트리 페트로비치가 공포를 느끼는 장면 전후에 꼭 '40인의 순교자'가 등장하면서 작품의 분위기를 전환하곤 합니다.

또한 사물의 적절한 사용도 빼놓을 수가 없죠. '나'는 마리야 세르게예브나와 사랑을 나누기 전 자신이 묶는 손님용 방에 드미트리 페트로비치의 모자가 놓여있는 것을 인식합니다. 사랑을 나눈 뒤 새벽에 마리야 세르게예브나가 '나'와 함께 있던 방을 나가면서 복도에서 이 모자를 가지러 손님방으로 오던 드미트리 페트로비치와 마주치고 말죠. 아내의 거짓된 사랑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공포를 느끼던 드미트리 페트로비치는 삶의 불가해성이 하나 줄어들어서 행복했을까요? 아니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 더 두려워졌을까요?

그러나 이 소설이 진짜 공포스러운 이유는... 드미트리 페트로비치의 공포가 '나'에게 전염되었다는 겁니다. 드미트리 페트로비치가 아내의 부정을 인식하고 원래 예정되어 있던 목재 경매를 하러 떠난 직후에 공포가 '나'를 덮칩니다.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드미트리 페트로비치의 공포는 나에게도 옮겨졌다. 오늘 벌어진 일을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갈까마귀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들이 날아다닌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두렵게 느껴졌다. "나는 왜 그런짓을 했을까?(...) 어째서 꼭 이런 식으로 긑나게 되었을까? 다른 방식은 없었나? 그녀는 무엇 때문에 나를 심각하게 사랑해야만 했고 그는 왜 모자를 가지러 내 방에 나타나야만 했을까? 그런데 모자가 여기서 무슨 상관이 있는가?"

짧은 소설을 다 읽고 제가 사는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바로 내일... 아니 바로 몇 분 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당장 지금 제가 무슨 일을 해야할 지도 어떤 생각을 해야만 하는지도 쉽게 떠오르지가 않았습니다. 드미트리 페트로비치의 공포는 활자를 통해 저에게 까지 건너왔나봅니다.
덧붙이는 글 [안톤 체호프] 체호프 단편선 / 박현섭 역 / 민음사 출판 / 출간일 2002-11-20.
선집에 수록된 10편의 단편소설 중 <공포 : 한 친구의 이야기>는 2번째로 실렸습니다.

이 글은 기자의 블로그(mimisbrunnr.tistory.com)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체호프 단편선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박현섭 옮김,
민음사, 2002


#체호프 #안톤 체호프 #단편소설 #러시아문학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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