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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탐욕에 경종 울리는 <노아>

[리뷰] 영화 <노아>

14.03.23 16:05최종업데이트14.03.24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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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에는 영화 내용 중 일부가 담겨 있습니다.

생각해본다. 아담은 신을 닮은 형상으로 빚어졌고, 아담의 갈빗대 하나로 그의 짝 이브가 태어났다. 이들은 사탄의 꾀임에 넘어가 창조주가 금지한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노동과 출산의 고통을 겪는다. 곧 카인과 아벨 형제가 태어나는데, 질투심에  그만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여버린다.

창세기에 따르면, 인간은 사탄의 꾀임에 넘어갔으니 '유혹'에 약한 존재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 때문에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고, '질투'에 사로잡힌 그들의 큰아들은 최초로 '살인'을 저지른다. 따지고 보면 유혹, 부끄러움과 질투, 살인은 인간이 갖는 고통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특징이 되기도 하는 키워드들이다.

인간은 유혹에 넘어간 것을 부끄러워하게 되지만, 질투를 알게 돼서 살인을 한다. 영화 <노아>(3월 20일 개봉,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를 보다가 느낀 바,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이러한 인간의 특징이기도 하고 고통의 원인이기도 한 가치들을 관객들에게 짚어주고자 하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 <노아>의 포스터 영화 <노아>의 주인공, 러셀크로우 ⓒ CJ엔터테인먼트


폭도들에 의해 아비의 죽음을 지켜본 노아는 철저히 은둔한다. 신의 뜻에 따라 살생을 피하고,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다. 의로운 삶을 살던 노아가 신의 선택을 받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인간들 중 그의 가족만 방주에 태울 수 있게 된 배경이다. 이제 방주에 타고 폭풍우에 며칠 시달리다 보면 새 세상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노아'와 카인의 후예

영화 <노아>는 성경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인간들, 특히 무신론자들의 불경한 시각을 같이 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 갈래로 나뉘는데 그 모두는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불화다.

방주가 완성되어 갈 무렵,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은 카인의 피를 이어 받은 것일까. 아버지에게 대든다. "형 셈에겐 일라가 있는데, 나에게는 왜 짝이 없어요. 나도 짝을 지어 주세요." 가족의 세계에서 만족할 수 없었던 함은 "인간의 운명은 인간인 우리가 결정한다"고 말하는 신을 배신한 인간, 두발가인과 손잡는다. 아버지 노아의 결정을 독재와 독선으로 판단하고 이에 반기를 든 것이다.

▲ 아내를 구하러 가는 함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은 방주가 완성되어 가는데도 불만이 한가득이다. 아내가 없기 때문이다. ⓒ CJ엔터테인먼트


두 번째는 노아의 방황이다. 노아는 신이 선택한 사람이다 보니 계시를 받게 되고 그의 가족들은 방주에 탈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된다. 그런데 가족의 입장에서는 어이없게도 노아가 그 '특권'에 대해 고민을 시작하는 것이다. 다른 인간들, 특히 노아 자신이 쳐 놓은 덫에 걸려 두발가인의 무리에 밟혀 죽은 둘째 아들(함)의 여자, 또 그녀처럼 아무 죄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마저 방주 밖 폭풍우 속에 죽게 하면서까지도 지켜내야 했던 그 특권에 대해서 말이다.

따지자면 노아는 결국 인간이라면 모두가 카인의 후예 아닌가 하는 회의에 사로잡히고 만 것으로도 보인다. '신의 선택'을 '특권'과 아무 의심 없이 연결한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일까?

결국, 신의 계시에 대해 고민하던 노아는 아내와 아들들 그리고 큰 아들의 여자인 일라에게까지 폭풍우가 잦아들면 차례대로 모두 죽게 될 것이라고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가족들 중 어느 누구도 노아의 말을 따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내 나메는 말한다. "어떤 일이든 당신 뜻에 따랐어요. 모든 결정에 따랐다고요. 하지만 (셈과 일라의) 아기들까지 죽이는 것은 따를 수 없어요. 도대체 이게 신의 뜻인가요?" 가족들에겐 노아가 곧 신이다. 혹 노아가 신의 뜻에 왜곡된 해석을 가하는 순간 노아의 가족들은 진정한 신의 뜻을 따르지 못하게 된다.

인간의 탐욕에 경종을 울리는 재난영화

영화 <노아>는 철학적 고민이 필요한 영화라고 한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영화를 영화로만 볼 수 없었는지, 이 영화에 대해 별점 테러를 가했다고도 한다. 성서에 나온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다 보니 당분간 세간의 논쟁의 중심에 있을만하다는 생각이다.

그 외에 상상력을 영상화해 낸 감독의 연출력도 대단하다. 폭풍우가 몰아 닥치는 스펙타클한 영상과 막 생성되는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묘사가 태고를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빛이 사탄이 되었다가 다시 빛으로 돌아가는, 다시 말해 선(善)이 악(惡)으로 그 악이 다시 선으로 회귀하는 판타지적 서사도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은 무겁다. 분명 즐거운 스토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감독이 의도하고 있기도 하다. 카인이 아벨을 돌로 쳐죽이는 잔인한 장면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방주에 오르지 못한 인간들이 물바다 위에 인간 섬을 이루어 어떻게든 살고자 악귀처럼 질러대는 괴성이 물속에서도 웅웅거리는 장면에서는 누구라도 절망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림반도가 러시아에 속하게 됐고, 중국의 소수민족들도 독립을 위해 들썩거리며, 쿠르드족들도 터키로부터 벗어나고자 내전은 계속된다. 시리아 내전도 진행 중이며, 강대국의 대리 전을 치루는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도 내전과 갈등을 반복하고 있다. 지진에 박살이 난 후쿠시마 원전에서는 몇 년째 방사능이 유출되어 일본 국민들이 당한 피폭의 정도를 가늠할 수 없다. 이들 약자들이 모두 노아처럼 의인은 아닐 수도 있으나 악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들에게 노아의 방주는 어떻게 해석될까?

이런 모든 이슈들의 본질엔 강대국들의 힘의 논리가 존재한다. 현실에서는 이들의 탐욕에 젖은 물리적 힘이 종교적 권능을 능가한다. 노아가 경멸했던 그래서 영원히 피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유혹과 질투와 탐욕은 오늘을 사는 현재에도 여전하다. 인간의 몸 속엔 카인의 피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노아>의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셈과 일라가 낳은 쌍둥이 자매를 통해 신화에 접근한다. '노아와 아내, 그리고 아들 셋과 며느리 셋'의 네 쌍을 복원하고자 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모자람과 더함이 없이 만족할 수 있는 삶에 최소한의 기반을 제공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감독이 천사와 사탄을 통해 선이 악이 되고 악이 다시 선이 되는 과정을 보여준 것처럼 왠지 유혹과 질투와 탐욕, 살인 등의 무한반복은 인간이 절멸하지 않고서는 결코 중단될 것 같지 않아 보여 슬프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에게 신이 내린 최소한의 인간적 가치, '부끄러움'마저도 인간들의 심장과 뇌 속에서 흐릿해졌기 때문이다. 왜 항상 선(善)은 악(惡)에 가려져 있는가?

노아 방주 러셀크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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