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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왕', 호색한이 된 루이 14세?

[박정환의 뮤지컬 파라다이스] 주옥같은 넘버에도 아쉬운 이유

14.04.14 10:58최종업데이트14.04.14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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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왕> 의 한 장면 ⓒ EMK


<엘리자벳><황태자 루돌프>라는 동유럽 뮤지컬을 한국 시장에 선보인 제작사가 이번에는 서유럽 프랑스의 뮤지컬로 방향키를 돌렸다. 프랑스 뮤지컬의 최대 강점은 뭐니 뭐니해도 감미로운 넘버다,

지금 한국에서 선보이는 웨스트엔드 발 뮤지컬이 다채로운 시청각적 효과로 브로드웨이에 입성했지만 일 년도 채 못 되어 막을 내려야 했던 이유는 단 하나. 귀를 매혹하는 변변한 음악이 하나 없기 때문이다. <태양왕>의 음악은 반대의 경우다. 음악에 일가견이 없는 사람이 들어도 귀를 현혹할 만한 음악이 적어도 세 네 곡 이상은 될 정도로 감미로운 넘버를 선사한다.

<태양왕>은 정치권력의 패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군약강신', 신하의 세력은 강하지만 루이 14세의 세력은 약한 프랑스가 되느냐 혹은 '군강약신', 루이 14세가 절대왕정을 누리지만 반대로 신하의 견제는 약해지는 프랑스가 되느냐는 것. 강력한 프랑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국가 권력 2인자 마자랭의 세력을 축소시켜야 하니, 루이 14세와 마자랭의 충돌은 불을 보듯 뻔한 이야기다.

<태양왕>은 프랑스의 패권이 루이 14세에게 이양되는 당위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자랭을 악마화한다. 마자랭은 루이 14세를 견제하기 위해 그가 사랑하는 자신의 조카딸마저도 잔혹하게 제거하는 무자비함을 보여준다.

▲ <태양왕> 의 한 장면 ⓒ EMK


이야기가 강조하는 건 누가 프랑스의 권력을 쟁취하느냐 하는 권력 투쟁보다 루이 14세의 '진정한 사랑 찾기'다. 루이 14세의 정부인은 따로 있다. 1막 후반부에서 루이 14세의 어머니 안느가 강조하는 것처럼, 그는 사랑하는 여자와 맺어지지 못하고 스페인 공주와 결혼했다.

이 지점으로부터 <태양왕>은 <황태자 루돌프>와 공유점을 갖는다. 극 중 루돌프의 정부인이 존재하지만 투명인간 취급 받는 것처럼, 루이 14세의 정부인인 스페인 공주는 대사로만 언급될 뿐 투명인간으로 남는다. 이는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한 남자 주인공의 비애를 두드러지게 만들고자 하는 뮤지컬의 전략이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피앙세를 찾기 위한 주인공의 반쪽 찾기 여정이야말로 여심의 로맨티시즘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테니 말이다.

앞에서 열거한 것처럼 <태양왕>은 뮤지컬의 흥행을 좌우할 여심을 흔들 만한 요소, 감미로운 음악과 진정한 사랑 찾기라는 요소를 두루 갖췄다. 그럼에도 <태양왕>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뚜껑을 열었지만, <엘리자벳>이나 <황태자 루돌프>와 같은 열광은커녕 싸늘한 반응이 대다수다. 왜일까. 그 이유를 짚어보도록 하자.

같은 작품이라도 연출가의 역량에 따라 달라

'회전문 관객'이라는 뮤지컬 용어가 있다. 같은 공연을 몇 번이고 다시 보는 관객을 일컫는 용어로 뮤지컬 애호가가 아닌 다음에야 일반인이 보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팬덤 현상을 지칭한다. 이들이 공연을 몇 번이라도 보는 건 돈이 넘쳐서가 아니라 정말 뮤지컬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굳이 회전문 관객이 아니라 하더라도 뮤지컬 팬은 연출가가 누구냐에 따라서 같은 라이선스 작품이라 하더라도 다른 풍미와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심지어는 같은 연출가라 하더라도 2~3년 뒤에 같은 작품이 무대에 올랐을 때 연출의 방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른 재미를 만끽할 수 있게 된다. 그만큼 뮤지컬은 배우도 중요하지만 연출가의 역량에 따라 라이선스를 능가할 수도 있고, 원작 라이선스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도 있다.

▲ <태양왕> 의 한 장면 ⓒ EMK


2014 뮤지컬 신작 라인업 중 기대작 톱5 작품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던 <태양왕>의 오픈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아무리 프리뷰라 하더라도 화제작은 개막 전부터 VIP석이 매진되기 마련이지만, S석과 R석은 기본이요, VIP석도 남아돌고 있다. 예전 <황태자 루돌프>나 <엘리자벳> 개막 초연 당시에는 벌어지지 않은 기현상이었다.

<황태자 루돌프>와 <엘리자벳>이 한국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황실 신드롬' 때문만은 아니었다. 황후 엘리자벳과 그의 아들 루돌프가 대를 이어 불행한 왕실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동정표가 여심을 자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는 로얄 패밀리지만, 이들 두 모자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애정 없는 결혼 생활로 지독한 속앓이를 하고 있다는 정신적인 공허함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이들 비엔나 뮤지컬의 주인공이 로맨티시즘을 자극하지 못했다면 루돌프는 아내를 놓아두고 다른 여자랑 놀아나다가 권총으로 생을 마감한 불륜남의 비극적인 최후에 대한 교본이 되고 말았을 테다. 하지만 <태양왕>의 연출가는 스페인 공주라는 정부인을 놓아두고 다른 여자와 수시로 눈이 맞는 루이 14세의 사랑을 '열거'하기에 바쁠 뿐이지, 루이 14세의 사랑이 어떻게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은 등한시한다.

이 때문에 이야기는 당위성을 갖지 못하고, 단조로운 구성을 취하게 된다. 이야기가 관객을 설득하지 못하니 제아무리 주옥같은 넘버라 하더라도 관객의 귀는 황홀하게 만들지언정 심금을 파고들지 못하고 만다.

그동안 한국 뮤지컬은 노래와 이야기 구조는 가져오되 한국적인 재창작이라는 가공을 거친 논 레플리카 뮤지컬로 쏠쏠한 재미를 보았다. 몇몇 논 레플리카 뮤지컬의 성공에 힘입어 <태양왕> 역시 한국 연출가의 각색을 덧입혔지만 결과는 부진한 성적의 창작뮤지컬 <디셈버>를 답습하는 듯하다. 안일한 연출로 김승대, 윤공주, 임혜영, 오진영, 조휘와 같은 조연 배우들의 열창은 힘을 잃고, 루이 14세는 진정한 사랑을 찾는답시고 여러 여자를 거치는 호색한으로 돌변한다.

차라리 이럴 바에는 디즈니의 <아이다>처럼 <태양왕>을 레플리카 뮤지컬로 끌고 갔어야 하지 않을까. <태양왕>은 제아무리 노래가 훌륭해도 연출가의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참극을 빚을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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