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1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사고 관련 책임이 있는 모든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민형사상 책임을 반드시 묻겠다고 밝혔다. 사진은 관련 사실을 보도한 KBS 뉴스 화면
KBS
2013년 3월, 전남 진도 앞에서 대형 화물선이 어선을 들이받고 도주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고로 고깃배는 두 동강이 난 채 침몰했고, 타고 있던 선원 7명 전원이 실종되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직접 나서서 관련자들에 대한 '문책'과 '재발방지 대책'을 요구했다.
같은 해 여름, 배수지 수몰 사고와 해병캠프 참사가 일어났을 때도 박 대통령은 "관리 감독 소홀로 국민 안전에 문제가 생겼을 시에는 엄중문책" 하겠다고 경고하며, "안전사고의 재발 방지"를 촉구했다. 지난 2월 경주 리조트 참사가 일어났을 때도 대통령은 "근원적 재발 방지를 위한 개선책"을 주문했다.
이번에도 재방송처럼 똑같은 경고와 주문이 되풀이됐을 뿐이다. 특별히 강력했다는 대통령의 이번 '진노'는 얼마나 효과가 있었을까? <경향신문>의 23일자 사설이 답해준다. 대통령의 질책에 혼비백산한 해양수산부가 해경 등 관계기관과 합동으로 현재 운항중인 연안여객선에 대한 긴급 안전점검에 들어갔으나, 그마저 형식적 절차에 지나지 않는 "부실투성이"였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자리 보전을 위해 눈치만 보는 공무원들은 반드시 퇴출시킬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대통령의 '진노'가 뉴스거리가 되는 것은 권력자 눈치를 보는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진노'는 머잖아 잊히고, '침통'은 언제 그랬냐는 듯 쾌활한 기분으로 바뀔 뿐이다. '진노'와 '질책'이 물처럼 아래로 흐르기만 할 뿐,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경주 리조트 참사 후 대통령이 "철저 조사"와 "재발 방지"를 주문했을 때, 정홍원 국무총리는 어떤 조치를 취했을까? 그는 이틀 뒤 "사고원인을 명확하게 밝혀 책임자를 엄정 조치하라"는 또 다른 지시를 내렸을 뿐이다. 얼마 후 경찰청장은 "책임자에게 엄한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라"는 지시를 전했다. 같은 지시는 표현만 바꾸어 '더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갔을 것이다. 그리고 두 달 뒤 국민 수백 명이 수몰되거나 실종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책임 없이 권리만 갖는 지도자영국 신문 <가디언>은 지난 21일자 기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대처방식을 문제 삼았다. 절차나 제도상의 허점을 지적하고 개선하기보다 개인(선장과 선원들)을 비난하는 모습이 기이해 보인다는 것이다. 글은 한국 대통령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가 '문화적 차이'에서 온 게 아닌가 반문한다. 적어도 "서구사회였다면, 국가적 재앙에 그처럼 늑장대응을 한 지도자가 무사하기 어려웠으리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지지도는 말할 것도 없고, 대통령 자리마저 위태로운 상황이 됐을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나는 이 글이 몹시 불쾌했다. 한국의 '절대존엄'을 모욕해서가 아니라, 지도자의 무능과 무책임에 눈을 감는 것이 '아시아적 가치'라도 되는 양 써놓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한국의 대통령은 무제한의 권리와 권력을 누리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 희한한 자리가 된 것일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본래 한국인이 대통령에 대한 아무런 기대가 없어, 그저 이따금씩 '용안'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보는 것만도 황송하게 여길 가능성이다. 다른 하나는 대통령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합리적으로 판단할 정보가 없을 가능성이다. 첫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나는 두 번째가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어떤 국민도 대통령이 하는 일을 직접 볼 수 없다. 언제나 방송 카메라로, 신문의 글을 통해 만나게 된다. 언론의 역할은 전통적으로 '감시견'에 비유되어 왔다. 언론이 권력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여주지 않는 한, 권력의 무능과 부패는 국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가 내보낸 TV 홍보영상 중 한 장면
화면캡처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이던 2년 전 일이다. '위기에 강한 글로벌 리더십'이라는 제목의 광고가 텔레비전에 등장했다. 공교롭게도 광고에는 풍랑 속 배가 등장한다. 천둥번개가 치고, 배가 맹렬한 바람과 파도 속에서 위태롭게 나아갈 때 이런 글귀가 화면에 새겨진다.
경험 없는 선장은 파도를 피해가지만경험 많은 선장은 파도 속으로 들어간다그것만이 파도를 이기는 방법임을 알기에...지금 대한민국엔 위기에 강한 대통령이필요합니다앞으로의 5년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좌우합니다준비된 여성대통령 기호 1 박근혜 나는 알지 못한다. '파도를 피하는 것'과 '파도 속으로 들어가는 것' 중 어떤 것이 현명한 위기 대처법인지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대통령이 한국사회를 덮친 풍랑에 당당히 맞서기는커녕, 비판적인 여론의 입김조차 회피하려 한다는 사실 말이다.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지도자가 책임 회피로 시간을 보내고, 국민이 이에 침묵할 때 한국사회는 한 치 앞을 모르는 재난 속에서 침몰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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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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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세월호 참사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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