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어린이날

검토 완료

구자숙(edupower97)등록 2014.05.15 18:24
올해처럼 슬픈 어린이날이 있을까요. 이런 상황에서도 학교 열심히 나오고 그래도 선생님이라고 내 말 따라주는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워 어린이날을 앞두고 아이들에게 줄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남자 아이들에게는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즐기면서 발전하는 00이 되길 응원해'라고 적은 자를 준비했고, 여자 아이들에게는 '만날수록 아름다워 또 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자라기를 응원해'라고 적은 손거울을 준비했습니다. 하나하나 만들면서 마음속으로 아이들이 예쁘게 멋지게 잘 커나기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세월호 침몰 사고로 아이들이 가장 재미있어하는 체육대회는 취소됐습니다. 예년 같으면 들썩 들썩할 어린이날 전날이 차분했어요. 6학년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실망감을 달래주기 위해 학년 작은 운동회를 준비했습니다. 학년 운동회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교실에 들어왔는데, 5·6교시가 남았지만 수업을 하자면 한숨 쉬며 싫어할 아이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습니다.
 
"뭘 할까" 고민하면서 이런 저런 자료를 뒤적이다가 재미있는 자료를 찾았습니다. 바로 1923년 5월 1일에 발표했던 어린이 선언문입니다.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 선생님은 조선 민중 가운데 가장 불쌍한 민중이 어린 민중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억압받는 식민지 민중을 부모로 두고 있는데, 그 부모로부터 또 억압을 받으니 이중 억압을 받는 민중이어서 당시 어린이 운동가들은 이런 어린 민중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외쳤다고 하네요. 현재는 5월 5일로 바뀌었지만 처음에는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했는데, 이는 세계 노동자의 날에 어린이 해방이라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였다고 하네요. 어린이 선언문 내용 중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을 뽑아봤습니다.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치어다보아 주시오 ▲어린이를 가까이 하시어 자주 이야기 하여 주시오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보드랍게 하여 주시오 ▲이발이나 목욕, 의복 같은 것을 때 맞춰 하도록 하여 주시오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시오 ▲산보와 원족 같은 것을 가끔가끔 시켜 주시오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자세 타일러 주시오 ▲어린이들이 서로 모여 즐겁게 놀만한 놀이터와 기계 같은 것을 지어 주시오 ▲대우주의 뇌신경의 말초는 늙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젊은이에게도 있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이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 주시오.
 
아이들과 함께 한 줄 씩 읽어 본 뒤 물어봤습니다. 이 선언문을 발표한지 90년이 훌쩍 지났는데 2014년 현재 너희들이 생각하기에 제일 지켜지고 있지 않는 내용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아이들은 의미 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했습니다.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말고 치어다보아 주시오'에 손을 든 아이가 말했습니다. "어른들은 단지 아이들이 자기보다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것 같아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학원과 숙제로 지친 아이들이 많아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도록 하여 주시오'에서 많은 아이들이 손을 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지 않아 의아하다는 의견을 말했더니 아이들끼리 쑥덕거렸습니다.
 
"솔직히 텔레비전 보는 시간이랑 스마트폰 사용할 시간 줄이면 잠자고 운동하는 시간은 충분히 나오지 않나? 진짜로 잘 시간 없고 운동할 시간 없다는 건 좀 과장 같은데"
 
"그래도 학원 숙제 많거나 시험기간에는 운동할 시간이 없지 않나"
 
'어린이들이 놀만한 놀이터를 지어 주시오'에 대해서 아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른들은 아파트랑 주차장 짓느라 바쁜 것 같아요"
 
그리고 정말 뜻밖에 많은 아이들이 손을 들었던 문항은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자세 타일러 주시오'였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는 "어른들은 무슨 일이 있으면 화부터 내요. 내 얘기는 들어보지도 않아요. 좀 친절했으면 좋겠어요"였습니다.
 
부끄러움이 밀려왔습니다. 아이들은 1923년에 방정환 선생님이 목 놓아 외쳤던 일들 가운데 지금 잘 지켜지고 있는 일은 '이발이나 목욕, 의복 같은 것을 때 맞춰 하도록 하여 주시오'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어쩌면 그동안 돈 버는 일에만 신경 쓰고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린이 선언문에 대한 이야기 후에는 아이들과 보건복지부가 1988년 발표한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을 함께 읽어봤습니다. 그 내용이 구구절절 다 옳은 말이지만 가장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8조. 어린이는 해로운 사회 환경과 위험으로부터 먼저 보호되어야 한다'였습니다.
 
한 아이가 세월호 침몰 사고를 보며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선장이 나쁘다고 생각해요. 학생들을 구해줬어야죠. 어른들이 아이들을 지켜줘야 하는 거잖아요" 당연히 아이들을 지켜주고 보호해줄 것이라 생각했던 어른이 자기 살겠다고 가장 먼저 뛰어나왔다는 사실이 이 아이에게는 너무나 놀랍고 무서웠던 모양입니다.
 
덩치가 다 큰 어른만한 남자 아이가 그 말을 할 때 눈빛은 절박해보였습니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른들 보호가 없다면 자기들은 언제든 생존의 위협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어른들이 아무리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해도 뛰쳐나오거나 소리 지르지 못하고 매달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어른들이 사고 원인이 무엇인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등 수없이 떠들어 대는 동안 아이들은 본능으로 생존의 위협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너무 미안하고 또 미안한 일입니다.
 
수많은 원인분석과 진단과 대안이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마음은 슬픔과 분노로 소용돌이치고 머릿속은 대책 없이 복잡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교사로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일까" 자꾸 물어봅니다.
 
하지만, 물어보면 물어볼수록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어린이 헌장에서 말한 그것들입니다. 어른들을 위해 아이들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어른들이 있는 것입니다. 학교 안에서 어른들이 편하자고, 어른들이 돋보이자고, 아이들을 힘들고 불편하게 하는 일들이 사라져야합니다.
 
흔히들 권위주의 또는 관료주의라고 말하는 것들과 교사들은 맞서야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고 아이들 생각을 존중해야합니다. 그래서 여리고 작은 싹들이 힘차게 뻗어나갈 수 있도록 지켜봐줘야 합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내가 잘 자라는데 도움이 되는 멋진 사람들이라는 믿음을 아이들이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침몰한 배는 크레인으로 건져 올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침몰한 아이들의 신뢰는 건져 올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른들을 믿지 못하는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까요? 생각만 해도 괴롭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살고 싶다고 느끼는 절박한 마음만큼 절박한 마음으로 어른들은 아이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합니다.
 
이민을 갈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 계속 살아야하는데, 그러니까 어떻게 하던 무언가는 반드시 해야 합니다. 모든 어른들이 다들 이런 마음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행동하겠습니다'란 말이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 엄중하게 들려오는 이유입니다. 1923년 방정환 선생님이 외친 말을 다시 되새겨봅니다. '아이들을 내려다보지 마시고 치어다보아 주시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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