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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김성호의 영화만세 23]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14.06.27 11:00최종업데이트14.06.2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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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국내 메인 포스터 ⓒ (주)영화사 빅


인구 900만의 스웨덴에서 11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는 등 전세계적으로 무려 600만부가 팔린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같은 제목의 영화로 제작되어 한국 극장가에 상륙했다. 스웨덴 출신의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원작소설을 전격적으로 영화화한 이 작품은 북유럽 영화로선 이례적으로 국내 박스오피스 순위에서 상위권에 오르는 등 기대이상의 흥행몰이 중이다.

스웨덴의 배우출신 감독 플렉스 할그렌에 의해 연출된 이 영화는 왕년에 20세기의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의 중심에서 활약했던 알란 칼슨이라는 100세 노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코미디다. 소설의 기본적인 얼개를 그대로 따르는 영화는 주인공 알란이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와 소련의 스탈린, 미국의 트루먼과 레이건 대통령, 아인슈타인까지 역사 속 유명한 인물들과 만나며 겪은 일들을 유쾌하게 그려낸다.

주인공 알란을 연기한 로버트 구스타프슨은 스웨덴에서 가장 웃긴 남자로 통하는 코미디언 출신의 배우로 100세 노인인 현재시점의 알란부터 20대의 알란까지를 무리없이 소화해냈다. 짐 캐리, 로빈 윌리암스, 제프 다니엘스 등 코미디 연기를 장기로 하는 유명한 배우들이 많은데 로버트 구스타프슨의 경우에도 앞으로의 가능성이 더욱 기대가 된다.

▲ 창문넘어 도망치는 100세 노인 요양원 창문을 넘어 도망치는 알란 칼슨(로버트 구스타프슨) ⓒ (주)영화사 빅


한 편의 소동극과 어우러지는 세기적인 사건들

영화는 사랑하는 고양이의 복수를 위해 여우를 살해한 죄로 요양원에 들어간 100세 할아버지 알란이 요양원 창문을 넘어 도망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연치 않은 계기로 폭주족으로부터 거액의 돈이 든 가방을 훔치게 된 알란이 그 돈을 되찾으려는 폭주족들로부터 쫓기며 벌이는 한 편의 소동극인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영화가 알란이 폭주족들을 피해 도망치는 현재시점에서 승부를 걸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영화는 중간중간 알란의 독백과 함께 회상형식으로 그의 과거를 그려내는데 바로 여기에 이 영화의 승부수가 있다.

어린 시절 폭약을 가지고 놀던 중에 우연히 사람을 죽이고 정신병원에 수감된 일부터 그곳에서 인종주의적 의사에게 단종수술을 받은 일, 무기공장에서 만난 친구를 따라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고 그 곳에서 프랑코와 친분을 맺은 일,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핵폭탄 개발의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소련의 스탈린과도 만났으며 러시아의 정치범수용소에서 노역을 하다 나중에는 CIA와 KGB의 이중간첩으로 냉전의 장벽을 무너뜨리기까지 영화는 그야말로 전세계를 종횡무진하며 20세기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중심에 있었던 알란의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유쾌하게 그려낸다.

아무 생각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자고?

이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알란이 어떤 이념이나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물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는 어머니의 유언대로 별다른 생각없이 순간을 살아간 알란의 모습을 통해 '인생은 흘러가는 대로 살면 그 뿐, 지금 이 순간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주저하지 말 것'을 관객들에게 시종일관 당부한다.

알란은 100세에 이르는 자신의 전 인생을 정말이지 아무런 생각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온 인물이고 그럼에도 그의 인생은 늘 잘 풀려왔던 것이다. 감독은 알란이 평생에 걸쳐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희화화하며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기까지 한다.

콘돔 사용의 필요성을 주장한 아버지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동료의 비극적인 최후,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들과 양국 정보부 요원의 어리석은 모습까지 영화는 거리낌없이 희화화한다. 영화는 심지어 소련의 포로 수용소에서 탈출을 위해 노력했던 알란의 모습마저 희화화시킨다. 그는 영화 전체를 통털어 오직 이 곳에서만 어떤 일을 계획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 일을 포기하자마자 목적을 이루게 되는 알란의 모습을 통해 '벌어질 일은 어찌해도 벌어지니 애쓸 필요가 전혀 없다'는 주제를 노골적으로 형상화하기에 이른다.

100세 노인이 된 알란이 만난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십 수년 동안 공부를 했으면서도 자신의 적성을 알지 못하는 나이든 대학생과 구닐라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구닐라의 전 애인의 모습은 실소를 자아낼 정도다. 영화는 어려운 생각없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갔던 알란의 태도를 이들의 모습과 대비시키며 생각없이 순간에 충실한 삶이 얼마나 더 나은 삶의 방식인지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가장 의미심장한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 전체를 통해 그야말로 한 세기를 거침없이 살아온 알란의 모습은 매우 유쾌하고 멋스럽게 그려지지만 사실 그는 얼마든지 불행하고 실패한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었다. 특별한 태생도 이렇다 할 재주도 없는데다 삶에 아무런 목적성도 없었던 알란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끈 것은 전적으로 우연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연히도 그의 인생이 다른 방식으로 풀렸더라면 삶에 대한 방향성과 가치관이 전혀 없었던 그는 얼마든지 다른 인물이 될 수 있었는데 과연 그런 삶의 태도를 옳은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영화에서는 크게 주목되지 않은 부분이지만 그는 이미 많은 문제를 낳기도 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어쩌면 무고했을 여우를 죽인 100세 노인 알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식료품점 주인을 우연히 폭사시키고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질 원자폭탄의 제조에 공헌하며 미국과 소련 정보부 요원들의 무의미한 희생을 불러오고 폭주족들의 죽음에 관여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영화는 이 모두를 그저 유쾌하고 우스꽝스럽게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 어느 공화파 병사의 죽음 1936년 10월, 스페인 코르도바 ⓒ 로버트 카파


겉과 속이 다른 블랙코미디 

이 지점에서 영화의 표현방식은 상당히 흥미롭고 미묘하게 읽힌다. 감독은 알란과 함께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친구가 죽는 장면을 노골적으로 로버트 카파의 저 유명한 사진 '어느 공화파 병사의 죽음'과 같이 연출한다.

뿐만 아니라 인종주의적 의사에 의해 단종수술이 행해지는 장면을 삽입하고 프랑코의 입을 통해 파시즘의 절멸을 기원했던 친구의 정신을 기리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하며 프랑코를 비난하는 스탈린의 모습을 통해 스페인의 파시스트와 소련의 독재자를 영리하게 대치시키기도 한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흐르는 대로 살아가자라고 이야기하는 코미디 영화에서 이와 같은 장면들은 어째서 필요했던 것일까? 생각없이 보자는 코미디 영화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대치와 상징은 어째서 삽입된 것일까?

이쯤되면 영화는 단순히 고민하지 말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라 하는 코미디 영화가 아니라 가치관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지난 시대의 온갖 부조리한 것들을 풍자하는 일종의 블랙코미디처럼 보인다. 알란의 삶을 유쾌하게 그리면서도 이런 방식의 삶은 영화 속에서나, 온갖 우연의 중첩 속에서나 가능한 것일 뿐이라는 진지한 선언처럼 읽힌다. 영화 속 알란은 생각하지 않고 잘 살았으나 누구도 그와 같은 태도로 그와 같이 살지는 못할 것이기에 우리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정답은 없다. 그리고 영화 역시 명확한 답을 내려주지 않았다. 이 영화를 그저 웃고 즐기는 한 편의 코미디로 이해하거나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좋다는 교훈을 설파하는 영화로 보아도 잘못보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세상은 이렇게 만만하지 않고 인생엔 이토록 행운이 따르기 어렵다는 것이다.

폴 발레리는 말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나는 이 말이야 말로 이 영화의 감춰진 주제라고 생각한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플렉스 할그렌 로버트 구스타프슨 로버트 카파 스페인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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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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