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옥천군으로 귀촌한 고은광순씨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여성운동가이자 한의사다.
유순상
여성 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1996년 대한여한의사회보를 만들면서부터다. 고은씨는 당시 글에서 한의사들의 아들 낳는 처방을 비판했고 남아선호와 여아낙태 등을 막아야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맥락에서 여성단체연합과 남녀 출생성비 불균형 문제 해결을 위한 토론을 하다가 '호주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호주제는 남성중심 가족문화의 상징적인 제도로, 자녀는 아버지의 성만 따를 수 있고 부부가 이혼할 경우 부인의 호적에 자녀의 이름을 올릴 수 없게 막았다. 또 남편이 사망할 경우 아들이 호주 지위를 승계해 아내가 유산상속에서 불리해지기도 했다.
고은씨는 '호주제 폐지 시민모임'의 대표를 맡아 300명 가까운 국회의원을 찾아다니며 설득 작전을 폈다. 가방에는 호주제 폐지 주장을 담은 유인물이 가득해, '배낭투쟁'이라고 불렀다. 남성 우월주의자들은 고은씨를 향해 '꼴페(꼴통 페미니스트)'라고 비난했지만 우군도 나타났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고은씨 편에서 호주제에 대한 위헌소송을 제기했다. 이석태 변호사와 진선미 변호사(현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 이정희 변호사(현 통합진보당 대표) 등이 소송단을 이끌었다.
사회각계 인사들도 재혼가정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는 이 제도에 대해 비판 목소리를 높였다. 마침내 2005년 대법원이 호주제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같은 해 민법이 개정됐다. 이어 2008년 이를 반영한 새로운 가족관계등록부 제도가 도입됐다. 고은씨 개인적으로는 1999년부터 스스로 고은광순으로 바꿔 쓰던 이름을 2003년에 정식 절차를 밟아 개명했다.
"당시 사람들이 '호주제가 폐지될 가능성이 몇 퍼센트나 되겠냐'고 물었어요.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옳은 일이라면 관철될 때까지 끝까지 한다는 각오였거든요. 중국 당나라 때는 여성들의 발을 묶어 성장하지 못하도록 하는 전족이 천 년간 세습됐지만, 이제는 그것을 전통이니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호주제도 마찬가지였어요."'부당한 제도'와의 투쟁은 호주제로 끝이 아니었다. 고은씨는 2007년 종교법인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종교법인법 운동, 2008년에는 배우 최진실 사망으로 불거졌던 친권 자동부활 반대 운동을 펼쳤다. 2009년부터는 사회 오피니언리더 모임인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여는 여성모임'을 함께 하면서 '내 제사 거부 운동'을 하고 있다. 고부간 갈등 등 가족 간 불화를 일으키고 심지어 살인 같은 범죄로까지 이어지는 제사를 '자신의 대'부터 끊자는 것이다.
"소설가 이문열은 책 <선택>에서 제사상에 올릴 떡시루에 김이 안 올라 와 목을 맨 며느리에게 '섬뜩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고 썼어요. 이 문구에 찬성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제사라는 것도 3300년 전 중국이 왕권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제도예요. 이제는 죽음이 아닌 삶에 초점을 맞춰야죠. 살아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요."고은씨는 1977년 후배들에게 4·19혁명 기념으로 검은 리본을 만들라고 지시했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일이 있다. 이 긴급조치 9호가 지난해 3월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이 나면서 고은씨의 검은리본 사건에 대해서도 무죄선고가 났다. 무려 36년 만이다. 40년 가까이 매번 주제를 바꾸며 싸우는 데 지치지는 않을까.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요. 내가 하는 일이 옳으니까요. 또 그렇게 해야 내가 편하잖아요. 독재가 사라져야 내가 편하고 호주제가 없어져야 내가 편하죠. 근데 그 일이 결국 (사회구성원들과) 더불어 좋으니까 그게 진짜 좋은 거죠."'잔 다르크'의 눈물 닦아 준 명상

▲ 고은광순씨와 어머니가 함께 찍은 흑백사진을 연필로 그렸다. 고은씨는 노모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함께 했던 시간을 책 <시골한의사 고은광순의 힐링>으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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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고은씨가 쓴 담시집 <어느 안티미스코리아의 반란>을 보면 초창기 하이텔과 천리안 등 피시(PC)통신 1세대 논객으로 유명했던 고은씨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로 댓글을 도배한 '안티 페미니스트' 얘기가 나온다. 악성 프로그램을 이용해 인터넷 카페에 비난 글을 도배하는 사람들 때문에 고은씨는 인터넷 사이트들을 옮겨 다니며 정치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 그녀를 사람들은 '잔 다르크'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녀에게도 힘든 순간들은 있었다. 갑작스레 울컥 눈물이 났다. 마음의 평화가 필요했다. 불교신자였던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서 기도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템플 스테이에 참가했다. 묵언 수행도 했다. 두세 시간 꼼짝 않고 앉아 죽비를 맞아가며 수련하다 보니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심(歡喜心, 배품과 용서, 너그러움이 조화된 아름다운 마음의 상태)이 생겼다. 하지만 한 절에서 승려가 "계를 어기면 여자로 태어나거나 가난한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마음이 돌아섰다.
"확 깼어요. 빈부는 사회개혁으로 없애야 하고 장애는 사회제도를 개선해 그들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거잖아요. 다른 사찰에서는 정월 초하루에 여자들의 출입을 막기도 했어요. 여자는 '음의 수'라서 마를 끼고 들어올 수 있다나. 부처님 도력으로 그걸 못 깨나요."차별에 실망한 고은씨는 마음 둘 곳을 찾다 2008년 지인의 소개로 충남 공주시 계룡면 갑사의 명상동호회를 알게 됐다.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그곳에서 마음의 평화와 긍정의 에너지를 얻었다. 2010년에는 치매를 앓던 86세 노모를 갑사에서 임종 때까지 6개월간 부양하며 마음공부를 했고, 이 내용 등으로 2년 전 책 <시골한의사 고은광순의 힐링>을 펴냈다. 요즘은 전국 각지를 다니며 마음 치유 강의도 한다.
사회운동가가 지역으로 귀촌했을 때, 사람들은 현실 도피가 아닌지 묻는다고 한다. 고은씨는 "저항이 급선무였던 1970, 1980년대와 오늘은 다르다"며 "다변화된 시대에는 화염병 대신 장미꽃을 드는 시위, 폭력이 아닌 노래가 있는 시위가 더 끈질기고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제는 시민들의 내면의 에너지를 높여야 사회가 한 단계 더 진보한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는 학생 운동, 1990년대는 여성 운동을 했어요. 그동안의 투쟁도 어떻게 보면 모두 '힐링(치유)'이에요. 사회의 부조리를 바꾸는 '사회적 힐링'이죠. 그런데 이제는 개인의 내공이 높아지지 않으면 안 돼요.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해서 모든 게 바뀌지 않죠. 결국 사람 각자의 내공과 지혜가 높아지면 올바른 시스템이 정착되죠."

▲ 고은광순씨가 운영하는 한의원의 약봉지에는 특이하게 '의식의 지도'가 적혀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가 만든 구분법인데 고은 씨는 명상을 통해 인간은 더 높은 의식 세계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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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운동과 통하는 동학, 자립공동체 꾸리며 연구할 계획요즘 고은씨가 집중하는 주제는 동학이다. 고은씨가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 일면식도 없던 도종환 시인이 자신의 책 <정순철 평전>을 보내왔다고 한다. 1901년 옥천에서 태어난 정순철은 '엄마 앞에서 짝짜꿍',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등을 지은 동요작곡가로 소파 방정환과 함께 어린이 문화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그런데 정순철 평전 내용의 대부분이 동학농민운동이었다. 알고 보니 정순철은 동학 2대 교주였던 최시형의 외손자였고, 옥천군 청산면은 우리 민족 최초, 최대의 민중운동이라 평가받는 동학농민운동의 총 본산지였던 것이다.
"충청도를 '멍청도'라고 하잖아요. 아니에요. 뛰어난 사람들이 다 충청도 사람이었어요. 손병희, 손천민, 황하일, 성두한등 뛰어난 동학 접주들이 많았어요. 충청도는 특히 교통도 좋고 속리산을 통해 강원도로 연결돼 도망가기도 좋았죠. 혁명을 일으키기 유리한 조건이죠."

▲ 고은광순씨는 충북 지역에서 활발히 움직였던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 책상 위 스케줄표에는 그간 모은 자료들이 연대기별로 정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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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고은씨가 청춘을 바쳐온 여성운동의 가치와도 통했다. 양반과 평민, 남자와 여자 모두 다 같은 '하늘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 여종을 수양딸과 며느리로 삼았던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의 급진적 행동이 모두가 고은씨가 꿈꾸던 세상과 가까웠다. 고은씨는 요즘 충청도 땅에서 펼쳐졌던 동학운동을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호주제 폐지 운동을 하면서 부딪친 게 '가문' '혈통' '미풍양속'과 같은 것들이에요. 그런데 가문이라는 것이 대부분 일제시기 만들어진 가짜 족보들을 바탕으로 해요. 대한민국에는 그렇게 찌질한 남자들 밖에 없나 푸념하다가 동학을 만난 거예요. '하늘과 땅이 모두 부모다', 조상이 아닌 나를 위해 위패를 설치하라는 '향아설위(向我設位)' 처럼 동학에는 위대한 생각들이 있죠."고은씨는 갑사 명상공동체 식구 40명과 함께 솔빛 한의원 근처에 '명상하는 마을'을 꾸리는 작업도 추진하고 있다. 두 아들은 군대도 다녀오고 장성했기 때문에 혼자 옥천에서 일하는 게 부담은 없다고 한다.
명상공동체 식구들은 이곳에서 제각각 집을 짓고 적당한 노동을 통해 자급자족하는 소박한 마을을 일굴 계획이다. 여성과 동학, 명상이 어우러진 마을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증을 남기고 고은씨는 마을 노인들을 왕진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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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트레블러17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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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비영리단체 민족학교, 전 미주 중앙일보 기자, 전 CJB청주방송 기자
<오프로드 야생온천>, <삶의 어느 순간, 걷기로 결심했다>, <내뜻대로산다> 저자, 르포 <벼랑에 선 사람들> 공저
uq261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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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 없앤 '꼴통 페미'가 동학에 꽂힌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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