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부수앙가 공항 밖 풍경.
강은경
더는, 살던 그대로 살 수 없었다. 남은 인생을 다시 설계해야 했다. 살날이 얼마나 남았겠나, 한치 앞도 모르지만. 우선 '골방'에서 뛰쳐나왔다. 죽기 전에 '소설가'가 되겠다며, 수십 년 동안 처박혀 있던 골방. 때론 머리를 쥐어뜯으며 창작하던 곳, 그러나 태반 룸펜처럼 무위도식하던 곳. 덜 된 채로 태어난 습작들이 덜 된 채로 민망하게 쌓여 가던 곳.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던. 그런데 '노안'이 한 방에 끝장냈다. 그리곤 막막했다. 어떻게 살지?
"누나 경험들이 누나가 쓴 소설보다 훨씬 재밌어요. 누나는 왜 소설을 쓰는 거죠?" 대학 과(科) 후배인 제훈이 정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인도 배낭 여행담을 너스레 떨며 늘어놓던 술자리였다. 그때 그는 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섬>과 장편소설 <일곱 개의 고양이 눈>으로 한국 문단에서 '천재 작가' 소리를 듣고 있었고, 두 번째 장편소설 <나비 잠>을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무명 습작생으로 '골방'에서 쪼글쪼글 늙어가고 있을 때였다. 되지도 않는 픽션을 쥐어짜며 화락화락 미쳐가고 있을 때였다.
"왜 소설을 쓰느냐고?" 나는 제훈의 질문에 곧장 대답할 수 없었다.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지금은 그렇다. 소설을 놔버리면, 내가 살 수 없을 것 같다. 그 걸 붙들고 살아왔는데... 어떤 사람은 종교를 붙들고 살고, 어떤 사람은 돈을, 사랑을, 거울을... 붙들고 살잖아.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살아가는 명분이 필요하니까. 이제와서 내가 소설을 버리면, 뭘 붙들고 살지? 지나간 시간은, 앞으로의 시간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래, 재능은 쥐뿔도 없으면서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어. 다른 건 다 건성이었고. 20년 넘게. 믿을 수 있겠어? 그러느라 놓치고 버린 소중한 것들이 너무 많아." 차마 떨구지 못하는 내 늙은 눈물을 제훈은 봤을 것이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누나, 누나 얘기를 써요. 소설보다 재밌잖아요." '골방'에서 뛰쳐나오니, 나를 살게끔 하였던 것이 정말 사라졌다. 곧 죽을 것처럼 내 인생이 파리해졌다. 그때 문득 제훈의 그 말이 떠올랐다.
'누나 얘기를 써요. 소설보다 재밌잖아요.' 그래, 세상을 떠돌며 내 얘기를 쓰자. 다리가 아직 멀쩡하니 가능한 일이다. 그냥 떠돌자. 비울 것도 없다. 구할 것도 없다. 어떤 화두를 붙잡을 것도, 세상 어떤 심오한 이치를 터득하고자 할 것도 없다. 그저 세상을 바라보자. 아직 성한 오감을 열어놓고 가볍게. 몸에 충실하자. 더 부서지기 전, 그나마 온전할 때 마음껏 몸부림치는 거다. 어디로 가든 어디에서 멈추든, 그때그때 내키는대로 변덕 부리며. 오롯이 존재함으로써만 존재하는 것. 그리고 그 유랑 얘기를 글로 쓰는 거다.
내가 본 것을, 들은 것을, 느낀 것을... 철학과 상상과 은유의 세계가 아닌, 있는 그대로, 내 몸이 막무가내 부닥친 생짜 그대로. (사실 내 얘기를 쓰라는 제훈의 말은, 경험해보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하는 세계들을 힘들게 다루지 말고, 별난 내 경험들을 녹여 소설로 써보라는 뜻이었다. 소설을 그만두라는 말이 아니었다.)
우선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자락 산촌마을로 이사했다. 나의 길고 먼 여행의 베이스캠프가 될 시골집. 바람벽 한쪽에 세계지도부터 걸었다. 본격적으로 멀리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생활은 단순해졌고, 생활비는 도시보다 절반의 절반으로 줄었다. 그리고 3년이 칼바람처럼 지나갔다. 정작 베이스캠프에서 밖으로 한 발짝도 떼지 못한 채. 그동안 노안은 여지없이 더 진행됐다. 렌즈를 바꿔야 했다.
나는 피터 빅셀의 <지구는 둥글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굴고 있었다. 그 사람처럼 쓸쓸한 사람도 아닌데, 지구가 둥글다는 걸 확인해보고 싶은 것도 아닌데. 준비물 목록만 만들고 있었다.
'휴대용 구급낭, 우산, 등산화, 편상화, 장화, 옷, 그런 것들을 실을 수레 한 대, 배 한 척, 이 배를 싣고 갈 수레 한 대...''수레, 배, 기중기...' 내게 필요한 건 여행지에서 치러야 할 수레 값, 배 값, 기중기 값... 그만큼의 '돈'이 없으니 떠날 수 없었다. '평생 실패만 하는 사람들이 영웅으로 대접받는다'는 나라에 가고 싶었지만, 너무 멀었다. 비용이 엄청나게 들 여행이었다.
다행히 <지구는 둥글다>의 주인공은, 죽기 전에 돌아오려면 여행을 서둘러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어느 날 그는 사닥다리 하나만 어깨에 둘러메고 떠났다.
나 역시 '사닥다리' 하나만 들고 떠나기로 했다. 그러니 나는 멀리 갈 수도, 오랫동안 떠돌 수도 없을 것이었다. 더 지체하느니 그게 낫겠다 싶었다. 배낭을 꾸렸다. 두 달 동안 필요한 옷가지와 썬크림, 수건, 책, 노트, 수영복... DSLR 대형 카메라와 어쩌자고 2.5kg 노트북까지 챙겼다. 카메라는 필수품이니 그렇다 치고, 노트북은 여행 내내 골칫덩어리가 될 거였다. 마지막으로 얇은 전대를 단단히 허리에 찼다.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첫 여행지를 향해 떠났다. 필리핀의 팔라완으로.

▲세계지도 여행을 꿈꾸며 방 벽에 붙인 세계지도
강은경
팔라완은 'The Last Ecological Frontier in the Philippines(필리핀의 마지막 개척지)'라 일컬어지는 곳이다. 그만큼 덜 오염됐다는 말이다. 필리핀의 서쪽 끝 지역이다. 넓이 50km, 길이는 450km의 길고 좁은 섬 지역. 본섬의 지형이 접힌 우산 모양이다. ('Palawan'의 뜻과 어원을 설명하는 몇 가지 가설이 있다. 스페인어의 'Paragua'에서 왔다는 게 가장 일반적인 가설이다. 그 뜻이 '접힌 우산'이다.) 서남태평양에 178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기다란 섬. 나는 그 중 팔라완 최북단 칼라미안 제도의 부수앙가 섬에 막 도착했다.
부수앙가 공항에 비치된 숙소 팸플릿 몇 장을 훑어보다가 내려놓았다. 돋보기를 벗어 도로 가방에 집어넣었다. 무거운 배낭을 낑낑대며 등에 멨다. 어깨에 카메라 가방을 두르고 한 손엔 노트북 가방을 들었다. 그때 비행기에서 내 옆에 앉았던 청년이 밖으로 나가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의 여자 친구도 미소를 보냈다.
그들이 떠나고 나도 천천히 대합실을 빠져나갔다. 몇 발짝 걸으니 밖이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투명했다. 열대의 섬. 심장이 쿵쿵쿵쿵 다시 크레센도,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지도 필리핀 팔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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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 머문 골방 탈출... "이제 어디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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