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꽃밭 예전에는 메밀꽃밭이 그리 넓지 않았다고 하는데 관광지화가 된 뒤로는 여기저기 넓게 펼쳐진 메밀꽃을 볼 수 있게 됐다.
류효정
하지만 이 불행이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경성에서 그는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취직해 경제적 안정을 찾았고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을 재인식함으로써 문학의 전환점을 맞았다. 또한 백계 러시아 피난민들이 머물렀던 주을온천에서의 경험을 통해 본격적으로 서양 문명에 젖은 생활을 시작했고 이를 작품에 형상화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시절의 경험이 그에게 '고향'을 되돌려주었다는 점이다. "나는 자주 관북의 경성과 부근 이야기를 지금까지 썼으나 살고 있는 당시의 일종의 고향의 느낌을 그곳에서 발견하였기 때문일 뿐이다"라고 수필 <영서의 기억>에서 고백하고 있거니와 경성 생활 이후 그는 자신의 고향인 강원도를 작품 속에 담기 시작한다.
이후 경성 생활을 접고 그는 1936년 평양으로 이주하여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한다. 평양 창전리 '푸른집'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 중 가장 윤택한 때를 보내며 활발한 창작활동을 한다. 그리고 이때 <메밀꽃 필 무렵>을 비롯하여 자신의 고향인 강원도를 배경으로 한 몇몇 작품을 발표한다.
즉, 그는 작품 활동을 시작한 지 10여 년이 지난 서른 즈음이 되어서야 고향과 아버지를 마주하고 이를 작품으로 형상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메밀꽃 필 무렵>에 투영된 이효석의 삶<메밀꽃 필 무렵>은 하나하나의 요소들이 완벽한 짜임새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묘사의 정점을 보여주는 표현력으로 인해 한층 빛나는 작품이다.

▲<메밀꽃 필 무렵> 애니메이션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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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메밀꽃 필 무렵>)사실 그가 이렇게 생동감 넘치는 묘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보통학교 시절 본가로부터 약 4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하숙했기 때문이다. 하숙집에서 본가까지의 그 먼 길을 어린 나이에 몇 번이고 왕복을 했던 그가 그 풍경 하나하나를 <메밀꽃 필 무렵>에다가 새겨놓은 것이다.
이 작품은 그 자체로도 훌륭하지만 그 안에서 이효석의 삶을 반추할 수 있어서 흥미롭다. 장돌뱅이인 허생원의 떠돌이 생활은 고향을 떠나 서울, 경성, 평양을 전전했던 이효석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고향이 청주라고 자랑 삼아 말하였으나 고향에 돌보러 간 일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의 아름다운 강산이 그대로 그에게는 그리운 고향이었다"라는 허생원에 대한 설명은 이효석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도 들린다.

▲가산공원 내의 충주집 자료에 의하면 허생원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 이효석의 동네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이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충주집 주인인 송씨가 장돌뱅이인 허씨와 통정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설은 성공여와 그의 딸 옥분이가 있었는데 집안이 기울자 일가가 충북 제천으로 이주했고 옥분이가 허씨와 물방앗간에서 인연을 맺었다는 소문이 충주집에서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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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방앗간 가산공원에서 이효석 문학관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건물 옆으로 물레방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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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충주집을 사이에 두고 연적으로 만난 허생원과 동이가 사실은 부자지간임을 밝혀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허생원의 진한 부성애는 그간의 이효석 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내용이었다. 이는 이효석이 고향에 있는 아버지를 부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 깊숙이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이 소설을 쓸 당시 두 아이의 아버지였던 그가 새롭게 자신의 아버지를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그는 시류에 따른 흉내 내기를 멈추고 외면했던 과거와 마주하여 진정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음으로써 문학에 있어서도 일정한 경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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