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순잔치에서 축하를 받는 혜경궁 홍씨를 형상화한 밀랍인형. 잔치가 열린 곳은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 내에 있는 봉수당이다.
김종성
이처럼 혜경궁과 정조 모자는 평생 동안 무언의 싸움을 벌였다. 아들은 아닌 척하면서 어머니를 아버지의 굴레에 가두려 했고, 어머니는 모른 척 하면서 그 굴레를 거부했다. 이 싸움에서 결국 승리한 쪽은 아들이었다.
혜경궁은 아들의 강력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그늘로부터 벗어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아들 정조가 죽고 16년 뒤인 1816년 1월 13일 혜경궁은 눈을 감았다. 그러자 손자인 순조는 혜경궁의 시신을 사도세자의 무덤에 함께 묻어버렸다. 혜경궁이 가장 꺼림칙해하는 곳에 혜경궁을 합장해버린 것이다.
결국 사도세자 무덤에 합장된 혜경궁의 시신참고로, 대부분의 백과사전이나 논문에는 혜경궁이 1815년 12월 15일에 죽었다고 적혀 있지만, 실제 사망 일자는 음력으로 순조 15년 12월 15일이다. 이 날짜가 음력이라는 점을 간과하다 보니, 1815년 12월 15일이 사망 일자라고 잘못 기록하게 된 것이다. 순조 15년 12월 15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816년 1월 13일이 된다.
순조가 혜경궁을 사도세자 무덤에 합장한 것은 정조가 남긴 메시지 때문이다. 죽기 11년 전인 1789년에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을 화성으로 옮기면서, 아버지 왼쪽에 사람 하나를 더 묻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놓았다. 어머니가 묻힐 자리를 마련해둔 것이다.
혜경궁의 무덤은 사도세자 무덤과 전혀 다른 지역에 조성될 수도 있었고, 사도세자 무덤의 바로 옆에 별도로 조성될 수도 있었다. 부부라고 해서 꼭 함께 묻히라는 법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조의 의도와 관계없이 혜경궁의 무덤이 별도로 조성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순조 15년 12월 18일자(양력 1816년 1월 16일자) <순조실록>에 따르면, 당시의 정부 각료들은 사도세자의 무덤에 담긴 정조의 메시지를 존중하기로 합의했다. 사도세자 옆 자리에 빈 공간을 마련해둔 정조의 뜻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이로 인해 혜경궁의 시신은 사도세자의 무덤에 합장됐다. 이렇게 해서 혜경궁은 생전에 자신이 가장 꺼림칙해 하던 남자와 죽어서도 함께 지내게 되었다. 어머니를 아버지의 둘레에 가두고 어머니의 반성과 사과를 받아내려 했던 정조의 의도가 이런 결말을 만들어낸 것이다.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의 융건릉에 모셔진 사람들의 이 같은 사연을 고려해보면, 사도세자 옆에 누워 있는 혜경궁의 심경이 어떨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왜 나까지 이곳에 누워 있어야 하나?'라며 불만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그곳이 무척 갑갑하고 불편할 것이다. 당장에라도 뛰어나오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곳의 지명은 안녕(安寧)동이지만 혜경궁은 조금도 안녕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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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제15회 임종국상.저서: 제도 밖의 권력, 영부인 리스크.아무도 몰랐던 독립운동 이야기,친일파의 굴욕,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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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향한 정조의 복수... 결말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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