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은 하나의 세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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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수(sydney)등록 2014.11.03 10:13
월남전은 군대뿐만 아니라 파월 기술자라는 또 하나의 바퀴와 같이 굴러가는 수레와 같은 것이었다. 한편 월남에서 제대를 해서 현지 회사에 취직을 해서 눌러 앉은 사병들도 있었다. 물론 기술자들이나 현지 취업을 한 사병들이나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지만 보직에 따라서는 단순히 월급만 받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대부분 미군과 관련된 일을 하기 때문에 융통성이 많았다. 왜냐하면 총알을 쏘는 것이 아니라 달러를 갖다 붓는 것이 미국이 월남전을 수행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군수물자를 빼돌려서 재미를 보던 사람이 처음에는 현지 실정을 잘 몰라서 엉뚱한 물건을 잔뜩 빼돌렸다가 낭패를 본 적도 있었다. 즉 전쟁통이기 때문에 생활용품이 필요한 것인데 당장 필요가 없는 고가품을 빼 돌렸다가 처분을 못해서 낭패를 보는 것이다. 보급품에는 책걸상을 비롯 침대, 이불, 담요, 식기 등 식품과 소모품들을 제외한 온갖 잡다한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 중이었기에 언제 어디로 피난을 떠나야 할지 알 수 없는 월남인들에게 주로 필요로 하는 품목은 1인용 모기장, 모기약, 홑이불로 쓸 수 있는 침대 시트 등 어떻게 보면 시시한 것들이었다.

다음은 한 파월기술자가 경험한 일이다.

보급창에서 짐을 싣는 동안 기다리는데 옆에 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어서 그 곳을 관리하는 미군에게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왜 좀 실어 줄까? 미싱인데."했다. 박스 하나를 뜯어보았더니 '싱거'표 미싱을 여러 대씩 들어있었지만 월남에서는 인기가 없으리란 걸 짐작했다. 피난 다닐 때 그 무거운 재봉기를 들고 다닐 리 없었다. 그렇지만 한국에 가져가면 돈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개만 실어 줄래?" 내가 부탁하자마자 미군은 그걸 처분하지 못해 안달이라도 났었던 사람처럼 여러 상자를 차에다 올려 주었다. 보급창을 빠져나온 나는 곧바로 부두로 향했다. 부두에 한국 LST가 정박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걸 실어드릴 테니까 가져가서 알아서 처분하시고 돈이 되면 그중 얼마를 나눠주쇼."
나는 함장을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찔러 보았다. 처음에는 딴 사람한테 부탁하라고 고개를 가로젓다가 한 번만 해 보라고 강권하자 마지못해 응낙을 했다. 나는 트럭에 실려 있는 박스를 배에다 부려 놓았다.

석 달 정도 지나자 그 함정이 다시 돌아왔다. 한국까지 다녀오려면 그 정도 걸린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어 나는 그 때를 기다렸다가 부두로 찾아갔다. 배에 오르자 상자들이 눈에 띄었다. 석 달 전에 실었던 미싱이 틀림없었다.
"아니, 왜 도로 가져왔습니까?"
"부산에 가보니까 상륙할 방법이 있어야지요. 아무 서류가 없으니까 세관원도 어쩔 수 없더라구요. 돈도 돈이지만 미싱 한 대가 아쉬운 게 우리 나라 실정 아닙니까. 공업용이니까 마산 공단에 갖다 주면 그걸로 엄청난 외화를 벌수도 있는데.... 그래서 사정을 해 보았는데 끝까지 안 된다는 거예요."
선장은 돈벌이보다는 애국심 때문에 더 미싱이 아까운 모양이었다.
"그냥 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당신이 날 의심할 테니 할 수 없이 다시 싣고 왔지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다시 싣고 갈 수도 없고."
매우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나는 선장을 괜히 부대물건 도둑질에 끌어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장에게 미안했다. 미싱을 한국에서 못 내린 것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선장과 나는 머리를 맞대고 미싱 처리 방법을 찾았다. 보급창으로 되돌려 줄 수도 없었다. 우리는 궁리 끝에 바다 속에 처넣기로 했다. 그 날 저녁 선장과 나는 땀을 흘려 가며 미싱 수십 대를 캄란만 바닷물 속에다 밀어 넣었다.

한 번은 자동차 타이어가 많이 쌓여 있어서 싣고 나온 적이 있었는데 월남에서는 '천하에 쓸모 없는 물건'이어서 남몰래 숲 속에다 버리느라고 애만 먹기도 했다. 그리고나서 언젠가 인근 지역을 지나다 보니 돼지우리 앞에 타이어를 서로 묶어서 담을 쌓아 놓고 그 속에 돼지를 기르고 있었다.

1971년 이후 한 때 월남에 한국군이 미군보다 더 많이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의 국제정치적 상황은 잘 모르지만 내 짧은 생각으로는 한국군이 미군 보다 철수가 늦었던 것은 아마도 돈이 필요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어려운 국가의 처지에서는 월남에 하루라도 더 있는 것이 돈을 버는 셈인 것이었다. 실제로 73년 3월에 철수 하는데 72년 9월까지 새로운 병력이 충원되었다.

1973년 1월 27일 자정(현지시간 1월 28일 08시)을 기해 휴전이 공표되었다.
전쟁터에서는 후퇴 할 때가 가장 위험한 시기라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이 상식을 무시했다가 피해를 보는 일이 월남전에서도 역시 벌어졌었다. 1맹호사단에서는 19 번 도로 안케패스 전투의 치욕을 들 수 있고 백마 사단은 1번 도로 붕로만 사고를 빼놓을 수 없다. 붕로만 고개에 대한 경계책임은 제29연대 제1대대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휴전을 하루 앞둔 1973년 1 월 27일 밤 23시경 붕로만 고개의 목교가 베트콩에 의해 폭파되고 베트콩기가 초소에 걸렸다. 베트콩은 '현상 동결의 휴전협정'에 따라 그들의 지배지역을 증명하기 위하여 베트콩기를 휴전 전날 밤 전국적으로 게양하라는 월맹의 비밀지령에 의해 휴전 발효와 함께 베트콩기를 게양한 것이다.
사단장과 연대장의 질책을 받은 제1대대장 유재민 중령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날이 밝아지자 자신이 직접 현장 상황을 확인하기 위하여 3중대에서 1개 분대를 차출하여 함께 장갑차를 타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현장 도착시간은 휴전 발효 불과 1시간 5분을 남겨놓은 06시 55분의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대대장 일행은 베트콩을 우습게 알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장갑차에서 내려서 "웃기는 놈들..."하고 코웃음을 치며 교량에 다가갔다. 맨 앞에서 심재철 중사가 문제의 베트콩기를 뽑아가지고 장갑차로 돌아가려고 할 때 부근에 잠복하고 있던 베트콩이 일제히 사격을 가하며 B-30적탄통을 발사했다. 순식간에 대대장 유재문 중령과 심재철 중사 등 6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6명이 부상했다.

배원식 연대장은 보고를 받고 사태의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그 일대에 포병사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베트콩은 암석지대의 천연동굴에 몸을 숨겨 아군의 포병화력에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제 연대가 당면한 문제는 적의 제압이 아니라 숨진 시체의 회수에 있었다. 특공조까지 투입하며 시체 회수 작전에 돌입했으나 적의 저항은 누그러들지 않았다. 이세호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소탕작전을 명령했지만 막상 저녁 무렵 작전이 개시되고자 하는 시점에 중지하라는 다시 명령이 내려졌다. 사연은 이세호 사령관이 흥분해서 작전을 승인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휴전이 발효된 것을 깜박 잊고 있었다가 휴전이 발효된 것을 깨닫고 취소시킨 것이다. 한 마디로 최고 사령관부터 일선 지휘관까지 갈팡지팡이었다.

연대장은 닌호와 군청에 파견했던 연락장교 이형관 대위에게 확성기가 달린 장갑차를 빌려오도록 하여 백기를 달고 현장에 보냈다. 그리고 확성기를 통해 적측에 방송을 했다.

"우리는 휴전협정을 지켜 공격하지 않겠다. 그러나 우리는 숨진 장병의 시체를 찾아야 되고 그래야만 철수를 할수 있다. 시체를 돌려 달라."고 애걸복걸하였다. 아마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저자세로 베트콩에게 사정사정한 예는 이 경우가 유일할 것이다. 이렇게 확성기를 통해 2일간에 걸쳐 그들을 설득시켜 겨우 시체를 회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굴욕적인 과정을 겪어가며 백마사단 제29연대는 1번 도로를 사용하지 못하고 미군 수송기를 이용하여 도망치듯 빠져 나올 수 있었다.제29연대는 2월 3일부터 6일 사이에 C-130송기로 3.900명의 병력을 39회, 화물 3,080톤을 77회로 나트랑 공항으로의 철수를 완료하였다.

나중에 영현을 수습할 때 대대장의 손목에 있어야할 로렉스 손목 시계가 대대장을 경호해야할 중사의 손목에 차여 있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아마 전사한 중사는 자기가 전사할 줄 모르고 대대장 보다는 명품을 사수(?)해야 할 사명감을 더욱 강하게 느꼈던 같다.

당연히 한국은 미군이 제공했던 장비를 최대한 보유한 상태에서 철군을 원했지만 미국의 계획은 남베트남에게 이양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군에게 제공했던 장비의 소유권과 철수비용, 국내에서의 운용방안 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군은 71년 12월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1973년 2월 6일 십자성 부대 산하 수송부대는 물건 하나도 베트콩에게 넘어 가지 못하도록 땅에 묻을 것을 묻고 태울 것은 태우라는 지시와 함께 모든 차량의 부속품을 신품으로 갈아서 완전히 새 차를 만들어서 고국으로 보냈다. 정 병장은 철수 차량 대열의 마지막 후미 5 톤 견인 트럭을 탔다. 나트랑으로 향하는 다리가 이미 베트콩이 파괴를 해서 월남군이 엉성하게 설치한 부교 위를 차량 한 대씩 조심해서 건너갔다. 마지막으로 견인트럭이 통과하려고 하자 월남군 공병 장교가 다가오더니 견인차가 지나가면 다리가 무너질 우려가 있으니 자기들이 제공하는 지프차를 타고 견인차는 놓고 가라고 했다. 이미 선두의 모든 차량들은 다리를 건너가 버렸고 무전기도 없어서 누구에게 보고를 하거나 지시를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월맹군 장교의 말대로 견인차를 두고 가거나 끌고 가거나 독자적으로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때 운전병이 정 병장에게 "야! 공포 쏴!"라고 해서 M16으로 월남군 장교의 발밑에 발사를 하자 월남군 장교가 놀라서 뒤로 물러선 틈에 전진을 해서 월남군 장교의 말대로 금방이라도 걸고 부서질 듯 흔들거리는 다리를 숨도 못 쉬고 건너서 무사히 견인차를 한국으로 가져 올 수 있었다. 견인차를 탐내는 월남군의 속셈을 알고 있으면서 자기들의 안전만을 위해서 지프차로 갈아 탈 수는 없는 일이고 차 한 대라도 고국으로 가져가려는 마음에 생명을 걸고 감행한 것이었다. 단지 정 병장 일행뿐이 아니라 당시 파월 장병 모두는 가난한 나라 살림 때문에 이렇게 해야만 했었다.
월남에서 철수 할 때 우리는 가난한 나라 군대답게 가지고 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간다는 원칙으로 짐을 꾸렸다. 심지어는 베갯속은 버리고 베갯잇까지, 깔판으로 쓴다고 탄약상자를 분해해서 챙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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