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물질문명 비판

속도에 관하여

검토 완료

김철민(cyberchannel)등록 2014.11.21 17:21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발명은 인류에게 풍요로운 미래를 선사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산업자본주의로 이어지면서 공장제 기계공업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소수의 자본가에게만 승리의 월계관을 씌여주었다.

곧이어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으로부터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 그리고 현대의 공장자동화(FA)에 이은 CNC이르기까지 속도가 자본주의의 기초에 있어 자본가에게 매우 중요한 자본축적의 목표-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효율성을 기반으로 한 과학기술이 속도에 의한 성과로 이어지면서, 인류에게 행복이 도래할 것처럼 환상을 심어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 산업사회의 대표적인 모델인 도시화는 모든 속도의 집합체이다. 도시속의 현대시민은 자연스럽게 속도를 위한 준비기(:교육과정)에 참여(;자발적 사회계약으로 생각됨)하게 되며, 속도의 대표적 속성인 '경쟁'을 내재화하게 된다.

이러한 순환적인 과정은 경쟁을 통한 고지의 선점이 '성공'을 담보해주며, 궁극적으로 인간이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현대인의 꿈으로서의 이데아가 된다. 이러한 '꿈은 이루어진다'는 행복의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꿈의 실현이 조직, 집단, 사회공동체, 민족, 국가 , 인류의 꿈의 실현과 합치(合致)되게 된다.

개인에서 인류까지의 행복에 관한 암묵적 전개는 '속도 즉 발전(速度 卽 發展)' 이라는 '즉(卽)'의 확장성이 고스란히 발전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킨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발전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속도가, 속도는 경쟁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경쟁의 정당성은 다윈이즘에서 파생된 적자생존론(환경에 적합한 종이 살아남는다.)이 자본주의원리로 전이 된다. 인류는 제한된 자원을 지속적으로 확보, 유지하기 위해 '사적소유'의 개념을 인식, 적용하게 되었으며, '소유의 집적(集積)'은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속도의 테크닉(기능성)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성서(THE BIBLE)에 의하면 신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였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다고 한다. 그러면 지금 인간이 진보의 끝이라고 하는, 자본주의의 상징체인 도시는 우리의 의지. 곧, '정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재 우리는 태초의 '자유의지'로 지금의 세상을 이루었다.

그러나 소수 현자들을 제외하곤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자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전히 우리는 성경의 '목자 잃은 어린양 (누가복음15장1~7절)'의 비유처럼 끝도 없이 헤매고 있는 '어린양'의 모습이다.

즉, 자기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쳇바퀴의 속도에 매몰된 다람쥐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속도화 과정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다. '쉼'이 없으므로 자기의식이 없다. 자의식이 없으므로, 곧 '주체'가 없는 것이다. 껍데기만 존재할 뿐이다.

개인의 성공, 과학 발전, 자본주의적 행복을 위한 속도는 '빠름'의 미학을 가정하고 있다. 현재 이러한 가정(假定)이 개인과 인류의 행복을 그나마 설명할 수 있는 역사의 합의적 산물이라는 주장이 넘쳐난다. 이 주장은 빠름의 미학으로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싶어하는 편의적 설명방식이다.

이 부분이 관점의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다. 즉, 속도를 없애자는 말이 아니다. 상대성으로서의 '느림'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과 인류의 행복을 성찰해보자는 말이다.

암묵적 동의에 의해 미확인 된 목표를 향해서 무조건 빠르게 달려가야 한다면, 결국은 과녁만 존재하고 활시위의 주체는 '인간소외(人間 疎外;Marx, Karl)' 되게 된다.

비로소 반동성으로의 '느림'의 미학으로 데카르트가 말한 '코기토'(;자기존재의식)의 본래성을 회복해야만 한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