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훌륭한 죽령,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

[김경진의 죽령답사기 ①]

등록 2015.01.01 09:32수정 2015.02.03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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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림리 전경 중앙고속도로 단양IC에서 내려다본 장림리 전경 ⓒ 김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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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경진 죽령누각 앞에서 찍은 사진 ⓒ 김경진


우리 민족에게 '죽령'(충북 단양)은 어떤 의미의 고개였을까? 이 질문에 속 시원히 대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천 년의 역사를 품은 죽령고갯길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지임에도 이에 대한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고찰한 문헌은 없었다.

나는 직접 그 답을 찾아 나섰다. 죽령 아랫마을에서 한 평생을 살아가는 글쟁이로서 조그마한 사명감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위해 틈틈이 모아온 자료와 현지답사를 통해 그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죽령고갯길'이 우리나라 5000년 역사와 함께해온 가장 활발한 '민족 문명의 통로'였고, 민족의 이념과 사상이 흘러온 '민족 정신문화의 통로'였다는 사실이다. 또 이 고갯길은 '민족전쟁의 길'이었으며 '복지(福地)로 들어가는 길'이었고 '실크로드'였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렇게 훌륭한 문화를 간직한 죽령고갯길이 왜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는지가 궁금했다. 이 중에서 내가 특별히 관심을 갖은 것은 죽령으로 흐른 민족 정신문화의 이념과 사상들이다. 나는 집필 내내 그 이념과 사상 속으로 빠져 들어갔고 또 그 주인공들을 만났다. 그리고 '이 분들이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오늘날 이 불안한 국가, 불안한 사회를 어떻게 경영했을까'를 생각했다.

(참고로 이 죽령답사기는 2014년10월 30일 하루 동안의 답사기다. 나는 한동안 서울에 머물다가 고향 풍기로 내려올 때 죽령을 걸어서 넘은 적이 있다. 그 때의 들뜬 마음으로, 또 정감록 십승지를 찾아 죽령고갯길을 넘던 선인들의 마음으로 오늘 다시 한 번 죽령을 걸어서 넘는다. 나의 '죽령답사기'는 충북 단양군 대강면 장림리에서 시작해 죽령 고갯길을 넘어 경북 영주시 풍기읍 창락리에서 여정을 마무리한다)

1. 장림역 마을을 가다

2014년 10월 30일 이른 아침, 아내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중앙고속도로 단양IC를 돌아나가자 협곡 마을이 펼쳐진다. 마을은 동서로 길게 늘어져 있었고, 그 가운데로 죽령천과 중앙선철도와 5번국도가 지나고 있었다.


이곳은 큰 산이 병풍처럼 이어져 있고, 죽령계곡과 사인암계곡이 만나는 지점이다. 또 이곳은 5번국도와 36번국도, 927번 도로가 만나는 지점이기도 했다. 큰 계곡의 하천과 도로가 서로 만나는 이 마을이 바로 그 옛날 조선시대의 역촌이었던 장림역 마을(장림리·당동리·두음리)이다.

옛날 길손들은 죽령고개를 넘기 위해, 이곳 '장림역 마을'에서 여장을 풀었다. 오늘날의 '장림리'는 바로 이 '장림역'에서 나온 이름이다. '장림역'은 중앙선 철도가 뚫리기(1939년 4월 10일) 전까지 이곳에 있었다.

지금 시각이 오전 8시, 중앙고속도로 단양 IC에는 관광버스가 수십 대나 늘어져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톨게이트 여직원은 "휴일에는 하루 평균 500여 대의 관광버스가 이곳 IC로 들어오며, 대부분의 관광객은 이곳의 소백산·황정산·도락산·월악산과 단양8경을 찾는다"고 한다.

작지만 단양 IC가 있는 이곳 장림리 일대가 관광거점 마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과거 보부상, 관원 등 수많은 길손들과 우마차들이 드나들던 역마을이 이제는 수많은 관광객이 드나드는 고속도로 나들목 마을로 변한 것이다.

그렇다. 장림리와 당동리와 두음리는 과거 역마을로 마방·여관·주막이 즐비했던 곳이었다. 또 이곳은 과거 수많은 접전이 있었던 곳이다. 고구려와 신라의 접전뿐 아니라 근래 한국전쟁 때는 남북한의 그 치열한 '단양·죽령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이곳은 5번 국도와, 중앙선 철도를 따라 영남지방으로 남하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길목이었기에 어느 곳보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때문에 장림리, 당동리, 두음리는 한국전쟁 때는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마을이다.

나의 도보 답사를 위해 아내는 동네 입구에서 차를 돌려 나갔다. 이곳 대강면사무소에서 사전에 약속한 황혁관(1939년생) 옹을 만났다. 장림역의 흔적을 찾아보고, 장림리의 어제와 오늘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서다. 그는 이 마을 토박이다. 또 오랫동안 마을 이장 일도 맡아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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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림역 자리 황옹이 말하는 장림역 자리. 지금은 대강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 김경진


우리는 우선 장림역의 위치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황옹은 대강초등학교 자리를 지목하면서 "여기가 바로 장림역이 있던 자리라고 내 어릴 적 동네 어른들께 들었어요. 옛날에는 꽤나 많은 나그네들이 들락거렸다는데..."라고 말했다.

70여 년 전 중앙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수명을 다한 장림역은 흔적 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대강초등학교가 들어섰다. 문명은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장림역의 흔적마저 없애버린 것이다.

나는 황옹께 가장 기억에 남는 동네 사건을 물었다. 황옹은 서슴없이 6·25사변(한국전쟁)이라고 답했다.

"6·25때 이곳은 모든 것이 파괴됐어요. 민간주택 3채만 남고 수백채의 주택과 공공건물이 파괴된 폐허의 땅이었어요. 당시 내 나이 열세살(13세)이었어요..."

황옹과 함께 마을을 둘러봤다. 마을에는 대강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대강초등학교가 있고 농협 약국 음식점 약초상회 다방 노래방도 있었다. 또 대강양조장을 비롯해 1960년대에 시작한 대동상회, 대청방아간, 대강철물점 등의 유서 깊은 상점도 있었다. 그렇다. 장림리는 대강면사무소가 있는 이곳 산촌 경제·문화의 중심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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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장날 2014년 10월30일 초라한 대강장날 풍경 ⓒ 김경진


농협 앞에서는 때마침 5일장(5일·10일)도 열렸다. 오늘이 2014년 10월 30일이니 바로 그 장날이다. 1970~1980년대에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시끌벅적대던 장이었는데, 지금은 옷·신발·과일·두부·청국장·뻥튀기 등을 파는 7개의 난전만이 초라하게 5일장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문득 이곳 장날을 관광상품화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이면 하루 수백 대의 관광버스가 오는 관광거점 마을이기에 주말장터로 잘만 활용한다면 좋을 것 같다고 황옹께 말했더니, "안 그래도 당국이 이곳 5일장 활성화를 위해 비가림시설과 휴게시설을 내년부터 한답디다"라고 대답했다.

장림리에는 시가지 규모에 비해 음식점이 많았다. 최근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수도권과 영남권에서 온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이곳 단양IC가 있는 장림리와 당동리와 두음리 일대에 음식점이 늘어난 것이다. 그 옛날 죽령을 넘기 위해 머물렀던 장림역 마을 객점들의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관광지 먹거리촌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이곳에는 직접 기른 흑염소만을 요리하는 '갈매기식당', 청국장과 곤드래밥이 유명한 '장림산방', 대나무밥 전문점인 '장씨본가', 손두부 전문점인 '고향집두부' 등 음식점이 15곳이나 있었다. 특히 갈매기식당은 각종 향토음식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곳이며, 장림산방은 2대째 내려오는 청국장과 맨 처음 곤드래밥을 식단에 올린 곳이라고 하며, '고향집두부'는 국산 콩을 사용하여 직접 손으로 만들기에 부드럽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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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막걸리 대강양조장에서 생산한 다양한 주류 제품 ⓒ 김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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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양조장 조재구 사장 대강양조장 조재구 사장이 대강막걸리 전시관에서 70~80년대 술통자를 들고 있다. ⓒ 김경진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곳의 명물은 대강막걸리란다. 우리는 이 대강막걸리를 생산하는 소백산술도가를 찾았다. 마침 조재구(1964년생) 사장이 있었다. 그는 "이 대강막걸리가 지난 2005년 노무현대통령 시절 청와대 만찬주로 공수되면서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은 양조장을 직접 찾는 관광객들도 많아졌습니다"라고 한다.

그는 현재 충주, 제천, 등지에도 대강막걸리 현지 양조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2010년부터는 일본에 수출도 한단다. 그런데 이 술이 인기가 있는 것은 이곳 물맛 때문이라고 한다. 대강막걸리는 소백산 자락 석회암지대 해발 180m에서 용출된 암반수로 술을 빚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모금 시음해 봤다. 그 톡 쏘는 듯한 맛과 향이 오랫동안 입 안을 자극했다. 특히 이 술은 지난 1994년 한국문화재단이 주최한 전통주류품평회에서 우수민속주류로 선정되기도 했단다.

조재구 사장이 말하는 소백산술도가(대강양조장)는 100여 년 전통의 대강양조장을 교사출신 아버지 조국환(1936년생)씨가 1979년 김병성씨로부터 인수했고 지금은 자신이 4대째 가업을 잇고 있단다. 1917년 증조할아버지가 맨 처음 충주에서 양조장을 시작했고 그 뒤 그의 아버지 조국환씨가 이곳 대강양조장을 인수해옴으로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 지금 그 옛날의 술도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100여 년의 전통이 이어져 왔기에 오늘의 소백산술도가가 더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것이리라...

황옹은 현재 이 마을의 경제를 이루는 생산품목을, 이곳의 관광음식들과 대강막걸리, 버섯, 산나물, 약초 등의 산야초와, 고추, 마늘 등의 농산물, 그리고 인접한 두음리 대강농공단지에서 생산되는 튀김류, 가스류, 마늘고추장, 마늘식초 등을 꼽았다. 또 그 수요가 많지는 않지만 원석공예품도 이 마을을 대표하는 특색 있는 상품이라고 설명했다.

황옹은 과거 이 마을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고 말했다.

"1970~1980년대에는 이곳 탄광 종사 인원만 해도 100여 명이고, 사택 수가 50여 호나 될 정도로 호황기였어요... 또 당시 이곳 대강국민학교에는, 한 학년에 두 반씩 있었는데, 지금은 전교생이 60여 명에 불과할 정도로 학생 수가 많이 줄었어요... 그리고 노벨상 물망에 올랐던 이진옥 전 포항공대 교수(생리학 박사)가 이곳 출신이여."

현재 이진옥교수는 미국에 거주하면서 매년 고향을 찾아 친구와 친지들을 만나며 한 달 가량 이곳에 머문다고 한다.
#죽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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