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곤에도 을지로 순환선이 있다

[땅예친 미얀마 15] 그 일상의 얼굴- 네 번째, 양곤순환열차

등록 2014.12.31 14:52수정 2015.01.02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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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잘 들어 갔냐?"
"야! 말도 마! 밤12시에 들어 갔어."

시대는 암울했어도 80년대 캠퍼스에는 소소한 낭만이 있었다. 신입생이었던 어느 봄날 아침부터 땡땡이를 모의했다. 봄바람을 핑계 삼아 막걸리를 사 들고 꽃 대궐 같은 캠퍼스 뒤편으로 숨어 들었다. 우리는 진달래 그늘 아래 떡 하니 술상을 차려놓고 송강 정철이 되어 '꽃 꺾어 산 놓고' 술잔을 돌렸다. 비록 순대 한 점에 먹는 술판이었지만, 돌아보면 그 시절이 우리들의 화양연화(花樣年華)였다.


봄 향기에 취한 것인지, 우울한 시대의 울분 때문이었는지 '아비어미도 몰라본다'는 낮술의 취기는 금방 목을 타고 올라왔다. 꽃 그늘 아래 술상을 파하고 학교 앞 주점에서 외상 술로 2차를 끝냈지만, 그때까지도 밖은 벌건 대낮이었다. 우리는 분명 그렇게 헤어졌다. 그런데 밤 12시에 들어 갔다니 참으로 미스터리 한 사건이었다.

'8시간 증발 사건'의 비밀

어렵게 복구해 낸 전날 밤 '8시간 증발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낮술을 파하고 오후 4시쯤 친구와 회기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탔다. 나는 종로3가역에서 먼저 내렸고 방배동이 집인 친구는 시청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 타야 했는데 그만 잠이 들었다고 한다.

눈을 떠보니 제물포역이라 비몽사몽 반대편 기차를 탔다. 다시 눈을 떠보니 이번에는 의정부역이었다는 거였다. 그때까지도 술은 덜 깼었는데 어찌하여 전철을 타고 2호선으로 무사히 갈아탄 기억은 난다고 했다. 2호선을 타고 잠시 졸았는데 전철에서 내려보니 12시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인천과 의정부를 갔다 왔어도 시청에서 바로 갔으면 밤 9시면 도착했어야 하는데 또 3시간이 비었다. 사라진 시간을 추적해보니 순환선이 주범이었다. 2호선으로 갈아 타고 다 왔다는 안도감에 잠이 들어 두 바퀴는 돌았던 모양이다. 시간 계산을 해보니 대충 알리바이가 맞았다. 그렇게 친구의 '8시간 증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물론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이 엄청난 얘기를 나는 지금까지도 긴가민가 하고 있는데 술 먹으면 자는 버릇이 있는 친구인지라 믿어 주기로 했다. 물론 사건의 진실은 30여 년 동안 그 친구만이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뭐 이제 어쩌겠나, 공소시효도 지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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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순환선 1980년 10월 개통을 시작으로 1984년 5월 48.88㎞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총 43개역을 약1시간30분에 걸쳐 내선, 외선으로 순환한다. (가운데)자작시 ‘을지로 순환선’ ⓒ 전병호


대도시 순환선은 자본주의 피곤을 싣고 달린다. 도시 생활에 찌든 사람들은 항상 순환선을 타고 어제 같은 오늘을 돈다. 큰 변화 없는 도시생활이란 다 거기서 거기다. 서울의 을지로 순환선도 그렇고 도쿄의 순환선도 그랬다. 하지만 모든 순환선이 다 그렇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 외곽을 도는 순환열차 얘기다. 양곤순환열차는 다른 대도시 순환선과는 뭔가 좀 달랐다. 그 속에는 미얀마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수많은 희로애락이 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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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달리(Tadalay)역 기차역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허름한 모양새였다. ⓒ 전병호


양곤순환열차를 타다

가기 전부터 한 번쯤 양곤순환열차를 타보고 싶었는데 기회는 떠나는 마지막 날 찾아왔다. 바간에서 심야버스로 양곤 아웅 밍갈라(Aung Mingalar) 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녘이었다. 우리가 찾아 들어간 곳은 공항근처 한국인이 운영하는 슈퍼원(Super 1)이라는 게스트하우스였다.

새벽녘 무작정 쳐들어 갔는데도 우리 사정을 들어주고 친절을 베풀어 준 김성기 사장님께 글로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우리는 한숨 잔 후 마침 게스트하우스 근처에 기차역이 있어 순환열차를 타고 나가 양곤시내관광을 하기로 하였다.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게스트하우스에서 택시로 구불구불 골목길을 돌아 들어가니 허름한 타달리(Tadalay)역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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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달리(Tadalay)역사 기차역사라고 해야 하나 할 정도의 ㅗ초라한 모습이다. ⓒ 전병호


이곳이 기차역이었다니...

명색이 기차역인데 우리가 상상하는 역은 없다. 그럴듯한 간판 하나쯤 기대했건만 그런 것도 없었다. 그냥 길가에 기찻길이 있고 50~60년은 되었음직한 막사가 있을 뿐이다. 흘러간 영화 속 장면처럼 판자촌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모습과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철로가 이채롭다.

기차역사라고 부르기에 민망한 역사 안에는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인지 근처 부랑자인지 사람들이 앉아서 잡담을 하거나 누워 졸고 있었다. 역 안에서는 노점상이 바닥에 헌책을 수북하게 늘어 놓고 팔고 있었으며 어떤 아주머니는 얼음덩이를 걸어 놓고 녹인 물을 작은 망에 걸러서 팔고 있었다.

표 파는 곳을 찾으니 예전 우리나라 시내버스 토큰 팔던 곳 같은 조그만 창구가 하나 보인다. 200짯을 주고 표를 구입했다. 직원에게 쉐다곤파고다를 간다고 설명하니 미얀마말로 열심히 설명했다. 우리가 못 알아 듣는 것 같자 친절한 아저씨는 창구에서 나오더니 직접 철길까지 인도해 방향을 알려준다. 그러더니 차표 뒤에 미얀마 글씨로 뭐라 적어 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내려야 할 역 이름을 적어준 것이었다. 정작 기차에서는 그것을 잊고 손짓발짓으로 간신히 쉐다곤파고다 가는 역을 알아냈다. 생각해보면 그것 또한 여행의 소소한 재미 아닐까 한다.

표를 구입하고 차 시간을 물어보니 10분 후에 온다고 한다. 하지만 미얀마에서 교통편 시간은 참고만 하면 된다는 것을 2주차 여행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근처 식당에 들어가 커피믹스 한 잔을 시켰다. 미얀마 타임을 생각하고 30분은 기다리겠거니 하며 시켰는데 웬일인지 15분 정도 지나니 기차가 느릿느릿 들어왔다. 기차 값과 같은 200짯짜리 믹스커피를 한 모금 밖에 못 마시고 기차에 뛰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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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표와 손 글씨 기차표 값은 200짯이었는데 친절한 아저씨는 차표 뒷면에 내릴 역을 손 글씨로 써주었다. 하지만 활용하지는 못했다. 써준 글씨가 페야란부따역에서 내리라는 표시였음을 나중에 알았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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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곤순환열차 느릿느릿 역사로 들어오는 순환열차 모습, 낡은 기차는 예전 비둘기호를 떠올리게 했다. ⓒ 전병호


양곤순환열차 안에는 미얀마인의 삶이 타고 있었다

기차를 타보니 내부는 촌스런 파란 플라스틱 의자가 앞뒤로 한 쌍씩 마주보게 되어 있었다. 어떤 여행정보에는 우리의 지하철처럼 양 옆으로 나란히 앉게 되어 있다고 했는데 기차마다 조금씩 다른가 보다. 전체적으로 내부는 조잡스러워 보였다. 승객의 안락함이나 편의보다는 그저 '이동용 탈것'에 충실했음이 표가 났다.

지저분하고 불편하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였는지 생각보다 깨끗하고 괜찮았다. 특히 열차 안, 포장하지 않은 미얀마 사람들이 여행자를 더욱 편안하게 해주었다. 을지로 순환선이 서울 도심을 도는 코스라면 양곤순환열차는 도시 외곽을 크게 한 바퀴 도는 기차라 서민들의 이용이 많다. 특히 오토바이 운행이 금지 되어 있는 양곤(양곤은 오토바이가 없다. 군부가 시끄럽다고 운행 중지 시켰다 한다)에서는 라인까(땅예친 미얀마 14 연재)와 함께 서민들의 발이 되고 있었다.

최신형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이어폰을 꽂고 있는 청년, 붓다의 삶을 안고 졸고 있는 띨라신(미얀마 여자 수도승), 시내 나가는 아줌마들, 가끔 보이는 잡상인들, 양복 입은 사람 등 기차 안에는 양곤의 삶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순환열차를 타고 가는 동안 안내원이나 어디서 내리라는 안내방송도 들어 보지 못했다. 미얀마 사람들은 그런 것 없이도 다들 잘 알아서 타고 내리고 있었다. 마치 이정표 없이도 아랫마을 잘 찾아 가는 고향 사람들처럼 미얀마 사람들에게 순환열차는 그냥 삶의 일부로 옆 동네 찾아가는 길이 되어 있었다.

좀 낡기는 했어도 나는 이런 양곤의 삶을 태운 순환열차가 무척 좋았다. 옛날 비들기호 같은 모습에서 추억을 떠올리거나, 느릿느릿 달리며 창 밖으로 시내를 구경하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는 순환열차의 맛이었다.

미지의 나라로 떠나는 여행은 꼭 사전에 많은 정보가 필요한 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적당한 정보와 직접 체험하며 자기만의 느낌을 맛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것이 힘이 될 수도 있지만 너무 많이 아는 것은 병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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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곤순환열차 안에는 미얀마인들의 삶이 타고 있었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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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순환열차 주변 양곤 순환열차는 양곤 시내를 관통한다. 느릿느릿 돌며 주변을 구경하는 것도 순환열차의 매력이다. ⓒ 전병호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열두달이 순환열차처럼 한 바퀴 돌면 1년이다. 하지만 너무 아쉬워만 하지는 말자. 한 바퀴 돌면 또 다시 새로운 열두달이 나타나니까 말이다. 힘들었던 한 해를 보내고 다가오는 새 해 열두달을 순환열차 타고 가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힘차게 시작하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띠리 띠리~ 띠리 띠리~'

새벽 2시반 핸드폰이 울린다. 낮술 사건의 주인공 녀석이다. 사이판이란다. 다른 친구랑 여행 갔는데 갑자기 내가 보고 싶어 전화했다나.

"뭐라? 나만 빼고? 이런 나쁜 친구 같으니"
"친구야! 30년 전 '8시간 증발 사건' 믿어 줄 테니 새해에는 미얀마에서 낮술 먹고 순환열차나 함께 타보자!"

☞알고 가면 좋은 정보: 양곤순환열차

미얀마 사람들의 좀더 가까이서 느끼고 싶다면 양곤순환열차를 타보는 것이 좋다. 양곤 중앙역을 기점으로 양곤 외곽을 크게 한 바퀴 도는 완행열차로 총 38개역을 3시간~3시간 30분에 걸쳐 운행한다. 원래 외국인에게는 요금을 더 받았으나 지금은 현지인과 동일요금인 200짯 정도 내면 된다. 양곤 중앙역이 기점이긴 하나 아무역에서 타고 아무역에서 내릴 수 있다. 언제 없어질 지 모른다는 말도 있으니 방문하면 한번 타볼 것을 추천 한다.
덧붙이는 글 ※미얀마어 표기는 현지 발음 중심으로 표기했으며 일부는 통상적인 표기법을 따랐습니다.
#미얀마 #땅예친 미얀마 #전병호 #양곤순환열차 #을지로순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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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공작소장, 에세이스트, 춤꾼, 어제 보다 나은 오늘,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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