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괴 거물급 간첩', 37년 만에 누명을 벗다

'재일교포 사업가 간첩' 사형수 강우규씨, 재심 무죄판결 받아

등록 2014.12.31 18:24수정 2014.12.31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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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기관이 강우규씨 등 11명을 '간첩단'으로 검거했다는 소식을 보도한 1977년 3월 24일자 경향신문 ⓒ 경향신문


45년 만에 밟은 고국 땅에서 그는 간첩이 됐다. 1977년 3월 24일 언론은 '북괴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재일교포 사업가로 위장한 '북괴거물급 간첩' 강우규(당시 60세)씨와 그 일당 등 11명이 검거됐다고 대서특필했다. 수사기관은 그들이 '자유통일협의회'란 지하조직을 만들어 휴전선 일대를 탐지해왔다며 이들의 자백을 증거로 제시했다. 이듬해 대법원은 강씨의 사형을 확정했다.

다시 37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는 억울한 누명을 벗었다. 서울고등법원 형사6부(부장판사 김상환)는 지난 19일 열린 재심공판에서 강우규씨의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지하조직 일원으로 몰렸던 김추백·김성기·강용규·이근만·이오생씨도 전부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세상을 뜬 강우규씨와 그의 동생 용규씨, 김추백씨는 "피고인들은 무죄"라는 주문을 직접 듣진 못했다.

강우규씨 등은 1977년 2월 차례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 끌려갔다. 법원이 발부한 영장은 없었다. 수사관들은 강우규씨에게 1969년 일본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했고 이를 위해 1972년 한국에 잠입했음을 인정하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강씨가 북한을 찬양했고 간첩활동과 관련해 현금 등을 준 사실을 자백하라고 강요했다. 구타는 기본에, 전기고문과 물고문까지 당한 사람들은 끝까지 버티지 못했다.

"고문 못 이겨 허위자백" 호소했지만... 37년 뒤에야 귀 기울인 법원

몇몇은 재판 때 "중앙정보부에서 '강우규가 다 이렇게 얘기했는데 너만 모르면 말이 되냐'고 시인하라 해서 부르는 대로 썼다"며 진술을 번복했다. 하지만 법원은 외면했다. 그해 6월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6부(재판장 허정훈 부장판사)는 강우규씨에게 사형을, 다른 이들에게는 징역 1년 6개월~5년을 선고했다. 1978년 3월 2일 대법원이 강씨의 사형 판결을 확정했지만 사형은 집행되지 않았다. 이후 11년간 옥살이를 한 강씨는 1988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난다.

이들 가운데 강용규·김추백·이근만·이오생씨는 2010년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허위자백을 했다'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를 받았다. 그런데 강우규씨는 2007년 숨졌고, 일본에 머물던 그의 유족들은 진실 규명 신청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르던 상태였다. 뒤늦게 다른 피해자들과 연락이 닿은 강씨 유족들은 고민 끝에 재심 청구를 결정했다.

재심 재판부는 진실·화해위 조사 내용을 토대로 피고인들의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강우규씨의 경우, 본인과 다른 관련자들의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한 적이 있는데다 중정 수사관들이 작성한 조서 말고는 별다른 증거가 없다고 했다. 또 강씨가 자신의 구명운동을 해온 모임에서 1989년 낸 소식지에 "내 사건은 완전히 날조됐다, 남산 지하 취조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고 밝힌 점 등을 볼 때 수사기관의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인정했다.


재심에 참여한 이석태 변호사(민변 '재일동포 변호인단' 단장)는 31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뒤늦었지만 무죄판결이 나와 법원에 감사드린다"고 했다. 이어 "강씨처럼 간첩사건에 얽힌 재일교포들은 한국에 온 유학생 등 조국이 그리워서 왔는데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 쓴 사람들"이라며 "재판장도 안타까워하며 '법원이 과거에 잘못했다'더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재심을 같이 받지 못한 다른 피해자들도 최대한 찾아내 재심 청구를 돕겠다고 덧붙였다.
#과거사 #재일교포 간첩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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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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