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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 소설에는 있고, 하정우 영화에는 없는 것

영화 <허삼관>에 부족한 것

15.01.21 19:53최종업데이트20.07.30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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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허삼관>이 영화 <국제시장>에 이어 아버지 열풍을 잇고 있다. 하정우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 <허삼관>의 원작은 중국 작가 위화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다. 원작 소설은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중국 소설 가운데 하나다. 세계 중요한 언어로 거의 다 번역된 이 소설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국 사람이다. 여전한 스테디셀러이자 여러 번 연극으로 상연되기도 했다.

 

이런 인기는 한국이 유일하다. 중국인들은 위화의 소설 가운데 <인생>(영화 <인생>의 원작)을 더 좋아하고 위화의 대표작으로 친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유독 <허삼관 매혈기>를 더 좋아한다. 허삼관이 12번 매혈을 하는 이야기인 이 소설의 배경은 현대 중국, 특히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으로, 철저히 중국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유독 이 소설에 친근감을 느낀다. 숱한 고난을 매혈로 버텨내는 질긴 생명력과 넉넉한 웃음을 지닌 허삼관이라는 캐릭터와 그의 삶이 한국인에게 문화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친근하고 익숙한 까닭이다. 한국 독자들은 마치 한국 소설처럼 <허삼관 매혈기>를 읽고, 고향 동네 아저씨처럼 허삼관을 떠올린다.

 

그런데 중국 영화감독 장예모가 만들었으면 가장 잘 만들 것 같은 영화를 하정우가 만들었다. 하정우는 '허삼관 매혈기'에서 '매혈기'를 뚝 떼어냈고, 시대적 배경을 마오쩌둥 시대에서 한국전쟁 이후 피폐한 한국으로 바꾸었다. 

 

하정우는 원작 소설 제목에서 왜 '매혈기'를 뺐을까? 물론 영화에서도 매혈이 등장한다. 하지만 원작과 달리 영화는 허삼관의 매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버지 이야기, 허삼관이라는 피를 팔아서 아들과 가정을 지키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로, 그 중심이 바뀌었다.

 

물론 원작 소설도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의 한 축 역시 아버지 다시 세우기에 관한 이야기다. 마오쩌둥 시절, 아니 중국 근대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중국 지식인들과 혁명 지도자들은 아버지 타도를 외쳤다. 작가 루쉰에서부터 혁명가 마오쩌둥까지 그러했다.

 

전통을 타도하고 현대 국가,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전통 타도 운동이자 기성 권력과 전통 권위를 타파하려는 차원에서 낡은 가족제도를 부정하고 아버지를 부정한 것이다.

 

아버지 타도라는 외침은 문화대혁명 때 절정에 달했다. 문화대혁명(1966~1976)은 문화적으로 보자면, 아버지로 상징되는 기성 권력과 기존 문화를 전복시키려는 아들의 반역운동이었다. 저명한 영화감독 천카이거가 자기 아버지를 공개 비판하면서 친구들 앞에서 보란 듯이 아버지 밀쳤듯이, 숱한 아들들이 반동 아버지를 비판의 자리에 세우고 몰아붙였다.

 

가정은 해체되고 아버지들은 시골로 쫓겨 가거나 죽었다. 영화 <푸른연>(감독 티엔쭈앙쭈앙)에서 중국 현대사의 전개에 따라 세 아버지가 잇달아 죽고 가정이 해체되는 게 그 여실한 예다. 집에는 어머니와 자식만 남은 채 아버지는 부재했다. 영화 <5일의 마중>(감독 장예모)에서처럼, 특히 지식인 아버지는 더욱 그러했다. 물론 가정 밖에 유일한 아버지가 있었다. 마오쩌둥이 유일한 아버지로 태양처럼 떠 있었다.

 

그런 마오쩌둥 시대가 끝나고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빛을 발하면서, 1990년대 이후 중국 문화는 아버지를 다시 세우고, 가정을 다시 세우기 시작한다. 사는 게 넉넉해지고 중국적인 것, 전통적인 것의 가치를 재발견하면서 아버지와 가정을 다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중국 CCTV가 우리나라 김수현 극본의 가정 드라마를 집중적으로 구입하여 틀고, 그것이 선풍적 인기를 누린 것도 이런 문화적 흐름 탓이었다.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도 크게 보면 그런 흐름 속의 아버지 다시 발견하기, 아버지 다시 세우기라는 1900년대 이후 중국 문화의 조류를 반영한다. 적어도 하정우의 '허삼관'은 이 차원에서는 위화의 원작과 잘 접속하였다.

 

그런데 위화의 소설에는 있지만 하정우의 영화에는 없는 것도 있다. 어쩌면 위화 소설에서 아버지 세우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정우의 영화에는 없다. 위화 소설에서 허삼관은 아버지인 동시에 세상의 고난에 대처하는 중국 민중의 질긴 생명력을 상징했다. 허삼관의 매혈은 아들을 살리거나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이지만 허삼관이 12번 피를 파는 데는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등 정치적 배경이 놓여 있다.

 

영화에서 일락이는 뇌염에 걸려 죽을 고비를 맞지만 소설에서는 문화대혁명 때 시골로 하방(下放)되어 고생하다가 간염에 걸려서 허삼관이 피를 판다. 그런가하면 대약진운동(1957)의 후유증으로 식구들이 57일간 죽만 먹게 되어 어쩔 수 없이 피를 팔기도 한다.

 

처음에는 매혈이 건강을 증명하는 차원이었지만 뒤로 갈수록 매혈은 삶에 닥쳐오는 갖가지 정치적, 역사적 재난 앞에서 삶의 막장에 내몰린 허삼관의 최후의 응전이 된다.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삶의 불평등한 상황 속에서 12번 피를 팔아 대처하는 허삼관은 민중 생명력의 상징인 것이다.

 

위화의 말대로 원작 소설은 불평등에 관한 소설이다. 중국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민중들에게 삶의 평등이란 단순하다. 모두가 힘들면 괜찮다. 모두가 힘들다면 그 고난을 운명처럼, 누구나 살면서 겪는 일쯤으로, 인생이 원래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니까 괜찮다. 그런데 유독 나만 억울하고, 나에게만 불평등하게 여겨질 때가 있다. 허삼관이 아내 허옥란이 사실은 처녀가 아니고 일락이가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가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허삼관은 어떻게 대처하는가? 자신이 골탕 먹었다는 사실, 자신이 한 골 먹은 상황을 거의 비슷한 것으로 되갚으면서 심리적 평형을 유지한다. 임분방과 바람을 피우는 것이다. 이제 게임은 1대 1이 되었다. 일락이가 내 핏줄은 아니지만 일락이는 친부인 하소령이 아니라 허삼관을 아버지라 부르며 절규하였다. 이로써 아무리 사람들이 남의 자식을 키운 종달새라고(원작 소설에서는 자라 대가리라고) 놀려도 게임은 끝난 것이다.

 

그런가하면, 문화대혁명 때 아내 허옥란이 매춘부라고 비판을 당하자 허삼관은 아들 셋을 모아 놓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도 네 엄마하고 똑같은 죄를 저질렀다. 그러니 너희들 엄마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아내에게도 말한다. "당신과 결국은 같아." 당연히 소설 속 허삼관은 마오쩌둥의 사상도 모르고, 문화대혁명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극의 시대가 한 가정에 재난으로 밀려올 때 중국 민중들 특유의 삶의 논리로 그것에 대처한다.

 

그것이 허삼관의 평등관이자 삶의 지혜이다. 세상의 고난을 감수한 채 원한보다는 우호적으로 세상을 대하는 낙관적인 인생관의 소유자가 허삼관이다. 물론 세상에 대한 정당한 분노가 없이 수세적이기만 한 이런 태도가 바보 같고, 노예적일 수 있다. 루쉰의 소설 <아Q정전>에 나오는 아Q의 정신승리법과 유사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부정적인 것마저 허삼관의 삶의 태도이다.

 

그런데 소설에서 어찌 보면 어리석어 보이는 허삼관은 진즉부터 알고 있다. 세상이 결국은 불평등하다는 것을. "좆털이 눈썹보다도 나기는 늦게 나지만 더 길게 자란다는 것을." 고단한 삶 속에서 체득한 특유의 감각이다. 그런 불평등한 현실 속에서 허삼관을 비롯한 밑바닥 인생들은 피를 팔거나 가족애와 형재애로 똘똘 뭉쳐서, 같은 처지인 가난한 사람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도우면서 헤쳐 나간다. 물론 이런 인생관을 지닌 허삼관이 불평등한 세상을 향해 언제 분노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우선은 넉넉하게 웃는다. 마치 바보처럼!

 

하정우의 영화 <허삼관>에는 자식과 가정을 위해 피를 팔아가면서 모든 것을 희생하는 아버지는 있다. 그러나 밖에서 오는 온갖 재난에 맞서 특유의 질긴 생명력을 발휘하는 민중의 상징으로서 허삼관은 없다. 영화 제목에서 '매혈기'가 빠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아버지가 문제다. 고난의 시대를 살아온 민중의 상징으로서 아버지는 사라지고 민중의 생명력이니 하는 말이 골동품이 되어 버린 채, 아버지와 아버지 시대에 대한 경배와 찬양만 넘쳐나는 것은 위험하다. 시대를 뒤로 돌리는 복고의 흐름이다. 화려한 카메오와 복고풍의 화면이 주는 눈요깃거리와 소소한 유머가 주는 즐거움 속에서도, 원작을 읽은 관객들은 영화 <허삼관>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아쉬움과 씁쓸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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