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고를 적용하는 시기의 어려움

땀을 뻘뻘 흘리도록 만든 스스로의 어리석음

등록 2015.01.29 11:13수정 2015.01.29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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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어플로 오늘의 운세를 점쳐보는 사람은 많을 거다. 나 역시 그중 하나인데, 8개의 앱과 2개의 포털 사이트 오늘의 운세를 챙겨본다. 이쯤 되면 비과학적인 것에 인생을 맡기는 운명론자라고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오늘의 운세를 챙겨보기 시작한 것은 사소한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애인이 너무 생기지 않아 옆구리가 시리다 못해 고드름으로 박살 난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던 한때, 언제 사랑의 임은 오시려나 혹은 오시게 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나 청승맞은 고민을 자주했다. 연지곤지 찍은 황진이가 되어 애타는 고민을 구뷔구뷔 펴보던 나날, 답답한 나머지 오늘의 운세 사이트 하나를 골라잡고 연애 운이나 훑어보던 중이었다.

이걸 보고 그날의 운을 판단한다면 이 데이터가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전무하지만, 이와 비슷한 종류의 데이터를 여럿 모아서 그것들에게서 공통적인 데이터가 추출된다면 그건 의미가 있지 않겠냐는 재미있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오늘의 운세를 볼 수 있는 사이트 두 개를 골라잡았다. 나머지는 유료 결제라 다 제외했다. 데이터화하기엔 너무 부족해서 스마트폰 앱으로 8개를 더 깔았다. 10개 정도면 데이터로써 의미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생각의 허점은 너무 뻔하다. 10개의 데이터가 모두 일부분이라도 올바른 정보를 가질 때 모여 데이터로서의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건데, 모두 의미 없는 정보만을 담고 있다면 0을 열 번 더해도 0이듯 가치가 없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내 옆구리는 이미 고드름으로 쿡쿡 쑤시는 관절염화 돼 있었기에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매일 그날의 운세를 체크했다. 10개가 모두 딴소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날은 데이터를 모두 신경 쓰지 않았다. 가끔 6개 정도가 비슷한 소리를 하면 연애 운이 아니라도 충고로 받아들였다.

그날도 이런 식으로 아침 지하철에서 운세 10개를 보고 있었다. 10개 중 9개에서 비슷한 맥락의 충고를 던졌다. '오늘은 남의 말을 쉽게 믿지도 말고 휩쓸리지도 말라.' 한 달에 한 번 이런 식으로 모든 운세 데이터가 비슷하게 나오는 경우가 있다. 그런 날은 측근이 내뱉은 충고마냥 온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저녁에 영화 시사회에 갈 일이 있었다. 하루 종일 충고를 곱씹으며 팔랑 귀가 되지 않기 위해 돌하르방 같은 인간으로 행동했다. 8시 10분 시사회면 보통 30분 전에 표를 받고 대기한다. 굉장히 많은 시사회를 다녔는데, 그날 처음으로 표를 배포하는 직원분이 이런 얘길 꺼냈다. "8시 10분 거 말고 10분 전에 같은 영화로 시사회 있는데 B열이라 자리가 좀 앞좌석이에요. 그래도 괜찮으시면 드릴까요?" 이게 웬걸. 시간을 10분 절약할 수 있다는 생각에 10만 원 번 스크루지 마냥 덥석 받아들였다.

영화 상영시간이 되어 입장했다. 계단 위에는 형광색 조명으로 나타난 열 표시가 있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맨 앞좌석부터 분명 A열일 텐데 바로 그 위 계단부터 A열 표시가 쓰여 있었다. 다른 곳은 사람이 들어차있었지만 맨 앞 열만 아무도 앉아있지 않았다. '아, 여긴 맨 앞좌석은 다른 방법으로 표기하고 두 번째부터 A열로 표기하는구나. 당당하게 세 번째 열에 앉았다.

광고가 나오기 시작하고 사람은 거의 들어찼다. 중간중간 열 표시 때문에 헷갈려하는 인원들이 많았다. 한 아주머니께서 내 옆 좌석에 앉은 남녀에게 여기가 B열이냐고 묻자 두 남녀는 C열이라고 대답했다. 그 아주머니는 두 번째 열에 앉았다. 나는 당황했지만 오늘만큼은 남의 말에 휩쓸리지 않는 돌하르방 남이었다.

잠시 뒤, 어느 중년부부가 다가와서 자리 확인을 부탁했다. 나는 당당하게 계단에 열 표시 확인해보시라고 했다. 계단 열 표시에는 'B'가 확실히 쓰여 있었다. 그런데 주변 반응이 심상찮았다. 심지어 뒤쪽 어딘가에 앉아있던 아주머니 한 분은 "꺄할할" 구성진 가락으로 웃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심하게 당황해서 중년부부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상영관 입구로 다시 나가봤다.

입구에 그려진 좌석배치도엔 맨 앞좌석부터 A열로 표시되어 있었다. 당황함이 가중되어 더욱 당황해져만 갔다. 코미디 프로에서 당황함을 표출하는 개그맨 땀줄기마냥 수도꼭지로 땀을 뻘뻘 흘렸다. 티셔츠가 바닷가 뻘 같은 감촉으로 흐물흐물 되었다.

다시 극장 안으로 들어가니 계단엔 확실히 한 칸씩 위로 밀려 열 표시가 돼있었다. 이게 뭔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여긴 그냥 한 칸씩 위로 표시됐다는 설명밖엔 가능한 해석이 없었다. 자리를 헤맨 사람들이 생각보다 꽤 있었던 걸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도 아마 나처럼 혼란스러웠을 거다. 모든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와중에, 호언장담하며 자리를 지키려고 하는 이는 수많은 사람 중 나 하나였던 것이다.

상영 시작하고도 한 십분 간은 고개를 들 수 없는 쪽팔림에 땀을 흘렸던 것 같다. 한겨울의 사우나를 공짜로 했으니 내가 이득이구나 생각은 해보긴 하는데, 애인이 생겨서 연지곤지 찍은 부끄러움은 없고 생판 옹고집 부려서 연지 곤란할 뿐이다. 도대체 10개의 데이터가 모여 한 소리를 내는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혹은 데이터가 유용하다 할지라도 그것의 적용은 대체 언제 해야 한단 말인가.

인생은 쓸모 있는 데이터를 구하는 일도, 그 의미 있는 충고를 적용하는 시기를 찾는 것도 참 힘들다. 그날 본 영화는 <서유기>였는데, 극도의 스트레스가 쌓였던 손오공이 이것저것 다 박살내고 다닌 그 마음이 조금은 이해된다. 어리석다는 중년 아주머니의 비웃음이 지금도 등을 적신다.
#인생 #충고 #적용 #시기 #어리석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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