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선씨가 남편 윤기진씨에게 보낸 편지
윤기진
당시 건국준비위원회는 여운형 선생님을 위원장으로 하여 해방과 동시에 친일청산, 민생치안, 독립국의 정규군대 편성문제 등을 해내외에 밝히면서 정권인수 작업을 발 빠르게 준비하였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의 의도는 미처 간파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국민들은 38선에 연연하지 않고 북으로는 회령, 남으로는 제주에 이르도록 건국준비위원회의 지부와 마찬가지인 인민위원회를 앞 다투어 설치한다.
해방 직후, 자주독립국의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국민 (당시 말로 '인민')의 열망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1945년 8월 말, 전국에 걸쳐 145개의 인민위원회 깃발이 나부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자주독립국을 향한 기대로 중앙조직과 지역별 조직이 빠른 속도로 마련되고 좌우익 인사가 고루 참여했다.
이후 해방기 민중의 열망이 자연스럽게 반영된 이러한 시도는 내외의 분열공작과 주도권 싸움 등으로 초기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좌절하고 만다. 그러나 그 꿈은 38선 이남만의 단독정부수립설이 외신을 통해서 전해지고 난 후, 격렬한 단독선거 반대 여론과 시위로 나타나고 38선 양쪽에 각각 정부가 선 이후, 전쟁과 휴전으로 이어진 오늘까지 분단 극복 통일열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48년 4.3 항쟁에 나선 제주도민에게,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동포에게 발포 할 수 없다며 항명의 죄를 저지른 여수순천의 군사반란 주인공들에게 이승만과 미군정은 어떤 존재였을까? 역시,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김구 선생님이 38선을 넘어 대동강 쑥섬에서 공산주의자들과 마주앉아 "자주독립이 있고서야 좌도 있고 우도 있다" 하시던 48년 4월. 김구 선생님에게 이승만과 미군정은 어떤 존재였을까?
그 격렬했으나 좌절 또한 컸던 해방기, 해방공간을 이해하지 못하면 4.3을 기리를 시를 이해할 길은 난망하다. 제주도 4.3 평화공원에 7박 8일을 머물러도 인민위원회나 4.3 항쟁의 주역들인 갑남을녀들 모두 무도한 빨갱이 이상이 아닌 것이다.
검사는 영장청구서류에 위 시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제는 4.3을!> 제목의 시는 1948년 남로당의 사주를 받은 공산무장폭도들이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여 일으킨 무장폭동 사태를 왜곡 날조하면서 북한의 대남적화통일을 위한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하는 내용이고,"
이미 국가적 차원에서 제주도민에게 공식사과 한 4.3, 해마다 민관이 합동추모행사를 진행하고 4.3 평화공원이 버젓한데도. 아직 이 나라는 해방기, 우리 민중이 품었던 당연한 열망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법의 제단 위로 멱살 잡아 끌고 다닌다.
격동의 해방기, 당시를 살았던 선열들의 지사적 고민을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역사를, 사회를, 문학을 법정에까지 끌고 가서 논한다는 것, 우리 시대의 비극 중 비극이다.
2015.1.22. 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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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구속... 표현의 자유 한계 각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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