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암
추연창
의암에서 돌아나와 다시 촉석루 경내로 들어섰다가, 이윽고 김시민 장군 전공비로 간다. 이 비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호다. 대구의 유형문화재 1호는 경상감영 청사였던 선화당이다. 조선 시대에 경상감영이 거의 대부분 대구에 있었기 때문에 부산, 울산 등에는 선화당이 애당초 존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선화당이 대구의 유형문화재 1호가 된 것이다. 하지만 선화당은 그저 건물일 뿐이므로 김시민 장군 전공비와 같은 역사성을 자랑하지는 못한다.
진주성 안에는 또 하나의 대단한 비석이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2호인 이 비의 이름은 '촉석정충단비'다. '정'은 기린다는 뜻이고, 충은 충성, 단은 제단을 뜻한다. 2차 진주성 싸움 때 순국한 김천일, 고종후, 최경회, 황진, 장윤 등의 행적이 비에 새겨져 있다. 고종후는 금산 전투에서 전사한 고경명 의병장의 아들이고, 황진은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와 전쟁 발발 가능성이 농후하니 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무장이다.
경회는 김천일과 더불어 호남의 대표적 의병장 중 한 사람이다. 진주성이 함락되면 왜적들이 호남으로 쳐들어올 것이기 때문에 당시 진주성 싸움에는 호남 의병들이 대거 참전했다. 그러나 최경회도 이곳에서 순국한다. 특이한 것은 그가 논개의 정인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논개는 최경회가 죽자 의도적으로 왜장에게 접근하여 그를 끌어안고 촉석 절벽에 뛰어내렸던 것이다. 안타까운 두 사람, 오늘 진주성을 찾아 잠깐 묵도한다.
김천일 장군비를 본 뒤 왼쪽으로 계단을 오르면 '진주성 대첩 순의단'이 나온다. 대첩은 1차 진주성 싸움, 순의는 2차 진주성 싸움을 가리킨다. 진주성 싸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비의 뒷면에 새겨져 있다. 물론 읽기에는 곤란하다. 그래도 이 단은 볼 만한 것을 답사자에게 제공한다. 양 옆에 새겨져 있는 부조들이다. 우리 장졸들이 왜적과 싸우는 장면들을 새겨놓았다. 그 중에서 특히 논개가 왜장을 안고 뛰어내리려는 장면이 눈길을 끈다.

▲ 김시민 장군비
추연창
진주성 싸움 때 풍신수길은 조선에 남아 있던 대부분의 군대를 결집시킨다. 결국 진주성으로 몰려든 왜적은 10만에 육박했다. 부산 주둔군 1만을 제외한 일본군 전체가 몰려왔던 것이다. 게다가 풍신수길은 10만 군사를 진주성으로 보내어 그곳에 있는 조선인을 모두 죽이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하기까지 했다. 풍신수길은 1차 진주성 패배 때문에 조선 정벌에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래서 진주성만은 꼭 함락시켜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작정했었다.
하지만 조선의 조정과 도원수 권율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물론 권율 본인도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지 않고 구경만 했다. 그에 비하면 통신사로 다녀온 후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없다고 했던 김성일은 진주성에 와서 싸움을 독려하다가 진중에서 죽었다. 정치 지도자가 어떤 방식으로 백성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가를 잘 증언하고 있는 것이 바로 2차 진주성 싸움이다.
나와 성문 바로 앞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식당 안에는 진주성 관련 사진들이 즐비하게 걸려 있었다. 식당 안 풍경은 답사자에게 '과연 이곳은 진주로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했다. 사진 중에는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있는 벽화 부조도 빠짐없이 걸려 있었다. 논개가 죽은 진주성에서 밥을 먹으며 나는 먹걸리도 한 잔 곁들였다. 그것을 스스로 나는 논개와 김천일 등 이곳에서 죽은 1만 군사와 5만 백성들에게 바치는 술이라고 합리화했다.

▲논개부조 논개부조
추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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