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상지
자료사진
허형식은 심양감옥에서 또 한 사람의 평생 동지를 만났다. 그는 중국인으로 조상지(趙尙志)였다. 조상지는 마부에서 참모장, 군장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로 1908년 요녕성 조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하얼빈으로 이주한 뒤 한 상점의 점원으로 일하며 하얼빈공업학교를 다녔다.
조상지는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처음에는 말단 평당원으로 같은 고향 출신인 손조양 사령관의 마부였다. 손조양 의병부대 '조양대(朝陽隊)'는 하얼빈 동쪽 빈현과 주하지방에 본거지를 둔 가장 규모가 큰 의용부대였다.
조상지가 마부 생활하던 어느 하루, 빈현의 일본군이 손조양 의용군을 습격해 왔다. 손조양은 일천 명이 되는 일본 정규부대의 습격에 포위당했다. 그때 마부 조상지는 대장 손조양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사령님, 제가 계책을 하나 말씀드릴까요?"조양대 손조양 부하 참모들이 보니 마부 조상지였다.
"야, 네깐 놈 마부 주제에 무슨 계책이냐?"그들은 '으하하' 크게 비웃으며 조상지를 놀렸다. 하지만 손조양은 조상지에게 계책을 말할 것을 허락하고 귀담아 들었다.
"일찍이 손자병법에 출기불의 공기불비(出其不意 攻其不備, 적이 미처 예상치 못할 때 출격하고, 적이 미처 방비치 못한 곳을 공격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일본군에게 삼면으로 포위 되었으니 정면을 과감히 돌파하여 텅 비어 있는 빈현을 쳐들어 가십시오."마부에서 참모장으로손조양은 그의 진언에 따라 별동대를 조직하여 정면 돌파를 감행했고, 빈현 역공작전은 대성공으로 일본군 본거지를 궤멸시켰다. 손조양은 마부 조상지의 전략에 감탄했다.
"마부의 입에서 어찌 이와 같은 병법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조상지는 이 전투에서 세운 공로로 손조양의 신임을 얻어 마부에서 일약 손조양 부대의 참모장이 되었을 뿐 아니라 북만 항일전선에서 그의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다. 그가 반제 활동으로 국민당 헌병대에 체포되어 봉천감옥에 수감 중일 때였다.
조상지는 감옥 내 죄수들의 우두머리로 이른바 '깡툴(죄수들의 제왕이란 은어)'로 군림했다. 그때 허형식이 봉천감옥에 들어오자 이 두 사람은 '깡툴' 자리를 두고 날마다 다퉜다. 두 사람 모두 남다른 용맹성을 가진 이들이라 승부는 쉽게 나지 않았다. 조상지가 허형식보다 한 살 더 많았다. 어느 날 조상지가 허형식에게 제의했다.
"이 봐! 허 쉬따거즈(꺽다리라는 허형식의 별명), 우리 서로 싸울 게 아니라 의형제를 맺어 서로 힘을 합쳐 국민당 놈들과 일본제국주의자를 쳐부수세."

▲ 광야,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항일독립군, 관동군, 마적들이 각축을 벌였던 곳이었다(헤이룽장성 벌판, 2000. 8. 촬영).
박도
결의형제를 맺다허 형식은 그 말에 조상지 앞에 무릎을 꿇고 조아렸다. 조상지는 1908년 생으로 허형식보다 한 살 더 많았다.
"형님, 저는 모르는 게 많습니다. 앞으로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허형식은 조상지가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대단히 투쟁가요, 전략가라는 소문을 그전부터 이미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허형식은 심양(봉천)감옥 생활에서 자기를 평생 이끌어주는 두 동지를 만났다. 한 동지는 조선인 김책이요, 또 다른 한 동지는 중국인 조상지였다. 그들 두 사람과 혈맹관계를 맺은 허형식은 이후 항일전선에서 순풍에 돛을 단 격으로 승승장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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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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