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10년 7월. 진실화해위원회가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희생자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심규상
3차 학살은 같은 해 7월 6일 무렵부터 7월 17일 새벽 사이 벌어졌다. 이 기간은 육군형무소 병력이 대전형무소에 임시 주둔하던 때였다.
1950년 <런던 옵서버>지 기자로 한국에 왔다가 북한군의 포로가 된 필립 딘은 <나는 한국에서 포로였다>에서 "미군이 대전에서 철수하기 직전 남한 경찰이 1700명의 재소자들을 트럭에 겹겹이 싣고 와 내가 있던 교회 부근 숲에서 처형했다"는 프랑스 신부 카다르(당시 72세)의 증언을 전했다.
영국 일간신문 <데일리 워커>의 편집자이자 특파원인 위닝턴 기자는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에서 "7월 16일 인민군이 미군의 금강 전선을 돌파하자, 남아 있는 정치범들에 대한 학살이 (또다시) 시작됐다, 이날 무수한 여자들을 포함해 적어도 각각 100명씩 트럭 37대, 3700여 명이 죽었다"라고 썼다. 3차 시기에만 1700명 또는 3700이 학살됐다는 증언이 나뉘어지고 있다.
하지만 3차 학살 희생자를 1700명으로 추정하더라도 1차 1400명(6월 말 삼일), 2차(7월 첫 주 삼일) 희생규모는 20일 동안 4900명에 이른다.
나머지 희생자들은 북한군에 대한 '부역 혐의'를 받은 사람들이었다.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군경은 부역자 색출에 나섰다. 대전과 충남 일원에서 9월 28일부터 11월 13일까지 충남경찰국에서 검거한 부역자 수는 1만1992명에 이르렀다(1950년 11월 15일 내무부가 밝힌 내용). 검거된 부역자는 군법회의를 거쳐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대전형무소에서는 열악한 수용시설에 식량과 의약품마저 부족하자 곳곳에서 굶어죽고, 얼어죽고, 병들어 죽는 재소자가 속출했다. 처형된 사람들도 많았다. 기록에 의하면 헌병대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은 1951년 1월 17일 하루에만 대전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사형수 166명을 대전 산내 골령골로 끌고 가 처형했다.
민간단체, 유해발굴 자원봉사... 땅속 진실 드러날까

▲ 대전 산내골령골 집단학살 희생자 암매장지
심규상
지난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산내 골령골 일부 유해를 발굴했지만 소규모 매장추정지 외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민간단체 주도의 유해발굴에서도 어느 정도의 유해가 드러날 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우선 발굴 예정지가 극히 제한적이다.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측은 여러 물리적 조건 상 매장추정지 중 100여 평에 한해 유해발굴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발굴 예정지는 수십 년 동안 농사를 짓고 있는 밭이다. 희생자 유가족들은 "오랫동안 농사와 개발행위로 대부분 유해가 유실됐을 가능성이 크다"라면서 "유해가 남아 있는지 조차 가늠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유해매장 추정지 전체에 대한 유해발굴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유해발굴과 유해매장지 보존을 위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대책을 요구했다.
"정부는 하루속히 정부 기구를 마련해 체계적인 계획 하에 과학적인 유해발굴 작업에 나서야 합니다. 대전시는 다른 자치단체처럼 희생자의 원혼과 유가족들의 한을 달랠 수 있도록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 지원을 위한 조례제정에 나서 주십시오. 관할 동구청은 유해매장지가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조치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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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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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0여 명 학살당한 땅... 대전 산내의 뼈아픈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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