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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못 푼다는 그 암호, 그가 깼다

[리뷰] <이미테이션 게임>, 비운의 수학자 앨런 튜링

15.02.09 19:45최종업데이트15.02.09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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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 <리니지> 등 컴퓨터 게임은 마니아들에겐 '밥 없이는 살아도 게임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을 하게 한다. 나름 전략을 세우고 익명의 상대와 연합을 이뤄 적을 격퇴 시키는 시나리오 게임은 예전 <갤러그>나 <트윈 코브라> 등 같은 평면적 전투와는 개념이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뿅뿅' 오락실 게임이나 전략 컴퓨터게임 역시 수학의 일부인 통계학에서 나왔고 약간의 변수를 집어넣어 인공지능의 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실제 전쟁을 모방한 가상의 전쟁 게임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이미테이션 게임!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신들린 연기가 압권이다.

'전쟁은 늙은이들이 일으키고 그 전쟁에서 죽는 사람은 젊은이들이다'(하버드 후퍼)

실제로 전쟁 영화를 보면 전투를 일으키는 양쪽 진영의 우두머리는 돈과 권력을 가진 나이 많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물자와 인력을 공급하고 책임자를 임명한다. 그 책임자는 그들이 가진 역량과 자리 보전을 위해 전략과 전술을 세운다.

그들의 고민은 몇 개의 대대나 중대 단위의 승리 혹은 일부 병사들의 목숨을 지켜내는 것이 아니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다. 여기서 각 전쟁의 주체는 전쟁의 당사자가 아닌 제3의 세력과 긴밀한 정보와 무력을 주고받기도 하고, 심지어는 적군과도 비밀스런 거래를 성사시키기도 한다.

전쟁에 패하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많은 군인들이 총칼에 쓰러져도, 자기가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적당한 희생을 감수하고 심지어는 명목상 승리를 적군에게 바치기도 한다.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인터넷이나 '카더라' 통신에 수없이 돌아다니는 '프리메이슨'이니 '시온 의정서'니 '일루미나이티' 혹은 '로스차일드 가문', '유대인의 음모'라는 등의 '찌라시'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출처가 모호한 그 정보들은, 실제로 세계를 움직이는 비밀스런 세력이 있다는 것이며 그 세력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근원적인 세력으로 그 역사는 기원전 수천 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미테이션 게임>이란 영화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니그마(Enigma)

이니그마란 '수수께끼' 혹은 '알 수 없는 사물 혹은 그 무엇'을 뜻한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이니그마', 즉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서 사용하던 암호 생성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영국인 천재 수학자인 '앨런 튜링'에 관한 이야기다.

실제로 독일군에서 사용된 [이니그마]

당시 연합군에게 가장 공포의 대상은 독일군 잠수함인 '유보트'였다. 도버해협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영국과 독일군과의 해상전은 불시에 나타나 영국의 군함이나 수송선을 파괴시키고 곧바로 사라지는 유보트 때문에 속수무책이었다. 제해권을 독일군에게 완전히 빼앗긴 영국은 수도 런던조차 독일군 폭격기의 기습공격에 무방비로 당했고, 굶주린 영국인들을 위해 미국에서 보내온 식량 수송선들도 여지없이 유보트에게 수장되고 만다.

이니그마는 독일군에게 유보트의 위치와 폭격 대상을 암호로 보내주는 기계로 이니그마를 사용한 독일의 암호문은 소련이나 폴란드, 영국 최고의 암호전문 해독가도 풀 수 없었다. 지금은 컴퓨터로 간단히 암호해독이 가능하다지만 20세기 초에 독일군에서 사용하던 '이니그마'의 암호는 일정한 패턴이나 반복되는 문자열이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당시 독일군이 사용하던 이니그마는 예전 폴란드에서 고안된 기계를 좀 더 복잡한 체계로 바꾸어 여러 단계의 해독 작업을 거쳐야 알 수 있는 기계였다. 이니그마는 그 경우의 수가 상상을 초월한다. 독일식 다표식 대치 암호에 알파벳을 입력할 때마다 규칙이 바뀌는 체계로 1 해(垓) 5900경(京)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암호의 수를 가진다. 10명이 24시간 동안 1개씩의 경우의 수를 입력하더라도 200만 년이 걸리는 암호체계. 게다가 이니그마에 입력된 암호는 24시간마다 암호체계가 바뀌는데, 해독을 했다 해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해석'을 할 수가 없어 전쟁은 영국군 및 연합군에게 점점 불리해지고 있었다.

앨런 튜링

이때, 아직도 디지털 컴퓨터의 역사에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던 앨런 튜링이란 수학자가 구원자로 나선다. 독일어라고는 '하일 히틀러'밖에 모르는 앨런은 그가 고안한 기계로 불가능하다 생각했던 '이니그마'의 암호체계를 깨뜨린다.

앨런은 팀 동료인 휴와 조안 클라크 그리고 그녀의 친구인 헬렌과의 대화 중에 이니그마에서 나오는 문자열에 반복되는 암호문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항상 일정한 패턴으로 발송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앨런의 팀은 이에 근거해 이니그마 암호 경우의 수를 대폭 줄여 기계에 입력한 결과 메시지 해독에 성공한다.

사실 영화에서는 이니그마의 암호체계와 분석 방법, 앨런이 암호체계를 깨기까지 기술적인 과정이 상당 부분 생략되어 있다. 하지만 나로서는 영국 최고의 천재집단이 무작위로 내뱉는 평범한 대사도 이해하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연기력이었나 보다.

앨런 튜링을 연기한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괴팍하고 사교성 없고 내성적이며 특유의 말 더듬는 연기는 '키이라 나이틀리'의 사랑스럽고 지적인 여성인 '조안 클라크'의 연기와 어울려 그 효과가 배가된다. 2년여의 연구 끝에 개발한 초기 컴퓨터 '봄(Bombe)'이 이니그마의 암호를 해석했을 때 보여준 암호해독 팀의 눈물겨운 포옹 장면은 그 어려운 수학과 통계 언어로 소외된 내게도 함께 암호를 깨뜨렸다는 엄청난 동료의식을 갖게 해줬다.
  
<이미테이션 게임>의 시작

그럼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앨런 튜링은 신도 풀 수 없다는 이니그마의 암호를 해독해 냈다. 그럼 당장 영국군 사령 기지로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오늘 아침에 가로챈 이니그마 암호의 공격 명령을 무력화 시켜야 하지 않을까? 앨런은 그러지 않는다. 이 모든 사실을 기밀로 할 것을 부탁한다.

이니그마의 암호체계를 깬 앨런과 조안은 MI6의 수장인 멘지스에게 비밀로 할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거짓 정보출처를 만들어 영국군과 독일군 모두를 속이는 것이 전쟁을 속히 끝내는 길이라 설명한다.

왜? 이들의 목적은 전쟁을 끝내는 것이지 한두 번의 해전이나 공습을 막으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번번이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 낸다면 독일은 이니그마의 암호체계가 무너진 것을 알고 새로운 이니그마를 디자인할 것이다. 그러면 2년 동안 그들이 매달려온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모방 게임'이다. 그들은 거짓 정보 출처를 만들고 자국 내의 모든 군 조직과 비밀조직 및 독일군과 연합군 내에도 이 거짓 정보를 흘린다. 이 정보에 홀린 영국과 독일군의 전쟁은 영국 한적한 시골의 라디오 공장에서 일하는 '앨런 튜링과 그의 팀에 의해 '게임'으로 변하고 만다.

이들은 독일군의 모든 공격 루트와 방법을 해독해 낸 다음 적당한 통계치를 이용해 승리할 싸움과 패할 싸움을 만들어 간다. 그리고 승률을 점점 독일군에서 연합군으로 올려간다. 역사상 최고의 작전이라는 '노르망디 작전'도 그중의 하나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개 공군 부대나 대전차 부대의 승리와 패전은 중요하지 않았다. 전쟁의 전체적인 흐름을 연합군의 승리로 바꾸어 가는 것이다. 독일군의 모든 유보트의 위치와 나치 친위대의 전략을 꿰뚫고 있는 것은 전 세계에서 애런 튜링과 그의 동료들 밖에 없다. 이제 독일군과 연합군은 치열한 공방은 결말이 정해져 있는 게임의 스토리에 불과하다.

앨런 튜링도 벗어날 수 없는 <이미테이션 게임>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후반 전쟁을 승리로 만들어가는 암호 해독반의 '워 게임'을 등장시킨다. 그러나 앨런의 어린 시절과 전쟁 이후 앨런의 삶을 조명하면서 강조하는 것은 그의 삶 역시 모방에 그치지 않는 삶이었다는 것이다.

앨런은 조안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 때문에 약혼을 파기하고 만다.


그는 동성애자였다. 당시 영국에서 동성애자는 성문란 죄로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개인사를 숨기고 팀을 위해, 이니그마를 깨기 위해 동료 여성과 약혼을 하고 팀워크를 위해 맘에도 없는 사과를 건네주는 그는 어쩌면 신이 잡고 있는 조이스틱에 의해 움직이는 게임의 주인공일 수도 있다.

현재도 모든 분야에 적용되고 있는 <이미테이션 게임>

최근에 상영된 <엑스 마키나>, <트랜센던스> 그리고 <A. I>, <에일리언 4>에서 보는 것처럼 인간의 사고력을 모방한 인공지능의 등장을 주제로 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난 이 모든 영화가 가능케 한 것은 앨런 튜링의 '봄'이라는 기계가 시초라 생각한다.

'0'과 '1'로부터 시작되는 무한 가능성은 지금도 앨런 튜링이 발표한 논문 '튜링 기계'나 '튜링 테스트'가 기본개념이다. 인간과 기계에서 같은 질문을 던져 놓고 그 해답이 어떤가에 따라 인간인지 로봇(인공지능)인지 구분하는 테스트다. 이 질문은 지금도 상영 중인 <엑스 마키나>에도 등장하는 장면이다. 튜링과 담당 형사가 경찰서 취조실에서 나누는 질문을 보자.

"기계도 생각을 하나요?
"정말 어리석은 질문이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사람은 사람의 방식으로 생각합니다. 기계는 기계의 방식으로 생각하지요."

이 대답은 앨런이 이니그마의 암호를 풀기 위해 고안한 방식이다. 기계의 암호는 기계만이 풀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사고의 다양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흥미로운 질문은 말이죠, 당신과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봐야 할까요? 우리는 다양성을 갖도록 허용하고 있죠. 당신은 딸기를 좋아하고 난 아이스 스케이팅을 싫어하고…………. 다른 취향을 갖는 것과 다른 것을 선호하는 것이 무슨 의미겠어요? ... 그리고 만약 서로 다른 사람들 간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왜 똑같은 점을 적용할 수 없겠어요? 구리, 전선, 철로 된 뇌에 대해서 말이에요? 이게 바로 이미테이션 게임입니다."

앨런이 던진 말은 중의적이다. 앞으로 발전하게 될 인공지능의 미래를 내다보며, 기계가 생각하는 방식은 인간의 사고방식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할 것을 예측한 것이다.

영화 <엑스 마키나>에서 본 인공지능의 사고방식은 인간의 것을 모방하고 있지만 가치판단이나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사람과는 다른 방식을 통해 훨씬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앨런의 말처럼 구리와 전선, 철로 된 뇌가 말이다.

또한 이 말은 앨런의 동성애적 취향을 우회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성적 취향이 다른 것에 대해 보수적이던 당시 사회에서 화학적 거세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비극적 인생을 놓고 사회가 포용하지 못하는 다양성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베일에 가려진 영국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과 그가 처음 시도했던 '디지털 컴퓨터'의 기원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인류가 지금까지 지켜온 보편적 가치와 인식에 대해 수학적인 방식으로 비판하고 있으며 그의 삶 역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려면 타인의 생각과 행동반경 안에서 <이미테이션 게임>을 할 수 밖에 없음을 비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앨런 튜링 이미테이션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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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종교학 쪽에 관심이 많은 그저그런 사람입니다. '인간은 악한 모습 그대로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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