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가 내곁에 있어 정말 다행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올린 기사만 1033편... '명예의 전당 오름상'을 받았습니다

등록 2015.02.12 14:11수정 2015.02.12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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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받고 나서 <오마이뉴스>에 쓴 글이 1천 편이 넘어 '명예의 전당 오름상'을 받았다. ⓒ 오마이뉴스


1989년 출간된 <쫄병수칙>이라는 이름의 두 번째 단행본에 필자로 참여하면서 '글사랑' 출판사로부터 워드 프로세스라는 기계를 선물 받았다. 하지만 기계로 글을 쓰는 것에 적응하기 어려워 기계는 아내 물건이 되다시피 했다. 원고지를 앞에 놓고 만년필을 쥐어야만 글이 나오는 현상은 그 후에도 몇 년 동안 지속됐다.


1995년 지방지 <중도일보>에 연재 소설을 쓰게 되면서 워드 프로세스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986년 <대전일보>와 <제주신문>에 연재 소설을 쓸 때는 무난히 육필로 집필했지만, 몇 년 후 <중도일보> 연재 때는 육필 작업이 어려웠다. 아예 처음부터 워드 프로세스로 원고 작업을 했다.

그러다가 1999년부터는 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워드 프로세스는 글만 쓸 수 있는 단순 기종이지만, 컴퓨터는 광대한 영역을 포괄하고 있었다. 금세 컴퓨터에 푹 빠져 들었다. 그 때부터는 도저히 육필로는 글을 쓸 수 없게 됐다. 컴퓨터 앞에 앉아야만 생각이 정리가 되고, 글이 나오는 것이다.

2001년 7월부터 오마이뉴스에 글 송고

컴퓨터를 사용하다 보니 인터넷을 알게 됐고, 곧 사이버 세상으로 뛰어들었다. 맨 처음에는 문학 전문 사이트에 출입하다 '안티조선' 운동 사이트인 '우리 모두'에 진출했다. <조선일보>에 대항하는 글들을 맹렬히 썼다. 치열한 투쟁이었다.

그러다가 2001년 7월부터 <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로 참여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어언 14년이 흘렀다. 14년 동안 <오마이뉴스>에 변함없이 줄기차게 글을 썼다. 정치 칼럼도 쓰고, 사는 이야기와 여행기도 쓰고, 종교 관련 이야기며 제법 때깔 좋은 에세이도 썼다.


동료 문인들로부터 왜 소설은 쓰지 않고 '잡문'만 쓰느냐는 말도 들었다. 그러다가는 소설을 아예 쓸 수 없게 된다는 말, 바둑기사가 바둑은 두지 않고 오목만 둔다는 질책성 충고를 듣기도 했다. 옆에서 집사람은 이해를 해줬다. 오목도 제대로 잘 두면 된다고 했다. 장시간의 바둑을 두지 못할 바에는 오목이라도 정신 차리고 열심히 둬야 한다고 했다.

명색이 소설가지만 사실 소설은 어렵다. 장시간의 집중과 몰두가 필요하다. 때로는 몸서리나도록 고통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소설 아닌 글들(나는 절대로 '잡문'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은 진저리나리만큼 어렵지는 않다. 아무 때나 쓸 수 있고, 급한 청탁을 받으면 밥을 먹다가도 단숨에 쓸 수 있다. 하지만 소설은 장시간의 집중과 몰두가 필요한데, 내 생활 여건이 그것을 도와주지 않는다. 그것이 뼈 아프고 서러워 언젠가는 오밤중에 자다 말고 일어나 앉아서 철철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투혼의 마음가짐으로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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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 시민기자와 함께 <오마이뉴스>에 지속적으로 깊이 있고 흥미 만점인 역사 관련 글을 쓰고 있는 김종성 시민기자도 '명예의 전당 오름상'을 받았다. ⓒ 오마이뉴스


소설에 매진하지 못하는 현실이 늘 마음 아프지만, 바둑을 두지 못하는 대신 오목이라도 열심히 잘 두자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글을 썼다. 그러다 보니 <오마이뉴스>에 쓴 글이 1천 편을 넘게 됐다(2015년 2월 현재 1033편이 올라 있다). 지난 1월 <오마이뉴스>에서 상을 준다고 했다. 편집부에서 채택해 정식 기사로 오른 글이 1천 편이 넘으면 '시민기자 명예의 전당 오름상'을 준다는 것이었다.

지난 1월 23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오마이뉴스> 본사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해 기념 메달과 소정의 상금을 받았다. 10여 명의 시민기자들이 갖가지 상을 받았는데, 내가 가장 연장자였다. 가장 연장인 것도 쑥스럽고, 1천 편의 글을 썼다고 상을 받는 것도 조금은 쑥스러웠다. 무슨 특별한 글을 써서 받는 상이 아니고 1천 편이 넘었다고 상을 받자니 정말 면구스러운 웃음을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생각하면 내가 <오마이뉴스>에 수 많은 글을 쓴 것 역시 '투혼'이었다. 나는 투혼의 자세로 글을 썼다. <오마이뉴스>가 있어 나는 나 자신을 위안하며 투혼의 글을 쓸 수 있었다. 역주행의 시대, 지리멸렬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내가 중심을 잡고 견디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무 때고 투혼의 자세로 글을 쓸 수 있는 지면이 내 곁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오마이뉴스>에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나와 아내는 <오마이뉴스>의 '10만인 클럽'에 참여해 매월 1만 원씩 후원금을 내고 있다. 진보 언론으로 분류되는 <경향신문>과 <한겨레21>, <시사IN> 등을 수년 동안 구독해오고 있다. 죽는 날까지 '구독자'로 남아 있을 생각이다. 그 모든 지면을 속속들이 밥그릇 비우듯이 읽지는 못하지만, 진보 언론들을 조금이라도 거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꼿꼿이 세우고 있다.

나는 <동아일보> 출신 작가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으로 등단했다. 그러므로 동아일보는 내 모지(母紙)다. 모지에 대한 애착이 없을 리 없다. 그럼에도 나는 30년 동안 구독해오던 동아일보와 2001년 과감히 결별했다.

1970년대 중반 동아일보 광고 탄압 때는 동아일보를 돕기 위해 아낌없이 용돈을 털어 '격려 광고' 대열에 참여하기도 했다. 동아일보가 유신 독재정권에 의한 광고 탄압 역사도 지니고 있는 만큼, 수구 족벌 언론의 속성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조중동' 울타리에 갇히고 마는 상황에 연민과 절망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한때는 동아일보 문화면의 고정 지면에 몇 달 동안 글을 쓰기도 했고, <신동아>에도 여러 편의 글을 썼지만, 이제는 그 지면들에 글을 쓸 일이 없다. 그래도 아쉬울 건 없다. 내게는 <오마이뉴스>가 있다. 내가 언제라도 글을 쓸 수 있는 인터넷 매체, 진보 언론 매체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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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자 일동 여러 갈래의 상을 받은 시민기자 전원과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2015년을 기분 좋게 시작한 셈이다. ⓒ 오마이뉴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충남 태안의 <태안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명예의 전당 오름상 #동아일보 신춘문예 출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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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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