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영화팬 세대인 듀나, 좀 꼰대스럽다

[김성호의 독서만세 50] <가능한 꿈의 공간들>

등록 2015.03.10 12:03수정 2020.12.25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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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꿈의 공간들> 책표지. ⓒ 씨네21북스


나름대로 영화애호가라고 자부해왔지만 평론을 잘 읽지 않는 탓에 이 책을 통해서야 듀나(DJUNA)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다. 듀나는 SF작가로 한국 SF장르문학에 기여해왔으며 '씨네21'을 비롯한 각종 매체에 꾸준히 글을 써 칼럼니스트로 상당한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의 신상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채 지난 20여 년 간 오직 글로써만 소통해 그 정체는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다고도 전한다. 마치 영화 속 주인공 같은 소개인데 어쩌랴, 이게 사실인 것을.

이번에 씨네21북스가 펴낸 <가능한 꿈의 공간들>은 듀나가 지난 20여 년 간 써온 글을 한데 모은 일종의 글모음집이다. 영화와 관련한 단상부터 대중문화, 사회이슈, 장르문학, 나아가 멀티플렉스 극장의 부조리한 행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룬 50여 편의 글이 묶였다. 사소하게 보이지만 중요할 수 있는 문제들을 독특하고 예리한 관점으로 다루는 그녀의 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신선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따로 특별한 주제를 가진 완결성 있는 글은 아니지만 다루고 있는 소재가 워낙 광범위하다 보니 듀나의 글이 친숙한 이라면 친숙한 대로, 낯선 이라면 낯선 대로 흥미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을 듯싶다.


이 책이 가진 최대의 장점은 다양한 소재를 통해 색다른 관점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양한 시점에 쓰여진 여러 글에선 예민하고 까다로운 듀나의 성품이 그대로 묻어나는데 이를 견뎌낼 수만 있다면 이로운 독서가 될 것이다. 그는 클래식,SF,영화 등에 대해 폭넓은 지식과 예민한 감각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때로는 날카롭게 때로는 섬세하게 글을 써내려간다. 특히 CJ CGV를 위시한 국내 극장들이 마스킹을 하지 않는 것을 소리높여 비판하는 부분에서는 무책임한 멀티플렉스에 대한 영화애호가의 분개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왜 CJ CGV는 마스킹을 하지 않을까?

마스킹(masking)이란 상영관의 화면비율이 영화의 기본 세팅과 맞지 않을 때 가림천과 커튼으로 스크린 가장자리를 가려 스크린과 영상의 비율을 맞추는 걸 뜻한다. 이를 통해 스크린의 남는 부분을 뜻하는 레터박스(letter box)가 가려져 관객은 스크린을 통해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프레임만을 보게 된다.

만약 마스킹을 하지 않는 경우 스크린의 가장자리에 레터박스가 뜨게 되는데 이는 관객의 집중도를 떨어뜨릴 뿐 아니라 감독이 화면비율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훼손시킬 수 있다. 그런데 CJ CGV를 시작으로 롯데시네마와 메가박스 일부 상영관이 마스킹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고 하니 관객들이 최상의 상태에서 영화를 볼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 것이다.

책은 듀나가 알라모 드래프트하우스 시네마 체인 대표인 팀 리그에게 한국 상영관의 이와 같은 경향에 대한 의견을 물어 얻어낸 답변을 소개하고 있다. 미국의 극장 체인의 대표로 해당 분야의 전문가로 손꼽히는 팀 리그의 답변은 이와 같았다.


"제 생각에 그건 게으르고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입니다. 기본적인 마스킹의 설치와 활용은 영화관 운영의 기초입니다. 1.66:1이나 1.33:1 비율의 고전영화를 틀 때 제대로 된 마스킹을 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85:1과 2.35:1 비율의 영화는 반드시 정확하게 마스킹을 해야 합니다."

이에 앞서 마스킹 문제를 CJ CGV 측에 직접 항의한 듀나는 담당자로부터 이와 같은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트렌드인데요. 고객님이 이해해주시죠."

섬세하고 날카롭지만 편협하며 오만하기도

섬세하고 날카로운 게 이 책에서 보여진 듀나의 장점이라 한다면 편협하고 오만하게 느껴지는 건 단점이라 하겠다. 그녀는 서울시향 정명훈 소동과 관련하여 '아마 이 논쟁은 시민의 세금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쓰느냐의 문제로 귀결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개나 소나 다 할 수 있다'고 적고 있는데 합리적인 논의의 전개과정에 대해 굳이 이처럼 공격적인 표현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던가 싶다. 사실 논의의 중요도나 깊이로만 따지자면 이 책 또한 개나 소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묶어놓은 게 아닌가 말이다.

이에 앞서 저자는 클래식음악 분야 안에 자신만의 취향이 있다는데 자존심을 느낀다며 어느 분야든 취미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일정수준 이상의 경험과 지식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여기까지만 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녀는 문단의 끝에 '순진무구하게 록 음악의 세계에 들어갔다가 어떤 꼴을 당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문희준 선생이 증언해줄 것이라 믿는다'고 덧붙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대체 여기서 문희준의 사례를 끌어다 쓰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책의 다른 장에서 세월호 참사와 <타이타닉>,<포세이돈>을 함께 조명한 기사에 분개한 그녀의 글을 읽으면 의문은 더욱 커진다. 게다가 문희준이 당시 모욕당했던 게 어디 록 음악에 대한 경험과 지식의 문제 탓이었던가 말이다.

책을 읽으며 이죽거리고 비아냥대는 문장이 지나치게 많아 불편함을 느꼈다. 더불어 실린 글마다 그 완성도나 문체에 편차가 적지 않은데 자유로운 형식의 글 묶음임을 감안하더라도 아쉽게 느껴졌다. 그녀에 대해 밝혀진 게 없다고는 하지만 그녀가 정해진 장소에서 안정된 심리상태로만 글을 쓰는 게 아니라는 건 장담할 수 있을 듯하다.

<로마의 휴일>과 <사운드 오브 뮤직>을 좋아하는 게 대체 어떻다는 말인가?

듀나는 '추억의 영화' 코드에 대해 이야기하며 임권택 감독이 '월스트리트저널'과 인터뷰한 사례를 언급한다. 당시 임권택 감독은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영화로 <역마차>,<길>,<새>에 더해 <로마의 휴일>을 꼽았는데 듀나는 앞의 영화 리스트에 <로마의 휴일>을 넣는 감독이 몇이나 되냐며 의문을 제기한다. 소위 한국 올드 영화팬들의 특정한 코드가 영향을 미친 사례라는 것이다. 그녀는 90년대 영화광, 나아가 시네마테크를 찾는 영화팬과 '추억의 영화'를 소비하는 사람들을 구분짓는데 글에서 단순의 구분을 넘어선 우열의 잣대가 읽히는 듯해 당혹스럽기도 했다.

이 장에 나오는 '아직도 '추억의 영화' 팬들은 "한국 사람들은 <사운드 오브 뮤직>이 최고의 할리우드 뮤지컬영화라고 생각해!"라는 말이 왜 웃긴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문장에선 이와 같은 잣대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대체 한국 사람들이 <사운드 오브 뮤직>을 최고의 할리우드 뮤지컬로 생각해선 안 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외화가 영화수입사나 TV에 의해 선별되어 상영되었고 그로부터 특정세대 한국 영화팬들의 취향이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이와 <사운드 오브 뮤직>을 최고의 뮤지컬 영화로 꼽는 걸 조롱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좋은 영화에 감동하고 이를 기억하는 건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이며 이와 같은 취향은 존중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듀나의 글에선 자신과 다른 것을 마음껏 비꼬고 이죽거리는 경향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물론 그 가운데 상당수는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어서 크게 불편하지 않았지만 이와 같은 방식의 글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굳이 따지자면 2010년대 영화팬 세대인 나는 90년대 영화팬 세대인 듀나에게서 꼰대스런 인상을 받았는데 그녀가 정영일과 같은 영화저널리스트에 대해 적은 것과 크게 다른 인상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그녀는 책에서 예술가란 젊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듀나와 같은 글을 쓰는 사람에게도 적용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녀가 말했듯 성숙과 늙음이 다르고 작가란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하며 자신을 성숙시킬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가능한 꿈의 공간들>(듀나 지음 / 씨네21북스 펴냄 / 2015.02. / 1만 2000원)

가능한 꿈의 공간들 - 듀나 에세이

이영수(듀나) 지음,
씨네21북스, 2015


#가능한 꿈의 공간들 #씨네21북스 #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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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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