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살인에 중독된 남자, 사회가 만들었을 수도"

[인터뷰] '살인재능' 전재홍 감독 "내가 사라지지 않는 영화를 하고 싶다"

15.08.09 09:53최종업데이트15.08.09 09:53
원고료로 응원

영화 <살인재능>의 전재홍 감독. ⓒ 인디스토리


윤계상, 김규리 주연의 <풍산개>는 순제작비 2억여 원으로 완성했다. 그리고 여름대작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71만 명을 동원했다. 아마도 김기덕 감독이 각본을 쓰고, 김기덕의 '제자'들이 연출한 영화 중 손에 꼽을 정도의 관객 수 일 것이다. 그 <풍산개>의 전재홍 감독이 4년 만에 돌아왔다. <살인재능>(7월 30일 개봉)이란 기묘한 제목의 단출한 영화 한 편을 들고.

어쩌면 이천희, 차수연 주연으로 그가 31살에 찍었다는 데뷔작 <아름답다>와 닮았을 거라 지레 짐작할 수도 있겠다. 남녀 신인 배우를 내세운 저예산 영화이니 말이다. 단언컨대, 전혀 다르다. 그가 연출은 물론, 각본과 촬영에 음악까지 참여해서가 아니다. 그 사이 거대 예산 영화의 연출 제의를 받았다가 고배를 마셔야 했던 전재홍 감독은 "세 번째 영화를 만들고 나서야 '현실'이 보였다"고 말한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살인재능>은 8년 동안 다니던 회사에서 쫓겨나 한순간에 실업자가 된 남자 민수(김범준 분)의 일상을 쫓는다. 번듯한 애인이 있음에도 수음 따위를 하는 이 남자는 어쩌면 그 누구보다 본능에 충실한 인간형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업 후 재취업은 하늘에 별따기요, 결혼을 약속한 애인 수진(배정화 분)은 결별을 선언해 버린다. 생계를 위해 수진의 동생과 자동차 절도 일에 뛰어든 민수는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옛 상사를 죽이게 되면서 살인의 재능(?)에 눈떠 가게 된다.

"민수를 절대 전형적인 싸이코패스로 그리고 싶진 않았다. 사회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피가 난무하지 않으면서도 덤덤한 시각에서 풀어 보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기존에 보지 못했던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영화감독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항상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캐릭터에 도전해 보고 싶다."

한국판 아메리칸 싸이코? "전형적인 싸이코패스 그리고 싶지 않아"

영화 <살인재능>의 공식포스터. ⓒ 인디스토리


<살인재능>은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 초청작이기도 하다. 부산국제영화제 남동철 프로그래머는 <살인재능>(영어 제목은 <Gifted>)이 "한국판 <아메리칸 싸이코>는 어떤 이야기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출발한다고 봤다. 맞다. 민수는 점차 살인에 중독되어 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끊어내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중독이 정말 많고 힘들지 않나. 담배도 그렇고. 몸에 좋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끊을 수는 없다. 더 큰 쾌감이 있어서 끊질 못하는 거다. 민수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재능이 있다고 믿을 뿐. 누구나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나 또한 아침에 일어나 '나는 재능이 있다'고 말하곤 한다."

자, 일순간에 사회가 받아 주지 않는 인간이 된 민수는 스스로 살인에 재능이 있다고 믿는 인물이다. 그래서 돈도 벌고, 애인도 다시 찾으며, 결혼을 꿈꾸게 된다. 그러나 누구나 안다. 그 열망이 일장춘몽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그래서 영화는 끊임없이 민수의 비루한 일상을 환기시킨다. 크리스찬 베일의 <아메리칸 싸이코>와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이다. 이러한 인물을 전재홍 감독은 어떻게 탄생시켰을까.

"큰 영화 준비할 때는 진짜 많은 분들에게 연락이 왔다. 그 기간이 끝나고 나니까 아무한테도 차 한 잔 마시자는 연락이 없더라. 그게 인생이구나 싶었다. <풍산개> 이후 일 자체는 쉰 적이 없다. 그래도, 내 영화를 안 찍으니까 마치 모터가 멈춰버린 느낌이 들더라. 무중력 상태에서 열심히 뛰어도 붕 뜬 기분.

그런 차에 김기덕 감독님에게 연락이 왔다. 2013년이었는데, 부산국제영화제에 놀러 오라고. 정말 놀러 가는 기분으로 갔는데, 내 위치가 어디인지 알겠더라. 많은 감독들이 활발하고 치열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내년엔 꼭 내 영화를 들고 오겠다는 다짐을 했다. 쉬러 간 게 아니라 현실을 보고 온 거다. 지금도 불러 주신 김기덕 감독님께 감사한다."

"세 번째 작품을 하면서, 겁이 없어졌다" 

그렇게, 자신의 모습에 민수를 투영한 전재홍 감독은 원래 여행을 목적으로 모아 놓았던 목돈을 영화 제작에 투자했다. 원래 욕심이 있던 촬영에 도전했고, 20년 간 성악을 했던 이력을 바탕으로 음악 작업에도 참여했다. 영화와 창작에 대한 열망이 결국 <살인재능>이란 영화의 운명을 개척해 준 것이다. 그 열망의 근원이 궁금해졌다.

"세 번째 작품을 하면서, 겁이 없어졌다고 할까. 대부분의 감독들은 실패에 두려움이 클 수밖에 없다. 다음에 날 불러줄까, 실패하면 사라지게 되는 건 아닌가. 흥행이나 스코어에 따라서 다음 영화가 결정되니까. 여러 경험을 하고 나니 겁이 없어지더라. 그리고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영화 규모와 상관없이 내 돈을 주고도 보고 싶은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영화 안에 내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더라. 내가 사라지지 않는 영화를 하고 싶다."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 나흘째인 6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우동 영화의전당 비프테라스에서 열린 '<김기덕 스타일 영화 만들기> 아주담담'에서 김기덕 감독이 영화<풍산개>의 전재홍 감독을 칭찬하고 있다. ⓒ 이정민


사실 <풍산개> 역시 각본을 쓴 김기덕 감독의 자장 아래 놓인 영화였다고 볼 수 있다. 단순명쾌한 구조에 투박하지만 진심이 묻어나는 캐릭터들, 그리고 강렬한 이미지와 문제제기까지. <아름답다>가 훨씬 더 관념적이었다면, <풍산개>는 좀 더 거시적인 현실에 밀착한 장르영화였다. 과거 작품과 온전한 홀로서기에 가까웠을 이번 <살인재능>과의 차이가 궁금해졌다.

"김기덕 감독님의 영향 아래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딱히 없다.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다. 시나리오 쓰는 법부터 시작해서 감독님께 많은 걸 배웠다.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감독에게 개인 레슨을 받은 셈이다(웃음). 감독님을 넘어서고 싶은 생각은 없고, 그저 이제는 내 길을 가고 싶긴 하다.

사실 예전 영화들은 잘 못 본다. 그땐 진짜 내가 엄청난 감독이나 된 것 처럼 무겁게 찍었다. 데뷔할 때 31살이었는데, 그땐 내가 굉장히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다. 어른스럽게 보이려고 노력했고. 이제는 내 자신이 많이 바뀐 거 같다. 마흔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경험치가 높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사회를 보면서 시나리오를 쓰게 된 것 같다. 나 자신이 영화를 하는 밑거름이 되고, 관객들과 같은 고민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차기작은 호러영화... 웹툰 원작 < 0.0MHz > 내년 여름 선보일 터 

영화 <살인재능>의 한 장면. ⓒ 인디스토리


차기작을 물어 보니, 의외의 답이 돌아온다. 전혀 어울릴 거 같지 않은데, 호러영화를 준비 중이라고. 기존의 호러영화와는 다른 '어드벤처 스릴러'고, 'SF에 근접한 호러'에 가깝다고 한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듣고서야 의아함이 풀린다. <에일리언>, 그 중에서도 제임스 카메론의 <에이리언2>가 으뜸이라고. 스마트폰을 꺼내 수집한 에일리언 피규어들을 보여 주는 전재홍 감독의 눈빛이 반짝반짝 하다.

"전형적인 공포영화는 좋아하지 않는다. 재작년 여름, 처음 제의 받았을 때도 거절하다시피 했다. 헌데, 원작인 웹툰 < 0.0MHz >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의외로 나랑 잘 맞을 것 같았다. 평소에도 한국적인 귀신이나 <링>의 사다코에 가까운 느낌을 싫어했는데, 원작이 내 의도에 가까웠다. 사후세계를 다루고 있기도 한데, 내 색깔을 넣을 여지도 많고 꽤 영화적이더라. 예산에 비해 큰 이야기라 만드는 쾌감도 더 클 것 같고, 날 위해서도 분명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 열심히 하고 싶다."

만사가 삼 세 번은 해 봐야 한다고 했다던가.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세 번째 작품을 완성시키고, 영화제를 거쳐, 관객을 만나고 있는 전재홍 감독은 분명한 자신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영화의 방향성에 대한, 또 그걸 실현시킬 자신에 대한 믿음 말이다. 그에게 영화감독이란 직업에 대해 물었다. 역시나, 신중한 듯 단호했다. 아, 그리고 전재홍 감독이 만들 호러영화는 내년 여름쯤 만날 수 있다.

"영화감독, 세계 최고의 직업이자 최악의 직업이다. 전 세계 관객들과 소통하고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거 자체는 굉장하다. 하지만 절대 권하는 직업은 아니다. 감독, 더 나아가 자기 인장을 찍는 감독이 되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이안은 정말 존경스럽다. 할리우드까지 가서 여러 스타일을 만들지만 자신을 잃지 않는다는 게. 나 또한 어느 순간 꿈을 잃어 버렸던 것 같다. 이제는 더 변화하고 고민하면서 내 것을 만들어 갈 때다."

전재홍 살인재능 김기덕 풍산개 싸이코패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