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 터널까지 팠지만, 부하에게 죽임당한 대통령

[베트남-말레이시아 가족여행기③] 사이공을 대표하는 이름, 응오딘지엠

등록 2015.08.15 20:38수정 2015.08.15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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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를 꼽으라면 아직도 '사이공'이라고 답하는 사람들이 많다. 1975년 통일된 직후 '호치민 시티'라는 이름으로 개명됐지만, 4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에겐 사이공이 더 친숙한 모양이다. 기차역 이름을 그대로 사이공으로 남겨둔 것은 그런 미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베트남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맥주 이름도 바로 사이공이다.

공식적으로는 현재 호치민 시티의 번화한 시내 권역만을 지칭하며, 그 중심에는 사이공의 랜드마크인 통일궁이 자리하고 있다. 통일궁은 이른바 '사이공 함락'의 현장이며 베트남 남북통일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대도시인 호치민 시티의 볼거리는 통일궁을 중심으로 대략 반경 1킬로미터 내에 밀집돼 있으며, 날씨만 허락한다면 웬만하면 걸어서 다 둘러볼 수 있다.


현재 베트남의 수도는 북부의 하노이지만, 경제와 산업, 교통의 중심지는 단연 호치민 시티다. 베트남 전체 인구의 10%가 밀집돼 있는 거대 도시로, 19세기 중반 프랑스가 식민 통치를 할 때부터 분단된 뒤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 시절까지 수도 역할을 했다. 베트남의 여느 도시와는 달리 도심 한복판에 유럽풍의 건축물이 어깨동무하듯 늘어서 있는 이유다.

호치민 시티는 '신도시'다. 베트남의 전통 문화와 유산을 만끽하려는 이들이라면 부러 이곳을 찾을 필요는 없다. 인기 있는 수상인형극은 북부 하노이에서 '수입'한 것이고, 이곳을 대표할 만한 변변한 음식이나 축제 등도 딱히 없다. 산책하듯 도심 거리를 거닐다보면 언뜻 유럽의 어느 도시에 온 듯한 느낌만 받을 뿐이다. 호치민 시티는 '동양의 파리'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화려하고 색다른 볼거리가 많은 도시는 분명 아니지만, 식민 지배와 남북 분단, 전쟁의 상흔이 깊게 패인 곳이어서 그런지 우리에겐 왠지 모를 동질감 같은 게 느껴진다. 시장 상인의 흥정 소리가 정겹고, 공원에 나와 운동하는 이들이 동네 친구들처럼 친숙하다. 어쩌면 호치민 시티는 여느 나라 관광객들과는 달리 우리에게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는 도시일지도 모른다.

사이공을 상징하는 인물, 응오딘지엠

베트남 통일궁 입구에 1975년 사이공 함락 당시 철문을 부수고 진입한 북베트남의 탱크를 전시해두었다.

베트남 통일궁 입구에 1975년 사이공 함락 당시 철문을 부수고 진입한 북베트남의 탱크를 전시해두었다. ⓒ 서부원


호치민 시티의 한복판, 곧 사이공을 걷는다는 건, 한 독재 권력의 흥망성쇠와 비참한 말로를 성찰하는 여행이다. 통일궁을 비롯해 이곳의 대표적인 볼거리라는 노트르담 성당과 중앙 우체국, 시박물관, 나아가 시 외곽 차이나타운의 짜땀 천주당에 이르기까지 한 인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응오딘지엠이 바로 그다.


준엄한 역사의 평가가 어떠하든, 그는 사이공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나아가 그의 삶이 곧 베트남의 굴곡진 현대사라고 할 만큼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다. 응오딘지엠에 대한 아무런 지식 없이 사이공을 여행하는 건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사이공 1번지' 통일궁을 찾는 이라면 입장권을 끊는 일만큼이나 당연한 일이다.

잠시 그의 일생을 개략해본다. 베트남 명문가 출신으로, 프랑스 유학 후 돌아와 20대 중반에 식민지 군대의 대장으로 복무했으며,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반발해 직을 그만둔 뒤 베트남 마지막 봉건왕조의 내무 대신으로 발탁되는 기회를 잡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왕정복고와 공산주의 운동에 반대하고, 독립을 위해 민족주의 운동에 잠시 가담하기도 한다.


호치민 시티 시박물관 과거 총독부 건물로, 응오딘지엠의 비밀 은신처로 쓰였다.

호치민 시티 시박물관 과거 총독부 건물로, 응오딘지엠의 비밀 은신처로 쓰였다. ⓒ 서부원


해방과 분단 뒤 호치민이 이끄는 북베트남 정부 수립에 참여할 것을 권유 받았으나 거절하고 곧장 미국 망명을 결행한다. 이후 냉전의 갈등 속에 미국의 절대적인 지지에 힘입어 선거를 통해 남베트남의 권력을 거머쥐게 된다. 지주, 자본가와 손잡고 철저한 친미 반공주의와 노골적인 가톨릭 우대 정책을 통해 12년여 동안 독재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반대파 암살 등 폭정과 토지정책의 실패로 민심이 돌아섰고, 틱꽝득 스님의 분신 등 차별에 시달린 불교도들의 결사적인 저항이 이어졌다. 국제적인 여론도 싸늘해졌고, 그를 반공의 보루로 여기던 미국도 더 이상 지원할 명분을 잃었다. 결국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부하들에 의해 권좌에서 내쫓겼으며 길거리에서 피살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권력에 대한 탐욕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 명문가의 자제로 민족반역자에서 봉건왕조의 벼슬아치로, 독립운동가에서 다시 제국주의의 하수인으로 옷을 수시로 갈아입으며 끝내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에게 반공이란 오로지 권력을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었고, 가톨릭이라는 종교조차 권력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과연 그에게 베트남의 독립은 절실하긴 했던 것일까.

그런 그에게 우리는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건국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그것도 6.25 전쟁으로 온 국토가 폐허가 된, 휴전 직후인 1953년 9월의 일이었다. 그의 삶이 그다지 낯설지 않은 건 나만의 느낌일까. 그의 이름 대신 우리나라의 '다른' 이름을 넣어도 별로 어색하지 않다. 굳이 다르다면, 베트남과 우리가 겪은 현대사의 차이만큼만 다를 뿐이다.

통일궁은 응오딘지엠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곳이다. 현재의 건물은 그가 피살된 이듬해 다시 세워진 것이지만, 내부는 그가 살던 당시 그대로 복원해 두었다. 외양만 보고 그저 밋밋한 콘크리트 건물이라 우습게 봤다간 큰 코 다친다. 거대한 양탄자 깔린 로비와 집무실, 침실, 접견실 등에 놓인 화려한 장식들을 둘러보노라면 여느 황제가 살던 궁궐 못지않다.

프랑스 식민 지배 시절 총독의 관저로 처음 지어졌다가, 분단 뒤 남베트남 대통령의 집무실로 쓰이게 되면서 '대통령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개명된 뒤 응오딘지엠이 첫 번째 주인인 셈이다. 건물의 운명 또한 주인의 삶을 닮아선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재임 말기인 1962년에는 전투기를 동원한 군사 쿠데타까지 일어나 폭격으로 건물의 절반이 붕괴되기까지 했다.

중앙 우체국 내부 모습 북베트남군의 주요 타격 대상이었던 곳으로, 지금까지 우체국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몰려드는 관광객 뒤로 호치민 주석의 사진이 눈길을 끈다.

중앙 우체국 내부 모습 북베트남군의 주요 타격 대상이었던 곳으로, 지금까지 우체국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몰려드는 관광객 뒤로 호치민 주석의 사진이 눈길을 끈다. ⓒ 서부원


다행히도 화는 면했지만, 그 사건 직후 그는 집무실이자 거주 공간이었던 대통령궁을 군사 요새로 만들기 시작했다. 건물 지하에 대규모 벙커를 조성한 것이다. 흐릿한 조명에 콘크리트 터널을 미로처럼 뚫어놓았는데, 군사 시설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피신할 수 있도록 침실과 주방 시설까지 갖춰놓았다. 건물 지하에 이런 곳이 있으리라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럼에도 암살 시도는 끊이지 않았고, 불과 3년 뒤 다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그는 요새화한 대통령궁을 보지 못한 채 권좌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후 1975년 북베트남군에 의해 함락될 때까지 10년 동안 주인이 아홉 차례나 바뀌는 등 수난을 거듭했고, 통일궁으로 다시 이름이 바뀌어 베트남 통일의 상징적 공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실, 통일궁의 가장 큰 볼거리는 건물 안에 있지 않다. 함락 당시 대통령궁 철문을 부수고 들어온 북베트남 탱크와 건물의 맨 꼭대기에 전시된 미군 헬기는 그때의 긴박했던 상황을 보여주는 핵심 유물이다. 탱크가 들이닥치는 순간 헬기를 타고 마지막 남은 미군이 도주하는 장면을 떠올려보는 것이야말로 통일궁 관람의 백미다. 입구에 전시된 두 대의 탱크는 새뜻하게 도색만 했을 뿐 당시의 것이라고 한다.

통일궁 옥상에 전시된 미군 헬기 사이공 함락 당시 마지막 남은 미군을 태우고 퇴각했던 긴박했던 상황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통일궁 옥상에 전시된 미군 헬기 사이공 함락 당시 마지막 남은 미군을 태우고 퇴각했던 긴박했던 상황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 서부원


헬기에서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전쟁에서 패한 뒤 지도자가 옥상에 대기하고 있는 헬기를 타고 도주하는 장면은 전쟁 영화마다 상투적으로 등장한다. 불과 40년 전 이곳 통일궁에서 실제 벌어진 역사가 그 장면들의 모티프가 되지 않았을까. 영화 속 드라마틱한 그 장면이 부패한 독재 권력의 말로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하면 한편으론 씁쓸하기도 하다.

베트남 길마다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

차이나타운의 짜땀 천주당 군사 쿠데타로 응오딘지엠이 쫓겨난 후 도망쳐 몸을 의탁한 곳으로, 이곳에서 붙잡혀 호송 도중 길거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차이나타운의 짜땀 천주당 군사 쿠데타로 응오딘지엠이 쫓겨난 후 도망쳐 몸을 의탁한 곳으로, 이곳에서 붙잡혀 호송 도중 길거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 서부원


통일궁을 나오면 방향만 서로 다를 뿐 걸어서 5분 거리에 노트르담 성당과 시박물관이 서 있다. 노트르담 성당은 프랑스 식민 지배시기에 세워진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로, 독실한 신자이기도 했던 응오딘지엠의 가장 큰 지지기반인 가톨릭 세력의 탯자리(태어난 곳)다. 군사 쿠데타로 쫓겨났을 때 그가 도망쳐 몸을 의탁했던 곳 역시 차이나타운에 자리한 짜땀 천주당이었다.

노트르담 성당 바로 옆에 있는 또 다른 콜로니얼 건물은 중앙 우체국이다. 파리의 에펠탑을 설계한 구스타프 에펠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이곳은 남베트남 전역을 잇는 통신 기지로 역할을 수행했다. 통일궁과 함께 북베트남군의 주요 타격 대상이었던 셈이다. 다행히 큰 피해 없이 살아남아 지금도 우체국으로 쓰이며, 은행 기능과 함께 기념품 가게까지 겸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시박물관도 응오딘지엠과의 인연이 각별하다. 본디 프랑스 식민 지배시기 총독부로 쓰였던 건물로, 총독 관저였던 통일궁과 바로 이웃해 있다. 분단 뒤 남베트남 정부가 들어서면서 초대 대통령이 된 그의 비밀 은신처로 쓰였는데, 1962년 통일궁이 전투기 폭격으로 반파돼 재건될 당시 이곳에 마련된 지하 벙커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베트남 도시의 길 이름에는 죄다 역사적 인물이 등장한다. 길 이름만 알아도 베트남의 역사를 대충 꿸 수 있다고 말할 정도다. 하이바쯩이나 쩐흥따오처럼 천 년도 더 지난 오래된 인물도 있지만, 초대 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레주언처럼 최근 인물도 두루 사용된다. 물론, 부패한 독재자의 이름이 가당키나 하냐고 반문하겠지만, 이렇게 제안해보고 싶었다. 응오딘지엠을 빼놓고 사이공을 설명할 수 없다면, 반면교사 삼아 길 이름으로 내걸 수 있지 않겠느냐고.

○ 편집ㅣ최은경 기자

#가족여행기 #베트남 #말레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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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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