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에 문 여는, 이상한 헌책방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나만의 아지트를 소개합니다

등록 2015.08.24 09:43수정 2015.08.24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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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으로 가는 2층 나무계단, 다락방에 올라가는 것 같다. ⓒ 김종성


이사를 할 때 몇 가지 나만의 기준이 있다. 먼저 동네 인근에 자전거 타고 달릴 수 있는 하천이나 강변이 있어야 한다. 물가는 한여름에도 덜 덥게 해주고, 강변길 따라 바람을 가르며 페달을 돌리면 흡사 마니차(불경을 새겨 넣고 돌릴 수 있게 만든 티베트의 둥근 통)를 돌리듯 마음이 정화된다.

두 번째로 공공 도서관이 가까이에 있으면 좋겠다. 책도 좋지만 간행물실에 있는 다양한 잡지들이 좋아서다. <여행 스케치>, <월간 사진>, <내셔널지오그래픽>, <문학동네>, <자전거 생활> 등의 잡지들은 삶의 중요한 즐거움인 취미를 '깊게' 해준다.


더불어 동네에 작은 책방이 있다면 금상첨화다. 내가 좋아하는 취향을 알고 있는 책방 지기와 책 이야기, 작가 이야기, 일상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곳. 대형 서점은 물론 공공 도서관을 아무리 오래 다녀도 불가능한 일이 벌어지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점점 나만의 아지트가 되는 책방이 숨겨진 보석처럼 동네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다. 이름도 독특한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서울 은평구 녹번동)'이다.

나만의 아지트가 된 헌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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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 어울리는 멋스런 소품들이 많다. ⓒ 김종성


타고 간 자전거를 길가에 묶어 두고 책방 문을 열면 2층으로 올라가는 좁은 나무 계단이 나온다. 이 책방의 매력 포인트 가운데 하나다. 두 사람이 마주치게 되면 한 사람이 살짝 비켜서야 할 정도로 '알맞게' 좁다.

벽 한쪽으로 책과 액자, 헌책방과 어울리는 소품이 놓여 있다. 저 위엔 뭐가 있을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다운 입구였다. 삐걱거리는 소리마저 '빈티지'한 멋스러움으로 다가오는 나무 계단은 어릴적 집에 있었던 다락방에 올라가는 듯 새롭고 새삼스럽다.

왠지 무심한 표정을 한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맞아줄 것 같은 헌책방의 첫 인상은, 우리가 알고 있었던 하지만 이젠 잊어버린 책방의 정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은은한 재즈 음악과 함께 안경을 쓴 호리호리하고 흰 얼굴의 젊은 책방 지기가 단골 손님으로 보이는 분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올해 마흔 살이라는 책방 주인장, 햇볕도 안 쬐고 책 속에 파묻혀 살다 보니 나이 먹는 걸 깜박했나 보다. 끈으로 묶여 쌓여 있는 헌책 더미, 천장까지 빼곡하게 들어찬 책장, 구석구석 쭈그리고 앉아서 책을 찾는 사람들... 흔한 헌책방의 풍경을 이곳에선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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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이 읽은 책이 대부분이라 책에 대해 물어보기도 좋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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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지기는 6권의 책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 김종성


큰 탁자와 소파 등 편히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많은 게 제일 인상적이었다. 깔끔한 분위기에 저렴한 가격의 음료도 팔고 있어 아주 살짝 북카페 느낌도 났다. 책은 분야별로 서고에 단정히 꽂혀 있는데 재미있게도 책방 지기가 읽은 책들이 대부분이다. 해외 문학책이 많은 걸 보니 주인장의 취향을 알 수 있었다.

주인장 마음대로 갖춘 책들이지만, 좋은 책인지 읽을 만한 책인지, 다른 사람에게 권할 수 있는 책인지... 그런 기준으로 책꽂이를 채운단다. 학습 참고서나 자기 계발서 같은 책들은 안 보인다. 점점 대형 서점들과 자본이 만들어낸 베스트셀러만 읽게 되는 현실 속에서 그가 서고에 채운 책들은 무척 참신하게 다가왔다.

책방 지기 덕택에 서른아홉 살에 자살했다는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1909-1948)'를 알게 되었고, 요즘 그의 작품 가운데 하나인 <인간실격>을 읽고 있다. 특히 주인장은 책방 이름을 따오게 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865년 영국, 루이스 캐럴)>의 20년 된 마니아로 동화, 만화, 그림, 퍼즐, 레코드 판, 타로 카드 등을 책방에 전시까지 해놓고 있다. 물론 판매용이 아니다.

의외로 만화책이 별로 없어 물어 보았더니 본인이 만화책을 잘 읽지 않는단다. 책 속에 그림과 글자가 함께 들어있어 집중이 잘 안되 진도가 안 나간다고. 말로만 듣던 활자 중독자인가 보다. 책 속에 파묻혀 사는 사람에 걸맞게 주인장은 6권의 책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내가 사랑한 첫 문장>이 6번째 책으로, 책으로 책을 이야기하는 에세이다. 요상한 책방 이름답게 헌책방이라고만 부르기 아깝다. 책읽기 소모임, 전시회, 인디 음악 공연에 얼마 전엔 도시의 자전거 관련 영화도 상영했다. 관람료는 헌책 구입으로 대신한다.

책을 만나러 가는 동네 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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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덕후 쥔장이 전시해 놓은 작품들. ⓒ 김종성


책은 보고, 읽고, 느끼는 것이다. 책은 그것을 만나는 사람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수도 있는 무한한 힘을 지닌 생명체다. 이 책들을 눅눅한 습기가 들어찬 창고 안에 처박아 두어선 안 된다. 사과 박스에 담거나 나일론 끈으로 꽁꽁 묶어 두어도 안 된다. 책이 세상 밖으로 나와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숨 쉬게 해야 한다. 갇혀 있던 책이 먼지를 털고, 누렇게 탈색된 책날개를 펼치고 덩실덩실 춤추게 해야 한다. - 책방 주인장의 책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가운데

지난 2007년 생겨났다는 책방의 운영 시간도 독특하다. 일요일, 화요일이 휴무고 오후 3시부터 11시까지 운영한다.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 보면 오후 3시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는 주인장. 그가 말하길 오후 3시는 과거 유럽의 많은 작가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었단다. 유명한 작가 알베르 카뮈처럼 직장을 다니며 글을 썼던 많은 작가가 퇴근 후 집필을 했던 시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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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버린 동네 책방의 정경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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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적으로 독서 소모임, 영화나 인디공연 등을 열고 있는 책방. ⓒ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비극적인 전쟁과 쿠데타, 독재, 학살의 현대사를 겪었음에도 한국이 노벨 문학상 혹은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는 작가가 많이 나오지 못한 원인을 문득 깨달았다. 입시 경쟁과 야근이 일상이 된 바람에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글을 끄적이는 여유가 없는 사회 기반이어서지 싶다. 

뭐니뭐니해도 헌책방의 가장 큰 매력은 마음에 드는 책, 소장하며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을 발견하는 기쁨이다. 이날도 <처용이 있는 풍경>이라는 사진집을 5천 원에 '득템'했다. 같은 책이지만 대형 서점이나 온라인 서점에서 구입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헌책이지만 고르고 고르다 발견한 책이어선지 소중하게 책장을 넘기게 된다.

문화체육관광부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인 10명 중 3명이 1년에 책을 1권도 읽지 않는단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맘 편히 갈 수 있는, 어떤 책을 사러 갈까 보다는 어떤 책을 만날까 궁금한 마음에 들르는 동네 책방이 사라지고 만 것도 한 가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책을 만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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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 좋은 헌책방 분위기. ⓒ 김종성



○ 편집ㅣ조혜지 기자

덧붙이는 글 ㅇ 지난 8월 17일에 다녀왔습니다.
ㅇ 오는 길 : 수도권 전철 6호선 역촌역에서 걸어서 5분.
ㅇ 책방 누리집 : http://www.2sangbook.com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헌책방 #이상북 #윤성근 #동네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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