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을 넘은 이자성의 민란을 재평가 하라

[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21] 명나라 멸망과 이자성의 민란 ②

등록 2015.11.02 14:20수정 2015.11.02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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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말기 섬서 북쪽 황토고원에서 살던 농민들이 대거 민란에 참여했으며 그중에서는 회족도 많았다. 사진은 섬서 서안에 있는 회족사원 청진사. ⓒ 최종명


1632년 8월 고영상은 전군의 사기를 결집해 다시 산서 지역으로 진격했다. 토벌군도 분주(汾州, 현 분양汾阳)를 거점으로 두 갈래로 나누어 협공해 단번에 소탕하려고 공격해 왔으나 민란군도 세 갈래로 나누어 토벌군을 막았다. 1633년 초 고영상은 관군을 돌파해 호북을 거쳐 사천으로 방향을 틀어 기주(夔州, 현 봉절奉节)를 공격해 여걸 맹장인 진양옥(秦良玉)을 압박했다.

1634년에는 토벌군의 수군과 육군이 합동으로 사면에서 공격해오자 포위망을 뚫고 나와 섬서 흥안(兴安, 현 안강安康)의 협곡으로 후퇴했다. 마침 두 달이나 폭우가 쏟아져 말들은 넘어져 죽고 활도 소진된 상태에서 이자성의 책사 고은군(顾君恩)이 짜낸 허위 투항 계책이 성공해 잔도를 따라 포위망을 뚫고 관중 평지로 후퇴할 수 있었다.

1635년 초 고영상은 토벌군 대장 홍승주가 이끄는 대부대가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13개 민란집단의 72개 군영의 수령을 하남 형양(荥阳)에서 공동대책회의를 소집했다. 고영상을 비롯 13명의 수장들이 모여 열세 상황을 극복할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회족 출신으로 노회회(老回回)로 불린 마수응(马守应)은 북쪽 방향으로 황하를 건너 산서로 진격하자는 의견을 주장하자 장헌충이 반대해 논쟁이 끝나지 않았다. 이때 13개 수령에 끼지 않고 틈왕의 부하이던 이자성이 분병정향(分兵定向)이라는 새로운 작전계획을 제시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창조적인 작전계획으로 역사에 등장하다

<명사>가 기록한 이자성의 작전은 군사를 다섯으로 나누어 넷은 동 서 남 북으로 출격하고 부대 하나는 각 방향의 상황에 따라 지원 부대의 성격을 가지고 연합작전을 수행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매우 창의적인 계획인데다가  '장부 한 명이 남아도 분발할진대 하물며 10만 군사나 있다.'고 호기를 발휘하기도 했다. 게다가 주력 부대는 토벌군의 가장 취약한 방향인 동쪽으로 진군해 돌파할 것도 제시했다. 주력 부대는 당연히 이자성이 포함돼 있었으며 이로부터 민란 연합군 내에서 그의 위상이 격상됐다.

형양 회의 후 고영상, 이자성, 장헌충이 인솔하는 민란 주력은 하남을 거쳐 안휘로 진군해 개국황제 주원장의 고향이자 명나라의 국도(国都)로 일컬어지는 봉양(凤阳)을 점령했다. 황릉으로 만든 조상의 무덤을 도굴해 파헤쳐 훼손해 버렸으며 사당을 지키던 주씨 집안 사람을 몰살시켰다. 주원장이 출가했던 황각사(皇觉寺)를 전소시켰을 뿐 아니라 관청을 점령해 관군들을 참수했으며 백여 명의 죄수를 석방했다. 명 숭정제는 소식을 듣고 대경실색했으며 소복을 입고 사당에서 통곡했는데 선조의 근원이 파괴되자 곧 자신의 운명에 암운이 몰려온다는 것을 알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봉양 사건 이후 관군의 치열한 토벌로 인해 민란군도 고전을 당해 섬서로 후퇴했다. 고영상의 주력은 나여재의 부대 등과 다시 합친 후 장안(长安, 현 서안西安)을 공격했는데 홍승주와 조문조 장군이 이끄는 관군이 사수하자 감숙 평량(平凉)으로 진군했다. 곧바로 다시 장안을 도모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장헌충 부대와 합군해 관중에서 홍수주 관군과 대치했다가 열세에 몰리자 다시 13개 군영으로 분할해 동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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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상은 역사상 통과가 불가능했던 진령산맥 자오곡을 지나려다가 대패했다. 이 전투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자성은 훗날을 도모했다. 사진은 진령산맥 남쪽 따오기의 고향 양현의 한 계곡. ⓒ 최종명


1636년 고영상과 이자성은 부대를 이끌고 안휘 북부를 공략했고 다시 토벌군과 쫓고 쫓기는 혈전을 벌렸다. 호남과 광서를 거쳐 근거지로서 가치가 보장된 장안을 향해 또다시 진격하기 위해 주실(盩厔, 현 주지周至)의 자오곡(子午谷)에 이르렀다. <삼국지(三国志)> '위연전(魏延传)'에 따르면 삼국시대 촉나라 장수 위연이 선봉으로 자오곡을 통과해 장안을 점령하겠다는 계책을 제갈량에게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한 천혜의 협곡이다. 300km에 이르는 기나긴 험로로 진령(秦岭)을 넘어가는 6곳의 길 중에서 자오고도(子午古道)를 몰래 통과하려 했던 책사의 전략은 역사 상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진령 협곡 자오곡을 몰래 건너 장안을 도모하려 했던 고영상과 이자성은 수 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7월의 폭우를 맞으며 험준하고 협소한 도로를 따라 진군했다. 겨우 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군사와 군마가 지쳐나갔으며 물자의 손실은 엄중했다. 자오곡 내 흑수욕(黑水峪)에 도착하자 불행하게도 민란군의 의도를 간파하고 10여 일을 매복하고 있던 명나라 장군 손전정(孙传庭)이 이끄는 2만 명의 관군과 조우해 4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야 말았다. 결국 민란군은 대패했으며 고영상은 체포된 후 북경으로 압송돼 능지처참을 당했으며 이자성은 천우신조로 살아남아 훗날을 기약했다.

이자성을 다시 평가하자

절개를 지켜 죽을지언정 비굴하게 살고 싶지 않다. (宁为玉碎,不为瓦全)

당나라 사학자이자 시인 이백약(李百药)이 저술한 <북제서(北齐书)> '원경안전(元景安传)'에 나오는 옥과 기와로 비유한 여덟 글자가 비장하다. 정의롭게 살다가 희생되더라도 구차하게 살며 절개를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말로 '절개'와 '비굴' 사이에서 목숨을 선택할 만큼 정의를 위해 당당하게 사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이 고사성어는 이자성과 관련된 정사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으며 <명사>를 비롯 그 어떤 역사 책에도 대규모 민란을 조직해 항쟁하고 수도까지 점령했던 민란군에 대한 표현으로는 적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 말은 소설 <이자성>에서 그의 조카로 최초의 민란 영수 왕가윤을 암살한 배신자를 체포 후 즉결 심판한 이과가 소설 속에서 내뱉은 말이다.

1910년 하남 등주(邓州)에서 태어난 소설가 요설근(姚雪垠)은 명나라 말기 민란의 영수 이자성을 재평가해 방대하고도 신선한 필체로 농민혁명전쟁의 웅장하고 감동적인 내용으로 담아냈다. 1957년 당시 정치적으로 극우분자로 낙인 찍혀 곤경에 처한 상황에서 집필을 시작해 30년 동안 모두 5권 230만 자에 이르는 장편역사소설 <이자성>을 창조해냈다. 일본어, 영어, 프랑스어로 번역돼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소설 <이자성> 제1권 12장에 '절개를 지켜 비굴하게 살지 않겠다.'는 이자성의 혈기가 정사가 아닌 소설가의 언급으로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예부터 황토고원의 기름진 쌀 농사로 인해 미인이 많고 건장한 남자도 자주 나온다는 섬서 미지(米脂) 출신으로 어릴 때는 양치기 생활을 했으며 역참에서 말 돌보는 일을 했는데 명 조정이 재정난을 극복하려고 역참을 없애자 졸지에 직업을 잃었다. 이후 군인이 된 이자성은 변방 부대에서 근무했는데 군량의 부족으로 보급이 되지 않자 불만을 품고 병란을 일으켰다. 처음에 왕좌개에게 의탁했으며 그가 투항하자 장존맹을 찾아갔으나 그 역시 전투에서 패배 후 항복하자 고영상을 보좌했으며 자오곡 전투에서 고영상이 목숨을 잃자 가까스로 살아남아 틈왕을 승계한 후 사천, 감숙, 섬서 일대에서 지속적으로 항쟁을 이어갔다.

1637년 병부상서 양사창(杨嗣昌)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각개격파 섬멸 작전으로 민란군을 공략해오자 나여재와 장헌충의 연합 부대가 패배했다. 나여재는 허위 투항하고 장헌충은 부상을 입어 세력이 크게 위축됐으며 이자성도 한중(汉中)에서 매복에 걸려 사천으로 급히 후퇴했다가 섬서 동관(潼关)으로 이동했다. 이자성의 동선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홍승주와 손전정의 3중 매복에 빠져 민란군이 거의 전멸을 당했으며 처자식을 모두 잃고 18명만이 포위망을 뚫고 살아남아 진령산맥 동남쪽 상락(商洛)의 상락산에 깊이 은거했다. 낮에는 사냥하고 밤에는 독서를 하며 '서한의 패공 유방도 백전백패 끝에 천하를 얻었다.'고 병사들 사기를 유지하며 명나라를 전복시킬 의지를 불 태우며 와신상담했다.

1639년 다시 중원 땅에 가뭄 재해가 덮쳐 암울한 상황이 도래했으며 마침 동북의 만주군이 공격해오자 명 조정도 홍승주와 손전정의 관군을 산해관으로 이동시키자 중원에 공백이 발생한 틈을 타 장헌충이 호북 곡성(谷城, 현 양양襄阳)에서 다시 봉기하자 나여재도 부대를 이끌고 합류했으며 이자성도 진용을 갖추고 중정기고(重整旗鼓)한 후 하남으로 진입해 중원 땅에 웅웅연소(熊熊燃烧)의 기세로 민란의 봉화를 다시 불살랐다.

1640년 이자성 하남을 공략할 때 기아에 허덕이던 수 많은 농민들이 민란군에 참가했는데 특히 기현(杞县)에서 문무를 겸비한 천재 이암(李岩)과 우금성(牛金星)을 비롯 향시에 급제했으나 사회 비판의식이 컸던 거인(举人)들도 상당히 동참했다. 청나라 초기 사학자인 계육기(计六奇)가 편찬한 <명계북략(明季北略)>에 따르면 이자성은 이암을 처음 만나 '영웅의 책략을 지녔으며 함께 의거를 도모해 창업을 개척할 인물'이라며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기뻐했다. 이자성이 장헌충을 비롯해 이전의 민란 지도자와 달리 큰 뜻을 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하겠다.

이자성은 이암이 제안한 균전면부(均田免赋)의 입장을 받아들여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고 세금을 면제한다는 혁명적인 정책은 지주계급의 이익을 탈취해 농민에게 되돌려 주는 구호였다. 당시 장헌충이 사천에서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리고 있는 와중에 하남 등 중원 일대의 백성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았으며 '틈왕을 환영하면 세금을 바치지 않는다.'는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다. 낙양을 점령해 황족인 주상순(朱常洵)을 살해한 후 시체를 화로에 끓고 있는 사슴고기와 함께 천 여명의 병사들과 나누어 먹었다는 복록연(福禄宴)을 벌려 명 왕조의 종말을 기원하기도 했다.

1643년 1월 이자성은 상양에서 신순왕(新顺王)을 자칭하고 우금성의 '형벌을 줄이고 백성을 구휼하고 인심을 얻으라'는 정책도 받아들였으며 유랑 농민들에게 소와 종자를 배급해 축산과 농업의 기회를 제공하는 등 민생 정책을 펼쳤다. 장헌충이 호북 무창에서 대서(大西) 정권을 설립하자 이자성도 섬서 대부분을 장악한 후 1644년 1월 장안에서 대순(大顺)을 건국하고 연호를 영창(永昌)으로 선포한 후 황제에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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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과 지혜를 겸비한 이자성의 민란군은 민중의 지지를 얻어 북경 외곽 거융관 장성을 넘어 고궁을 점령하자 명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사진은 거용관 장성의 모습. ⓒ 최종명


곧 군사를 총 동원해 북경을 향해 동진해 황하를 건너 하남, 산서를 거쳐 태원을 점령했으며 파죽지세로 대동을 거쳐 연이어 북경의 서북부 관문인 거용관(居庸关)과 창평(昌平)을 돌파하니 수도 인근의 태수와 대학사가 연달아 투항했다. 북경 9대문 중 하나인 서북쪽 서직문(西直门)에서 대포 공격을 감행했으며 태감이 열어준 외성 서쪽 광녕문(广宁门)을 통해 복흥문(复兴门)으로 들어섰다. 이때 창평에서 투항한 태감을 보내 서북 일대를 분할해 분봉 왕으로 봉해 줄 것을 요구했는데 황제는 거부했다. 1644년 4월 25일 이자성은 드디어 자금성 내전으로 들어섰으며 숭정제는 건청궁(乾清宫)으로 도주해 경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1368년 주원장이 세운 한족 정권 명나라의 흔적도 역사에서 사라지게 됐다.

명나라는 멸망했지만 산해관(山海关)을 지키던 요동 총사령관 오삼계(吴三桂)가 청나라 군대와 연합해 북경으로 진격하자 이자성은 돌연 3만여 명을 동원해 황제 즉위식을 한 후 점령한 지 40여 일만에 북경을 버리고 후퇴했다. 이자성은 장안으로 후퇴한 후 다시 전투를 피하며 도주하기 바빴는데 호북과 강서에서도 패배한 후 명나라 잔존 세력과 연합해 청나라 군대에 대항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호북 통성(通城, 현 통산通山) 동남부에 있는 구궁산(九宫山)에서 명나라에 충성했던 지방 민병에게 살해됐다고 전해진다. 이자성이 살해되자 분노한 농민들이 구공산 지역을 소탕하는 보복공격을 감행하기도 했으며 민란군은 셋째 동생 이자경(李自敬)을 옹립해 항쟁을 이어갔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이자성을 살해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어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은데 스스로 목을 메고 자살했다, 전투 중에 전사했다, 다른 사람으로 오인해 그의 죽음을 본 촌민들의 주장이 잘못됐다, 사원이나 다른 마을에 은닉해 숨어 살았다는 설이 정사, 지방지, 족보 등에 제각각 난무하고 있다.

어떻게 죽었는지 중요할 지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지금도 호북 통산 현에 구공산을 끼고 틈왕진(闯王镇)이 있고 산 서쪽에는 이자성묘원과 틈왕릉이 조성돼 있다. 300여 년 동안 돌 무덤에 싸여 잡초가 무성했던 무덤은 1979년에 틈왕릉으로 거듭 났으며 평소에 이자성을 재평가해야 할 인물이라고 강조한 20세기 중국 최고의 문학가 곽말약(郭沫若)의 친필을 따서 대리석 묘비에 '이자성지묘(李自成之墓)'를 새겼다.

묘비 왼쪽에는 당시 성 서기이자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한 왕임중(王任重)이 '이자성은 농민혁명의 위대한 영수'라는 글귀도 새겨져 있다. 황궁에나 사용하는 류리와(琉璃瓦)를 지붕에 올린 이자성기념관(李自成纪念馆)의 편액 글자는 당대 최고의 작가이자 평론가인 모순(茅盾)의 필체를 가져왔다.

곽말약은 신중국 수립 직전 1944년 3월 19일, 이자성의 농민 민란 300주년을 기념해 당시 중경에 있던 <신화일보(新华日报)>를 통해 <갑신삼백년제(甲申三百年祭)>를 4일간 연재했다. 명나라 말기의 부패가 민란을 초래했으며 이자성 민란군의 성장과정을 살피며 특별히 이암의 경제 개혁을 고증했다. 북경 점령 후 이암의 주장을 듣지 않고 승리에 도취돼 스스로 부패하고 종파싸움으로 번져 결국 실패했다는 요지의 기고였다.

물론 당시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의 반농민적인 토지정책 등을 비판하는 칼날로 '이자성'을 제배(祭拜)해 국민당 정부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하지만 곽말약의 발표는 기존 학계가 도적이나 배신의 관점에서 기록된 정사에 입각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던 이자성 민란의 혁명정신을 연구하는 토대가 됐다. 절개의 인물로 그려내고 싶었던 요설근도 곽말약의 기고를 탐닉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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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의 민란으로 명나라가 망하자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는 만주족과 연합해 북경을 공격한다. 사진은 산해관 앞바다이자 명나라 만리장성의 동쪽 끝 노룡두를 지키는 주둔군 관청. ⓒ 최종명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13억과의대화 www.youyue.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민란 #이자성 #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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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를 통해 중국전문기자및 작가로 활동하며 중국 역사문화, 한류 및 중국대중문화 등 취재. 블로그 <13억과의 대화> 운영, 중국문화 입문서 『13억 인과의 대화』 (2014.7), 중국민중의 항쟁기록 『민,란』 (2015.11)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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