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보리밭

사회고발소설

등록 2015.11.16 11:59수정 2015.11.16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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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정자는 오늘도 학교 수업을 끝내고 냇둑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집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걸음이 더기만 했다. 산들거리는 봄바람에 좀 전까지 우울하던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밭고랑에는 봄 가뭄을 이기고 보리가 파랗게 자라고 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박정자는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다른 사람들은 다 고향을 떠난다 해도 자기는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서 오래오래 살리라고 결심했다. 숲속에 참새가 시샘이라도 하는 듯 짹짹하고 노래를 불렀다. 박정자도 지지 않으려는 듯 더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박정자의 노래 소리는 개울을 건너 산골짜기까지 우렁우렁 퍼져나갔다. 어느 새 별들이 냇물에 내려와 목욕하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불현듯 아버지가 그리워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삼 개월이 되었다. 박정자는 집에 도착해 무심코 방문을 열었다. 혼자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어머니가 옆집 송달호 아저씨와 함께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얼굴이 붉어졌다. 혼자 살고 있는 송달호 아저씨가 왜 어머니와 함께 한방에 있는지 기분이 나빴다. 박정자가 떨떠름한 얼굴을 하자 어머니는 박정자가 학교에서 일찍 오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화를 벌컥 냈다.

"넌 사람 간 떨어지게 인기척도 못하냐? 오늘은 어째서 학교에서 공부도 하지 않고 일찍 온 거야?"
그러자 박정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일찍 오지 않는다고 야단 칠 때는 언제고...."
"시방 어미에게 대들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여러 소리하지 말고 나가 놀다 와라."
"어머니."
"시키는 대로 해라."

박정자는 어쩔 수 없이 집을 나왔다. 박정자는 송달호 아저씨에 대한 나쁜 소문을 잠시 떠올렸다. 일 년 전 송달호 아저씨는 집을 나와 쑥고개 솔다방 민 마담과 동거한다는 소문이 마을에 파다하게 퍼지더니 어느 날 두 사람은 대판 싸움을 한 후 헤어졌다는 것이다. 돈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송달호 아저씨가 이번에는 무슨 속셈으로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것인지 박정자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덕산 마을에는 한 때 이십 가구 넘게 살았지만 다 도시로 떠나고 세 집만 남아 있었다. 세 집 모두 젊은 사람들은 없고 노인들만 남아 조상의 묘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젊은 사람이 없으니 박정자는 친구도 없다. 농사지을 사람이 없으니 애써 개간한 농토가 버려졌다. 농사철이 되어도 버려진 개간한 땅에는 잡풀만 무성하게 자랐다. 덕산 마을 앞에는 큰 개울물이 흐르고 양쪽에는 미루나무가 줄을 서서 여름이면 바람이 불때마다 나뭇잎이 솨르르르 노래를 불러주었다. 박정자가 오늘은 냇둑을 따라 걸으면서도 마음이 무겁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이 세상에 아버지밖에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더니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송달호 아저씨를 집으로 끌어드린 것이다. 박정자는 그동안 가졌던 어머니에 대한 믿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아버지가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지금까지 나는 너의 아버지에게 꼼짝 못하고 살았다. 남은 인생은 나도 기 좀 펴고 살아야지."
"그럼 아버지밖에 없다던 말씀은 다 거짓이었어요?"
"그때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어떻게 달라졌는데요?"
"여자가 기 펴고 사는 세상이 돌아왔다."


박정자는 어이가 없었다. 박정자는 중학교 이학년이지만 알건 다 알고 있다. 어머니는 몸도 마음도 변했다고 생각했다. 박정자는 오늘처럼 속이 상할 때는 냇둑을 따라 걸어도 노래를 부르고 싶은 생각이 없다. 변함없이 졸졸 소리 내며 흐르는 시냇물, 여름이면 냇둑에 가득 피어 있는 달맞이꽃, 봄이면 하얗게 피어나는 버들강아지, 개구리 소리, 모래무지, 지저귀는 새들, 이 모두는 지금까지 박정자와 친한 친구들이었다. 오늘은 물소리 새소리를 들어도 외롭기만 했다. 평소 같으면 냇둑을 따라 걸으며 노래를 불렀지만 오늘은 노래 부를 기분이 아니었다.

잠시 후 앞산에 쟁반 같은 둥근 달이 떠올랐다. 박정자는 밝은 달을 보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무심코 시냇물을 들여다보던 박정자가 깜짝 놀랐다. 별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린 사이로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아버지는 박정자를 보자 예전처럼 반갑게 웃어 주었다. 순간 바람이 뒤따라와 심술을 부리듯 시냇물을 흔들어 놓았다. 아버지의 얼굴이 슬그머니 물속으로 사라졌다.

"아버지!"

박정자는 가만히 아버지를 불러보았다. 눈에 이슬방울이 달빛에 반짝거렸다. 오늘 목격한 어머니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들려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버지가 이야기를 들으면 더 슬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2
박정자 아버지는 한 때는 수 만평 땅을 소유하고 있는 덕산 마을에서도 손꼽히는 땅 부자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초등학교 동창생 민기식을 만난 후부터였다. 어느 날 어둑어둑 해가 서산에 넘어갈 무렵 민기식이 양주 한 병을 들고 나타났다.

"박달수 있는가?"
"뉘시오?"

박달수가 궁금해 문을 열어보니 민기식이 저만치 감나무 아래에서 웃고 서 있었다. 박달수는 오랜만에 만나는 얼굴인데다 정장을 하고 있어 처음에는 누군지 선뜻 알아보지 못하다가 잠시 후 민기식임을 알고 반가워했다. 읍내에 나간 후 몇 해 소식이 없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 저녁 시간에 이곳까지 찾아온 것인지 궁금했다.

"자네가 나를 다 찾고,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먼."
"이 사람아, 친구가 친구 찾아왔는데 못 올 곳에라도 왔다는 것처럼 들리네."
"그런 것이 아니라 하도 소식이 없다가 불쑥 찾아왔기에 하는 소리네. 읍내에서도 자네가 오래 전에 바람처럼 사라졌다고 하더구먼."
"허, 내가 귀신이라도 된다는 건가 바람처럼 사라지게. 오늘은 자네와 둘이서 술이나 한잔 할까 하고 찾아 왔네."
"어서 들어오시게."

민기식이 방으로 들어오더니 박달수의 아내 팽달자에게 인사를 건넨다.

"제수씨도 그 동안 별 일 없으셨지요?"
"저야 늘 그렇지요. 한동안 소식이 없어 모두 궁금해 하더니...."
"내가 고향을 놔두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오늘은 제수씨도 보고 친구도 만나고, 마침 좋은 술이 생겨서 겸사겸사 찾아왔습니다. 안주 좀 부탁드립니다."
"그러지요."

박달수는 민기식이 아내를 제수씨, 제수씨 하자 못마땅한 듯 눈을 흘겨 주었다. 제 놈이 언제부터 아내와 가깝게 지냈다고 저러나 싶어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술 한 잔 할 생각을 하니 그리 기분이 나쁜 것만 아니었다. 아내는 기분이 좋은 듯 주방으로 가더니 금세 술상을 봐왔다.

"제수씨도 앉으시지요."
"두 분이 드셔요."

박달수 아내는 술상만 봐주고 저만치 물러나 앉았다. 두 사람은 초등학교 때부터 짝꿍이어서 친한 사이었다. 민기식도 처음에는 대학을 나와 취직이 어려워지자 아버지를 따라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민기식은 처음부터 농사 일이 싫었다. 해마다 봄이면 밭에 내는 계분(닭똥)냄새가 죽기보다 더 싫었다. 민기식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기다렸다는 듯이 재빨리 농토를 모두 처분하여 읍내에 나가 장사를 시작했다.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듯 장사를 시작한지 일 년도 안 되어 돈을 몽땅 털어먹고 행방을 감추고 말았다.

그 후 민기식은 한동안 소식이 묘연했다. 몇 해 동안 읍내에서도 마을에서도 민기식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돈을 없애고 창피해 멀리 자취를 감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소식이 없던 민기식이 오늘 박달수 앞에 불쑥 나타 난 것이다. 그것도 양주 한 병을 들고 개선장군처럼 나타나자 박달수도 처음에는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재산을 몽땅 털어먹은 사람치고 얼굴이 고생한 사람같이 않았다. 술을 마시는 동안 민기식은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이지만 박달수에게 술만 권할 뿐 좀체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어지간히 취하자 박달수가 답답해서 재촉했다.

"그간 자네 어디에 있었는가."
"서울에 갔었네."
"거긴 왜?"
"왜긴 왠가. 나도 먹고 살아야지."
"그래 살 구멍은 찾은 건가?"
"그렇다네."

민기식이 술잔을 들고 건배를 하자며 잔을 부딪쳤다.

"말해 보시게, 이유 없이 날 찾아올 리 없을 테고, 무슨 일인가?"

민기식이 벙긋 웃었다.

"역시 자네는 눈치 한번 빠르구먼."
"척 보면 삼천리지, 소식도 없던 자네가 오랜만에 나타났으니 하는 소리일세."
"천천히 술이나 들며 이야기 하세. 자네에게 좋은 정보를 줄까 해서 찾아왔네."
"내게 무슨 정보?"
"우리 사이에 정보라면 돈 버는 정보지 뭐가 있겠는가,"
"허, 그려."
"그렇다네."

박달수는 궁금하지만 꾹 참고 한참 동안 술을 마시며 기다렸다. 얼마나 마셨을까, 민기식이 딸딸하게 술에 취하더니 입을 열었다. 요즘은 아무리 농사를 지어 봤자 수지가 맞지 않는 세상이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특히 농산물이 개방되어 앞으로 외국 농산물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와 농촌이 고사하게 될 거라는 말에는 건성으로 듣던 오달수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잖아도 이미 시장에는 이름도 생소한 외국산 농산물이 가득했다. 오달수가 귀를 쫑긋거리자 민기식은 더욱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아무리 땀을 흘려도 수지맞지 않는 농사는 하루 빨리 걷어치우는 것이 돈 버는 길이라며 바람을 넣었다.

"허, 사람, 농사를 짓지 말라는 이야기 같은데, 나야 농사밖에 모르는 놈인데 농토를 정리하면 뾰족한 수가 있나?"
"있다네."
"그려?"
"그러니 빨리 살길을 찾아야지.."

민기식은 돈을 벌려면 하루 빨리 다른 길을 택해야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달수는 민기식의 말이 아주 허튼 수작으로 들리지 않았다. 요즘 농촌은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다 빠져나가고 노인들만 남아 있다. 농사일을 기계가 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손이 필요한 곳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비싼 임금을 주어도 일손을 구하지 못하는 것이 요즘 농촌의 현실이다. 그러니 농번기에는 애를 태울 수밖에 없다.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있는 박달수도 이럴 때는 당장 농사일을 때려치우고 시내로 나가고 싶은 욕망이 굴뚝같이 치밀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마음을 고쳐먹곤 했는데 민기식의 이야기를 듣자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하기는 나도 하루에 몇 번 씩 농사를 때려 치고 싶으이."
"그럴 테지."
"하지만 방법을 모르니."
"딱도 하시구먼."

민기식은 충분히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맞장구를 치며 술잔을 비웠다. 박달수는 해마다 농사를 집어치우겠다고 벼르지만 지금까지 농사일을 때려 치지 못했다. 농사철만 돌아오면 언제 그런 생각을 했더냐 싶게 트랙터를 끌고 논밭으로 향했다. 그러던 박달수가 이번에는 귀가 솔깃해서 물어 보았다.

"틀림없이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있단 말인가?"
"그러니 내가 정보를 주겠다는 거 아닌가. 요즘 같은 세상에 눈만 크게 뜨면 방법은 널려 있네."
"듣자하니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읍내로 나갔다가 사기 당해 신세 망쳤다는 이야기도 많던데."
"사람을 잘못 만난 탓이지. 그렇다면 자네는 이 민기식이 사기꾼으로 보이는가. 설사 그렇다고 해도 자네같이 똑똑한 사람이 호락호락 나 같은 사기꾼에게 당할 사람인가. 어림도 없지. 나는 다만 자네가 힘든 농사를 때려 치고 직업을 바꿔보라고 권하는 것뿐일세. 선택은 자네가 하게. 이것만 분명히 알아두게. 인생은 백년도 안 된다는 사실 말일세. 어떤 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했다내. 처음부터 내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지. 죽을 때는 다 놓고 빈 몸으로 간다 이 말일세. 짧은 인생을 좀 더 멋지게 살다가 가야지, 생각을 어서 바꾸게."

은근슬쩍 민기식은 문자까지 써가며 박달수를 추켜세웠다. 하지만 박달수는 그동안 해오던 농사일을 그만 둔다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야 이제껏 땅이나 파먹던 놈일세. 뭐 아는 게 있어야 장사라도 할 것 아닌가.

하고 말하자 민기식은 박달수에게,

"그러니 머리를 써야지, 자네는 똑똑 하니까 내가 땅 짚고 헤엄치는 방법을 알려주겠네."

박달수는 힘들이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어떤 미친놈이 이렇게 힘든 농사일에 매달리겠느냐며 지금이라도 방법만 있다면 당장 때려치우겠다는 것이다.

"그럼 당장 해보세."

드디어 오달수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잘 생각했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다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교육부터 받아야 하네. 모든 일은 순서라는 게 있네, 내일 읍내로 나오시게."
"나는 공부라면 머리가 아픈 사람일세."
"자네는 그냥 앉아 있기만 하면 되네."
"그런 공부도 있다는 건가?"
"내가 선생님에게 미리 말을 잘해 놓겠다는 거지."
"그렇게 해보세."

박달수는 농사를 짓지 않고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에 다음날 당장 양복을 좍 뽑아 입고 집을 나섰다. 신혼 때 해 입었던 옷이다. 명절 때만 입는 귀한 옷인데 오늘은 그 옷을 입고 구두에 때 빼고 광내며 집을 나서자 아내는 시샘이 나는지 읍내에 여자라도 감추어 두었느냐고 따졌다. 박달수는 자기 몸을 거울에 비쳐보며,

"이 사람아, 농담도 가려서 하시게, 이제 좀 있으면 자네도 이런 시골구석에서 땅이나 파는 신세를 면하게 해 주겠네,"

하고 한껏 폼을 낸 후 거들먹거리며 읍내로 향했다. 읍내에 도착하자 민기식이 알려준 교육장으로 찾아갔다. 과연 듣던 대로 덕성빌딩 오층에 사무실이 있었다. 정장을 좍 뽑아 입은 청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손에 서류 봉투 하나씩 들고 있다. 모두 부자가 되는 교육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였다. 교육을 받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벌겋게 충혈 되었다. 금세 금맥이라도 잡은 얼굴들이었다. 박달수는 그날 교육을 받으면서 뭐가 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선생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생소한 단어뿐이었다. 며칠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내용은 머리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박달수는 수업 시간 내내 하품만 하다가 끝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교육장에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을 때 금세 떼 부자가 된 듯 흥분했다. 며칠 후 박달수는 그곳이 다단계 판매회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같이 무식한 놈도 그런 어려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일은 날고 기는 놈도 일하기 힘들다던데."

하고 박달수가 의문을 제기하자 민기식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며 자네야 말로 이 일에 적격자라고 추켜세운다.

"자네는 이 일에 탁월한 능력이 넘치는 사람일세."
"내가 그렇게 똑똑하게 보인단 말이지?"
"그렇다네, 동창이라는 게 뭔가. 이럴 때 서로 돕고 사는 것일세. 요즘은 줄만 있으면 얼마든지 출세하는 세상일세. 학연이, 지연이니 하는 것들이 다 뭔가. 백이 있어야 산다는 뜻이 아닌가."

민기식은 자기가 큰 백이라도 되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허허허 하기는 그려. 자네가 아니라면 이런 일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겠지."
"그렇게 알아주니 고맙네."

교육이 끝나자 민기식은 사무실에 근사한 책상과 회전의자 하나 내 주며 박달수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그날부터 박달수는 정장을 하고 책상 앞에 앉아 있자니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 민기식이 자네 같은 인재는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돈이 된다네, 하는 바람에 시키는 대로 하고 있자니 답답해서 가슴 속에서 천불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도 무더운 여름 내내 햇볕을 쬐며 흙과 씨름하는 것에 비하면 이런 일은 신선놀음이나 마찬가지였다. 회사원이라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정장을 번지르르하게 뽑아 입고 다니지만 하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매일 같이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서류봉투 하나 씩 들고 이쪽저쪽 우루루 몰려다니며 웅성댈 뿐 일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들은 매일 아침 사무실을 우루루 나갔다 여섯시만 되면 우루루 사무실로 돌아왔다. 박달수는 맥없이 이들을 바라보며 하품만 하고 있으려니 따분하기도 하고 다리에 쥐까지 났다. 다음날 점심때가 되자 민기식이 나타나더니 밥 먹으러 가자는 것이었다.

"오늘 나와 점심이나 같이 하세."
"그러지 머."

듣던 중 제일 반가운 소리였다. 박달수는 할 일이 없어 하품만 하던 처지에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점심도 비즈니스네."
"그럴 테지."

박달수는 교육을 받을 때 신물이 나도록 들은 말이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자네도 이제 우리 회사 사원이 다 되어 가는 구먼."
"나야 자네에 비하면 아직 멀었네."
"그거야 그렇지."

민기식은 은근히 어깨에 힘을 주며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킬킬거렸다. 이들이 찾아간 곳은 가정집 같은 음식점이었다. 방에 들어가자 잘 차려 입은 예쁜 마담이 이들을 향해 허리를 반쯤 꺾어 인사를 했다. 이들이 자리에 앉자 떡 벌어진 밥상이 들어왔다. 박달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구경하지 못한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박달수는 민기식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 매일 이런 점심을 먹는가?"

그러자 민기식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이 사람아, 이까짓 거 가지고 뭐 놀래나. 잘하면 금으로 지은 밥도 구경시켜주겠네. 그러니 자네는 내 말만 잘 들으시게. 허허허"
"그럼세."

잠시 후 한복을 잘 차려 입은 예쁜 아가씨가 나와 반찬을 한 가지씩 젓가락에 집어 입 속에 쏙쏙 넣어주니 임금님도 부럽지 않았다. 박달수는 밥 먹는 내내 입이 귀밑에 걸렸다. 오십 평생 세상을 살았지만 이렇게 째지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살을 비비고 사는 여편네도 아직 이러지 않았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곳이 있다니 자기는 우물 안에 개구리처럼 살았다는 생각이 들자 지금까지 죽어라 일만 하며 산 것이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민기식이 비죽 웃으면서,

"앞으로는 내 말을 잘 듣게."
"알겠네. 자네가 죽으라면 죽겠네."
"허허허 그렇게 까지 뭐."

그날 민기식은 지갑을 열고 오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더니 여자의 가슴에 쿡 찔러 주준다. 그러자 여자가 허리를 반이나 꺾으며 또 오라며 요염하게 웃었다. 박달수는 사무실로 돌아오는데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이런 별천지가 다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는 어떤 곳이 기다리고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하기 까지 했다. 그동안 돈만 벌었지 돈 쓰는 방법을 몰랐다. 다음날 박달수가 출근하자 민기식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여러 직원들에게 박달수를 소개시켰다.

"새로 부임하신 전무님이시니 각별하게 대해 주시기 바라네."
"네."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졌다. 박달수는 하루아침에 금나리주식회사 전무가 되었다. 박달수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리둥절했지만 감투라는 것을 처음 쓰고 보니 세상이 달라져 보였다. 모두 전무님, 전무님 하고 고개를 숙이자 박달수는 별천지에 온 기분이 들어 거드름까지 피웠다. 세상에 태어나서 죽어라 땅만 파던 몸이 이렇게 인간 대접을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래도 농사꾼의 천성은 어디로 가지 않는 모양인지 잠이 들면 눈앞에 보리가 자란 파란 밭고랑이 어른거려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은 쏟아진 물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멀리 와버렸다.

며칠 후 민기식은 박달수에게 지방 출장을 가자며 번쩍거리는 고급 승용차에 타라고 했다. 외제 승용차다. 여러 지방을 다니게 되는 출장이라며 며칠 걸릴지 모른다는 것이다. 전국에 산재한 영업점 순찰이라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 막상 이곳저곳 출장을 다녀보니 말이 영업점 순찰이지 전국으로 돌아다니며 구경이나 하고 맛 집을 찾아다니며 호화판 음식을 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것도 일인가?"

박달수가 의문이 들어 물으면 민기식은 웃으며,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구경하는 것도 일중에 하나일세."

하는 것이었다.

"허, 별난 일도 다 있구먼."

그러면서 박달수는 출장이라는 것도 별 것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다. 며칠 동안 지방을 돌며 신선놀음을 하니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가는 곳마다 선녀 같은 여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밤이면 나이트클럽에 갔다. 그곳에는 인형 같은 여자들이 수두룩했다. 외국에서 온 무희들이 날씬한 몸을 한 곳만 겨우 가린 후 너울너울 춤을 출 때는 박달수는 애간장이 녹아 저런 날씬한 여자와 하루 밤 자 봤으면 평생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박달수는 몰래 자기 살을 꼬집어 봐도 분명 꿈은 아니었다. 예쁜 아가씨들을 보자 이제 그까짓 흙냄새가 푹푹 나는 찌그러진 마누라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렇게 놀고도 돈이 생긴다는 건가?"
"그렇다네. 자네는 아무 걱정 마시게."
"정말 좋은 세상이구먼."
"돈만 있으면 여기가 천국일세."
"그렇구먼."

민기식이 이렇게 술을 푸짐하게 사더니 하루는 벙글거리며,

"자네 땅을 처분해 회사에 투자하게. 소득도 없는 땅을 많이 가져봐야 아무 소용없네. 그까짓 이자도 나오지 않는 땅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으면 뭐하는가. 재물이란 굴려야 눈덩이처럼 커지는 법일세. 잠긴 물이 썩는 다는 진리도 모르는가? 돈을 벌며 이런 곳에서 신선놀음이나 하며 한평생 멋지게 사는 거지."

하고 달콤한 이야기를 했다.

"그야 그렇지만."
"그러니 자네도 나처럼 묶여 있는 재산을 굴려보시게."
"그럴까."
"암, 그게 돈 버는 좋은 방법일세."

박달수는 민기식의 이야기를 듣자 금세 귀가 솔깃했다. 지금까지 민기식이 떵떵거리며 사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자 자기는 우물 안에 개구리였음을 발견했다. 그까짓 땅덩어리 수 만평 있어도 돈이 생기지 않으니 있으나 마나한 물건이었다. 농사를 지어도 힘만 들고 수입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런 곳에 투자하면 큰돈이 생긴다니 생각해 볼 일이었다. 이쪽 일을 잘 모른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도 하는 일이니 자기라고 왜 못하랴 하는 자신감도 생겼다. 누구는 뱃속에서 돈 버는 법을 배워가지고 나왔겠느냐며 힘들이지 않고 큰 돈 버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것 같았다. 한 번 해 볼만 한 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놀면서 돈만 생긴다면 까짓 한번 해보지 머."
"잘 생각했네."

박달수 아내는 요즘 남편이 수상하게 보였다. 읍내에 돌아다니더니 허파에 바람이라도 들었는지 집에 와서 밤낮없이 거울을 보며 실실거리거나 외출할 때는 양복을 좍 뽑아 입고 거울 앞에서 요리조리 모양을 내며 신이 났다. 신발은 파리가 앉으면 미끄러져 곤두박질 칠 정도로 윤이 나게 닦았다. 아내가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긴 모양이라고 하자 박달수는 실실 웃기만 하고 확실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좋은 일이 생긴 모양이구먼."
"자네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드시게."
"내가 남인가?"
"남자가 하는 일에 여자가 꼬치꼬치 따지지 말게, 앞으로 우리도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떵떵거리며 살 때가 올 걸세."

박달수는 꿈같은 이야기만 늘어놓자 아내는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었다.

"누울 자리보고 발을 뻗으라는 옛말이 있어. 괜히 헛꿈을 꾸지 마."
"이놈의 여편네가 재수 없게."
"땅치고 후회하는 일 하지 말라는 경고야."
"사람을 뭘로 보고."
"내가 아무리 살펴봐도 당신은 하늘이 내린 농사꾼이야. 농사꾼이 읍내에서 다른 짓하다가 쫄딱 망한 사람이 한 두 사람이야!"
"나는 그들과 다르네."
"어떻게 다른데?"
"두고 보면 알 테지."

박달수는 그날로 조상 무덤이 있는 선산先山 하나만 남겨놓고 좋은 땅을 다 처분하여 회사에 투자했다. 민기식은 처음 몇 개월은 남은 이문이라면서 꽤 많은 돈을 꼬박꼬박 박달수 통장에 입금시켰다. 회사에서 파는 물건이라는 것이 국적도 알 수 없는 화장품 몇 가지뿐이었다. 하지만 박달수는 통장으로 돈이 꼬박꼬박 들어오자 돈 버는 것이 땅 짚고 헤엄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쉽게 돈을 버는 방법이 있는데 여태 힘들게 일을 한 것이 억울하게 생각되었다.

얼마 후 민기식이 이번에는 물건을 받아야 하는데 전무님의 담보 서류가 필요하다며 집 등기와 인감을 떼 달라고 했다. 그동안의 신용으로 보아 믿을 수 있다고 판단한 박달수는 아무 의심 없이 서류를 다 해 주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집안에 난데없이 건장한 청년들이 들이닥치더니 물건마다 붉은 딱지를 붙였다. 무슨 일이냐고 오달수가 항의 하자 민기식이 몇 개월 전 집을 담보로 돈을 대출해 갔는데 기한 내 갚지 않아 압류한다는 것이다. 박달수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눈이 뒤집힌 박달수가 당장 회사에 쫓아가보니 며칠 동안 출장을 다녀온다던 민기식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행방까지 묘연했다. 사무실에 있는 집기들도 감쪽같이 사라지고 깨끗하게 정리된 상태였다.

"이런 처 죽일 놈."
"친구까지 등쳐먹다니...."

비로소 민기식에게 사기 당한 사실을 알고 땅을 쳤지만 모든 것은 엎질러진 물이다. 자기만 바보가 된 셈이다. 빚쟁이들이 벌떼처럼 몰려와 박달수에게 당신이 전무니 돈을 갚으라고 윽박질렀다.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아무리 발뺌해도 소용이 없었다. 전무가 모르면 누가 아느냐며 멱살을 잡았다. 이게 다 그놈과 짜고 친 고스톱이 아니냐며 거세게 몰아칠 때는 박달수도 미칠 지경이었다.

어떤 변명도 그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확인해보니 민기식은 그동안 유령회사를 차려놓고 박달수를 앞세워 은행 융자는 물론 많은 사람들로부터 보증금조로 돈을 긁어모아 도주했다는 것이다. 박달수도 감쪽같이 친구에게 농락당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천금 같은 땅을 한입에 홀랑 털어 넣었으니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붙잡기만 하면 갈아 마시고 싶지만 민기식은 땅속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잡히지 않았다.

박달수는 경찰서에 신고하고 연락이 올 때만 기다리고 있자니 가슴에서 열불이 치밀었다. 몇 개월 후 경찰서에서 범인을 체포했다는 연락이 와서 달려가 보니 민기식은 이미 알거지 신세였다. 박달수를 보자 미안한 기색도 없이 비실비실 웃기까지 하며 돈은 유흥비로 몽땅 날려버렸으니 자네가 하고 싶은 대로 처리하라는 것이다. 목이라도 베고 싶으면 베라고 했다.

"아, 이 사람아. 그 돈이 어떤 돈인데....."
"돈이란 돌고 도는 법일세."

여전히 입은 살아 있다.

"이 뻔뻔한 자식아! 그것도 말이라고 하는 거야!"

박달수가 화를 내도 민기식은 미안한 기색도 없이 유들유들했다. 자네도 그 돈으로 잠시나마 호화판 생활을 함께 하지 않았느냐며 오히려 큰소리치자 박달수는 미칠 것만 같았다. 박달수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엣기 고약한 인간, 자네도 사람인가?"

하고 원망했지만 민기식은 뻔뻔스럽게,

"나도 정직하게 살아보려고 무던히 노력했지. 하지만 세상이 그렇지 않더구먼. 도둑질한 놈들은 떵떵거리며 잘 살고 선량한 놈들은 깡통 차고, 이게 세상인심일세."

하는 것이었다.

"남은 똥줄이 타는 데 그걸 말이라고 해, 이 나쁜 자식아."
"나를 원망하지 말고 세상을 원망하게."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금세라도 금덩어리라도 캐 올 듯이 설쳐대더니 꼴좋게 되었다며 고소해 하는 눈치였다. 이놈의 여편네가 서방이 시궁창에 빠졌으면 건질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서 박수를 치다니, 요망한 것, 했으나 박달수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아내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홀랑 털어먹었으니 아내에게 욕을 들을 만도 했다. 박달수는 아내가 무슨 소리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결국 박달수는 울화병이 도저 술로만 살다가 나중에 뼈대만 남더니 꽃비가 내리던 날 하늘나라로 가버리고 말았다.

3

송달호는 박정자 어머니와 동거를 하면서 시간이 가자 슬슬 본색을 나타냈다. 술만 마시면 박정자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돈이 있으면 다 내 놓으라고 윽박질렀다. 박정자 어머니가 시달리다 못해 돈을 주면 몽땅 유흥비로 날려버리고 또 돈을 요구하기를 반복했다. 송달호는 무슨 도술을 부리는지 박정자 어머니는 고양이 앞에 쥐처럼 꼼짝하지 못한다. 송달호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했다. 집안은 점점 지옥으로 변했다. 하루는 박정자 어머니가 박정자를 방으로 불러들이더니,

"아버지라고 불러라."

하고 강요까지 했다. 박정자는 어이가 없어 어머니의 얼굴을 처다 볼 뿐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 박정자는 송달호를 한 번도 아버지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송달호는 방안 한쪽에서 담배만 퍽퍽 피우며 박정자를 노려보다가 화가 나는 듯,

"내가 네 애비가 되는 게 싫으냐?"
하고 다그쳤다.

"네."
"어째서?"
"전 아버지가 있어요."
"죽은 아버지 말이냐?"
"네."
"죽은 사람이 널 돌 볼 수 있다고 생각 하냐? 너를 책임지고 대학까지 보내고, 시집보낼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래도 싫습니다."

그러자 송달호는 못마땅한 듯 담배연기만 퍽퍽 내뿜더니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이 소문을 들은 동네 사람들은 박정자 어머니가 사내에게 미치더니 딸에게 못할 짓을 시킨다며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사내에게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고 흉까지 봤다. 하루는 마을 사람들이 시장에 있는 호박나이트에서 송달호가 어떤 젊은 여자와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며 박정자에게 몸조심하라고 말했다.

"요즘 남자는 늙은이고 젊은이고 다 늑대여. 몸조심해라."
"설마요."
"설마가 사람 잡는다."

박정자는 아무리 잘못된 세상이라고 해도 의붓아버지도 부모인데 나쁜 짓을 하겠느냐고 믿었다. 며칠 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송달호와 박정자 어머니 사이에 돈 때문에 말다툼이 심하게 오고가더니 화가 난 박정자 어머니는 집을 나가버렸다. 그날 해가 저물어도 박정자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송달호는 박정자 어머니의 행방을 몰라 애를 태우는데 밤이 깊어서 박정자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송달호에게 골탕이라도 먹이려는지 오늘 친정에서 자고 갈 테니 혼자 한번 있어보라고 말했다. 송달호는 오늘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자기도 장담할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박정자 어머니는 마음대로 하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를 끊자 한참동안 씩씩거리던 송달호는 집을 뛰쳐나가더니 밤이 늦은 시각에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왔다. 한참 동안 박정자를 바라보더니,


"너도 나이가 그만하면 알 건 다 알아야 한다. 오늘 그걸 가르쳐주마."


하며 달려드는 것이었다. 박정자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경찰을 부를 거예요."
"그러면 너 뿐만 아니라 네 어미도 죽어! 살려면 순순히 내 말을 듣는 게 좋아."


송달호는 늑대로 변하여 박정자의 몸을 낚아채려는 순간 박정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와 냇둑을 달렸다. 술이 취한 송달호도 자리에서 비실비실 일어나더니 다 잡은 병아리를 놓진 독수리눈을 하고 뒤를 쫓았다. 하늘에는 별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박정자의 치마가 바람에 펄럭거렸다. 송달호는 쫓아오며 사정했다.


"제발 거기 좀 서라! 안 잡아먹는다니까."


하고 송달호가 아무리 뒤를 쫓아가도 두 사람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졌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컹컹 울렸다. 시냇물에는 보석 같은 별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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