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아니면 못 가" 20년된 캐리어 끌고 떠나다

[다섯언니의 오키나와 가출여행기 1편] 엄마가 되는 것도 성장통이 필요하다

등록 2015.12.22 11:51수정 2015.12.27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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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륵, 드르륵...' 서울 한복판에 캐리어 아줌마 부대가 나타났다. 좁은 인도를 여자 다섯이서 캐리어를 끌고 걷는 모습은 보기에도 유난스러워 보이는데 소리까지 더하고 있다.

"언니, 캐리어 소리 왜 그래? 어떻게 좀 해봐."

"야. 창피하냐? 이거 20년된 캐리어라 그래. 좀 사주든가."

우리의 여행은 이렇게 소란스럽게 시작되었다. 시작은 이러했다. 세금 환급 정책으로 근로장려금, 자녀장려금을 받게 되면서 생각하지 않았던 '꽁돈'이 생긴 언니들이 행복한 고민을 하면서 부터다.


회사는 다르지만 같은 건물 안에서 근무하는 우리 여자 다섯은 건물 앞 카페에 앉아 도란도란 수다를 떠는 날이 많았는데, 이날도 어김없이 남편 흉도 보고 시댁 이야기 좀 하다가 '꽁돈'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아줌마(아닌 사람도 있다)라는 공통사 때문인지, 꽁돈도 있겠다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일까. 우리는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우리 막내, 장염인데 똥은 잘 쌌나"

자마미섬을 다섯 언니가 가다 자마미섬 항구에 도착해 짐은 민박 스태프 차에 실어 보내고 숙소를 찾아 걸어 가는 길. ⓒ 이애경


참고로 다섯의 멤버를 간략하게 소개해본다. 이번 여행을 계기로 여권을 처음 발급 받은, 멤버 중 가장 많은 자녀를 슬하에 둔 네 자녀의 엄마인 J언니, 우리 중 가장 왕언니이지만 논리적인 남편의 언변에 늘 지고 마는 딸바보 H언니, 산골마을에서 아들 셋을 키우며 복작복작하게 살고 있는 Y언니, 유일하게 일본어를 할 줄 알아서 우리가 졸졸 따라 다녔던 K언니, 여행이 그저 좋아서 얼떨결에 아줌마들과 같이 가게 된 유일한 20대 나. 어쩜 이리 상황도 나이도 다이내믹하게 다를까. 조합만으로도 여행이 기대가 된다.

우린 비행기를 타러 가기 전 암묵적으로 두 가지에 동의했다. 첫 번째, 전화로밍은 연결하지 않을 것. 사실 금액이 비싸서 엄두도 못 냈다. 핸드폰 요금 폭탄이 두려워 잘 지켜졌다.

"언니, 이제 비행기 타니까 핸드폰 비행기 모드로 바꿔놔요."
"벌써 난 껐어. 전파 터지면 안 된대."


굳이 끄지는 않아도 되는 핸드폰인데 언니들은 긴장한 듯 보였고, 표정에서는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오랜만의 여행이기도 했지만, '비행기에서 내린 후 핸드폰을 켜면 터지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가족과의 연결이 차단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언니들에게 매일 부대끼며 사는 가족과 연결이 안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매일 챙겨줘야 하는 사람들이 집에 수두룩한데 나 없이 잘 챙겨서 학교는 갈 수 있을까?'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걱정들이 표정에서 느껴졌다.

두 번째 약속은 여행기간 동안 각자의 아이들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 잠시 가족보다는 나에게 집중해 보자고. 물론 그 약속은 1시간도 안 돼서 깨졌지만 말이다.

"우리 막내, 장염인데 똥은 잘 쌌나?"
"애 아빠가 3일 동안 애들한테 라면만 끓여주는 건 아닌가 몰라."

내가 없는 빈자리를 과연 남편이 잘 채울 수 있을까 염려하는 이야기로 일본 오키나와로 출발하기 전날밤을 지새웠다.

산호가 살아있는 환상의 바다가 있는 자마미섬

후루자마미 해변과 모래 대신 산호 자마미섬으로 들어가면 후루자마미해변이 있다. 후루자마미 해변가는 모래가 아닌 산호로 뒤덮여 있는 이색적인 해변이고, 바닷물 또한 에메랄드로 맑다. ⓒ 이애경


오키나와를 여행지로 선택한 이유는 푸른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휴일 없는 노동, 가사 일에 벗어나 밥 안 하고 청소 안 하고 한잠 늘어지게 자고 싶어서이다. 무계획 여행, 오로지 휴식만을 취하고 오겠다는 일념 하나였다.

그래서 우리는 오키나와에 도착하자마자 섬에서 또 섬으로 들어가는 자마미섬행 배를 탔다. 그 선택은 탁월했다. 자마미섬에 배가 다다르자 에메랄드 빛 해변이 우리의 눈을 황홀하게 했다. 정말 TV에서만 보던 그라데이션 초록 물빛이다. 왜 '아시아의 하와이'라 불리우는지 이해가 됐다. 항 주변도 어찌나 물이 맑은지 멀리 가지 않고 항에서 수영을 해도 될 정도였다.

민박집에 짐을 놓고서 우리는 자마미섬 주변을 산책하러 나왔다. 자전거를 탈 팀과 걸어서 해변을 갈 팀을 나눠서 움직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따로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탈 팀이 된 나는 무인자전거 대여소에서 자전거를 빌려 동네 골목길을 돌기 시작했다. 사실 골목길보다는 배가 고팠기에 마트를 찾겠다는 마음이 컸다.

자마미섬 마트 맥주를 사기 위해 들른 자마미섬에 있는 두 마트 중 큰 마트. ⓒ 이애경


집집마다 있는 수호신 시사 액운을 막아 준다는 오키나와현의 미풍양속 시사. (오키나와 방언으로 '시시') ⓒ 이애경


자마미섬은 아름다운 해변이 유명해 스쿠버, 카약 등 해양스포츠를 주로 하러 오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젊은 사람들도 많고 동네 곳곳이 아기자기하다. 그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집집의 문기둥, 지붕, 울타리에 있는 시사( シ-サ- , Shîsâ)다. 시사는 오키나와 현에서 집 안의 액운을 막아준다는 풍속으로 놓는 토기 사자이다. 집의 수호신인 격이다. 처음 보면 괴기해 무서울 수 있으나 모습에 따라 귀엽게 보이기도 한다. 낯선 집에서 숨은 시사 찾기는 자마미섬 동네 산책의 특별한 재미다.

마트에 들러 맥주 한 캔을 사들고 항구로 가니 부둣가 위에 Y언니가 벌써 자전거를 세워놓고 맥주를 마시며 셀카를 찍고 있다. 언니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비교적 다른 언니들에 비해 여행을 많이 다녀본 축인 Y언니이지만 아이를 낳고, 가족과 함께 떠나는 게 아닌 혼자서만 하는 여행은 처음이라고 했다. 애기 셋이 마음에 걸리지만 '엄마가 행복해야지 아이들한테도 행복하게 대할 수 있는 것 같다'면서 그간의 육아로 지친 마음을 이야기 했다.

내 아이는 내가 키우고 싶어 시골로 들어왔다는 언니의 바람 대로 아이가 하나 둘씩 생겨나면서 언니는 육아를 전담했다. 하지만 육아로 인해 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생활하게 된 언니는 점점 피폐해져갔다고 한다. 남편은 계속적으로 사회적 커리어를 쌓아가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넓어져 가는데 나는 점점 이 집안에만 갇혀있고 퇴화하는 것 같은 막막함이 있었다고 했다.

언니의 고민은 한창 육아를 하고 있는 모든 엄마들의 고민이다. 그리고 아직 아이가 없지만, 미래의 엄마로서의 내 모습을 그려 볼 때도 가장 우려가 되고 해결책이 없어 보이는 부분이다.

자전거 산책에 신난 Y언니 자마미섬에서는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대여소에서 빌릴 수 있다. 자전거는 2시간에 300엔(약 3000원)이다. ⓒ 이애경


일에 대한 욕심이 많은데 아이를 양육하는 기간 동안 경력이 단절되어도 하고 싶은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 나 대신 누군가로 대체되면 다시 돌아갈 자리는 있는 걸까? 미래의 남편은 내가 사회생활을 포기하고 육아를 하는 것을 당연하게만 생각할까? 난 엄마가 되기 전의 삶을 잠시 접는 나름의 큰 희생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을까? 아기 얼굴을 보면 그 모든 고민들이 다 잊혀질 만큼의 내 안의 모성이 나의 사회생활과 관계를 포기하는 만큼의 보상을 주는 것일까?

언니와의 대화로 머릿속에 온갖 선택지가 떠올랐다. 마치 시험지에서 이 중 아닌 것을 고르시오라고 묻는 것처럼.

석양 때문이지, 맥주를 마셔서인지 발그레 붉어진 언니의 얼굴을 보니 묵직한 가슴에 선선한 바닷바람이 스며들면서 시원해진다. 언니의 모습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종주 중에 잠깐 의자에 걸터 앉아, 신발을 벗어 퉁퉁 부은 발에 휴식을 주는 이의 행복하고 편안한 모습이 보였다.

"배고프다. 숙소가자. 밥 먹으러 가야되는데 이 언니들 어디까지 걸어간 거야."

툭툭 엉덩이를 털고 바다 석양을 뒤로하고 자전거를 반납하러 숙소로 향했다.

K언니가 찍은 해가 지는 바다 석양이 멋있다는 아마 비치. ⓒ 이애경



○ 편집ㅣ박혜경 기자

덧붙이는 글 일본 여행은 12/5~12/8 다녀왔습니다.
#오키나와여행 #여성육아 #가족자유 #해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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