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대왕성유' 탁본, 대체 누가 쓴 것일까

등록 2015.12.17 10:43수정 2015.12.17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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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성유.' 정조 대왕이 율곡 이이의 유덕을 찬양한 글을 지어 추사 김정희로 하여금 쓰게 한 것이다.

展也文成 左海夫子 武夷石潭 千古二人(전야문성 좌해부자 무이석담 천고이인). '진실로 문성공 율곡은 해동의 공자요, 중국 무이산의 주인인 주자와 우리 석담의 주인 율곡은 천고의 두 분이다.'


오죽헌 율곡기념관에는 '정종대왕성유'를 탁본해 전시하면서 위와 같이 해설해놨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갔는데 자세히 보니 앞뒤가 맞지 않는 해설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다. 정조대왕(1752~1800)과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나이를 감안하면, 최대로 잡아도 추사 김정희가 15세 이전에 쓴 글씨라는 얘기다. 또한 '정종'은 묘호로 왕이 죽은 뒤 종묘(宗廟)에 신위(神位)를 모실 때 붙이는 존호이니, 정조대왕 생존 시 추사가 썼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누가 언제 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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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대왕성유 탁본, 오죽헌 율곡기념관 소장 ⓒ 한정규


정조대왕이 1박 2일 파주를 방문했을 때인 조선왕조실록 정조 13년 기유(1789) 2월 14일 기록을 보자.

"같은 시대의 덕있는 이로서 원(院)과 묘(墓)가 또 같은 고장에 있으니 우연한 일이 아닌 듯하여 감회가 더욱 깊다. 승지를 보내 선정신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의 묘에 치제하라. 제문은 직접 짓겠다."

어제문성공이이묘치제문(御製文成公李珥墓致祭文)에 展也文成 左海夫子(전야문성 좌해부자) 여덟 자는 <홍재전서>(弘齋全書) 21권과 <율곡선생전서>(栗谷先生全書) 37권에 나온다. 1795년(정조 19) 수원화성을 방문해 지은 어제화성성묘고유문(御製華城聖廟告由文)에 武夷石潭 千古二人(무이석담 천고이인) 여덟 자가 나오는데, <홍재전서>(弘齋全書) 23권과 <율곡선생전서>(栗谷先生全書) 37권에 원문이 실려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에 '天藻閣拓本(천조각탁본)'이란 탁본첩이 있는데 저자가 김정희로 돼 있다. 천조각 현판글씨와 비석 앞면과 뒷면의 글씨를 탁본해 수록한 책인데 저자를 김정희로 추정할 만한 근거는 없지만, 천조각이란 현판글씨는 추사체로 보인다. 하지만 비석 앞면 16자는 추사체와 비슷하지만 추사의 글씨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천조각(天藻閣)이란 '정종대왕성유' 비석을 보호하는 집으로 소현서원(紹賢書院) 사당 앞에 있다. 현재는 북한에 있어 가볼 수 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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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조각 현판글씨 탁본 ⓒ 한정규


국립중앙도서관에 '正宗大王聖諭(정종대왕성유)'란 책이 있다. 철종 4년(1853)에 율곡 이이의 후손인 이한영과 황해도 해주(海州) 지역 유생인 박상준이 이이를 현창하기 위해 정조(正祖)의 어제문(御製文)에서 몇 구절을 취해서 건립한 비(碑) 앞뒷면의 탁본을 모아놓은 7장 15면의 탁본첩(拓本帖)이라 소개하고 있다.

비음기(碑陰記, 비석 뒷면 기록)의 내용을 보면, 비의 건립 경위와 의의에 대해 김수근(1798~1854)이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는 기록은 있지만 전면의 글자를 누가 썼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여러 유생들이 어제문 중에서 16자를 크게 써서 돌에 새겨 뜰에 세웠다고만 돼 있다. 탁본을 떠서 첩으로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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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가 쓴 '사란기' ⓒ 한정규


추사 김정희의 글씨 중에서 1849년에 왕희지의 난정서에 대해 고찰한 '계첩고(禊帖攷)'라는 12면 분량의 추사체로 쓰여진 논고와 1853년에 난을 그리는 법에 대해 저술한 '사란기(寫蘭記)' 20면은 제주도 유배에서 해배된 후의 완숙한 추사체 글씨를 볼 수 있다.

비석이 세워진 1853년(철종 4)은 추사 김정희의 나이가 68세로 당시의 글씨를 보면 완숙한 추사체가 형성돼 있었던 시기다. '정종대왕성유' 비문의 16자를 추사체인 '계첩고' '사란기'의 서체와 비교해보면 추사체를 익혀서 흉내낸 글씨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래서 비음기에 글씨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아닐는지.

추사 김정희는 1851년 7월부터 1852년 8월 까지 북청으로 유배를 다녀왔는데, 기록에는 없지만 추사체로 보여지는 천조각 글씨를 이 당시 혹은 후에 썼을 가능성이 있거나, 추사체를 집자해서 현판으로 만든 것일 수 있다.

조선 말기의 학자이며 의병장 이었던 유인석(1842~1915)의 시문집인 의암집(毅庵集) '은병정사기(隱屛精舍, 소현서원)'에서 '정종대왕성유' 비석 글귀를 보고 "참으로 문성은 좌해의 부자로다. 무이, 석담은 천고에 두 사람뿐, 아아! 위대하도다"라는 내용으로 1902년 때 기록됐다. 이후 '정종대왕성유'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안타깝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e수원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정종대왕성유 #오죽헌 #천조각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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