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사람들에게 집 내어준 할머니, 감동이에요

['좌충우돌' 사회적경제 18] 일본 교토 '하루하우스'에 다녀오다

등록 2015.12.22 09:32수정 2015.12.22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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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배려로 다녀온 일본 연수

처음 일본 연수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는 언감생심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비록 3박 4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내가 없으면 아내 혼자 오롯이 어린 아이 셋을 챙겨야 하는 터라. 연수는 아예 엄두도 내지 않았다. 아쉽기는 하지만 나중에 아이들이 좀 더 크고 나면 그때 또 다른 기회가 있겠거니 했다.

그러나 상황은 10월 이후 급변했다. 해외 연수를 가기로 했던 연구원이 갑작스레 퇴사하면서 내게 일본 연수의 기회가 돌아온 것이다. 물론 아내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선뜻 결정할 수는 없었지만 사실 고민되었다. 어쨌든 이번 기회에 일본을 가게 된다면 내가 이 분야에서 좀 더 일할 수 있는 동력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자 아내가 나섰다. 그녀는 나의 상황을 흔쾌히 이해해주었고, 되레 내게 일본 연수를 적극적으로 권했다. 자기와 아이들 때문에 주저하는 거라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방사능 때문에 일본에서 선물 사 올 생각도 하지 말라나. 결국 난 그렇게 일본 연수단에 포함되었고, 3박 4일의 연수를 떠나게 되었다. 지난 11월 9일부터 12일까지의 여정이었다.

일본의 첫인상, '정갈하다'

엔화 환전 여행의 시작 ⓒ 이희동


새벽 일찍 도착한 인천국제공항. 이른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공항은 이미 벌써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번잡한 듯하지만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그 묘한 설렘. 그것은 지금 이곳을 떠나 어디론가 향한다는, 공항의 본질과 관련된 감정이었다. 나로서는 6년 전 베트남 신혼여행 이후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한층 복잡해진 수속을 끝내고 탑승하니 비행기는 이내 이륙했고 우리는 1시간 반 뒤 일본 간사이 공항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항상 그렇지만 기내에는 똑같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도 이륙할 때는 한국어만 들리는가 싶더니 착륙할 때는 일본어가 더 많이 들리는 듯했다. 기분 탓이려니.


간사이 공항의 수속 과정은 꽤 길었다. 일본도 테러 때문에 최근 들어 절차가 복잡해진 거라고 했지만 그 정도가 생각보다 심했다. 입국심사대는 국내인과 외국인으로 분류되었는데 외국인 줄은 1시간 넘게 기다려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요즘 아베 총리가 바깥에서 워낙 비상식적인 행보를 보여서 자격지심 때문에 그런 걸까?

수속을 마치고 나서 나오자 제주공항과 비슷한 느낌의 공간이 펼쳐졌다. 동남아시아나 중국 같은 경우는 그 특유의 냄새만으로 내가 낯선 곳에 왔음을 느낄 수 있었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았다. 냄새도 특별하지 않았고 보이는 것 또한 우리네와 비슷했다. 우리가 일본을 따라 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그만큼 일본과 한국은 비슷한 걸까?

일본의 고속도로 휴게소 한국과 다른 듯 비슷한 모습 ⓒ 이희동


버스에 올라 첫 번째 목적지인 교토로 향했다. 인천국제공항처럼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고속도로를 탔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우리와 조금 달랐다. 식생은 비슷해 보였지만 길 주변에 보이는 집들이 죄다 전통 가옥 비슷한 기와집이었고, 도심에는 높은 아파트가 거의 없었다. 잦은 지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우리나라처럼 아파트가 주거 공간의 다수를 차지하지 않고, 또한 아파트가 곧 재산의 전부가 되지 않은 탓이리라.

이윽고 도착한 교토. 첫인상은 정갈함이었다. 우선 거리가 매우 깨끗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금 번잡한 도심의 사거리만 나가면 온갖 현수막에 눈이 어지럽기 마련인데, 교토는 그 흔한 현수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는 간판도 마찬가지였는데, 어떻게든 사람들의 눈에 띄기 위해서 형형색색으로 큼지막하게 만드는 우리의 간판들과 달리 교토의 간판은 차분하기만 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맥도날드도 교토에 들어오면서 도심의 분위기에 맞추기 위해서 그 본연의 빨간색을 버리고 자주색을 사용했다고 하니 교토가 거리의 분위기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알 수 있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일본인들은 우리처럼 요란스럽게 현수막 등을 붙이지 않더라도 커뮤니티가 잘 되어 지역의 소식을 잘 알릴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대부분 가게가 워낙 오래되어 굳이 간판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일까?

교토 시내 일본의 첫인상은 '깨끗함'이다 ⓒ 이희동


교토의 맥도날드 색깔이 달라진 간판 ⓒ 이희동


어쩌면 현재 우리 사회의 보기 싫은 현수막이나 간판들은 한반도 역사의 부산물일지도 모른다. '나 하나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생각에 주위 환경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내 의견만 고래고래 지르는 우리의 모습 말이다. 이런 모습은 내전과 분단, 그리고 급격한 산업화와 공동체의 붕괴를 겪으면서 무한경쟁과 각자도생만이 생존법칙으로 자리 잡은 이 시대와 깊은 관련이 있다. 어쨌든 그 속에서 개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이 의사 표현을 폭력적인 방식으로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씁쓸해졌다. 분명 우리의 겉모습은 지금 내가 보는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그 속에서 사회가 움직이는 메커니즘은 크게 다르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씁쓸함은 곧이어 도착한 하루하우스에서 더욱 증폭되었다.

교토 하루하우스에서 본 풍경

하루하우스 외관 마을 사랑방 하루하우스 ⓒ 이희동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인 하루하우스는 교토의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건물 외관은 다른 일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단정해 보였는데, 그 내부 역시도 정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우리 일행이 2층 자리에 앉자 나이 많으신 할머니가 나와 무언가를 열심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루하우스의 주인 후니상이었는데 그녀는 1939년생, 올해 77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앞에 나서서 직접 강연할 만큼 열정적이고 정정했다.

하루하우스가 유명한 이유는 후니상이 자신의 집을 커뮤니티 공간으로 개방했던 첫 번째 사례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19살 때 신장병으로 움직이지 못했고 의사에게 '30살까지 못 살 거'라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했다. 그녀는 이를 계기로 간호사 되기를 결심하고 60세가 되어서는 '자신의 재산을 사후 사회와 환원하겠다'는 유언과 함께 자원봉사자의 삶을 살기로 했다고 밝혔다. 하루하우스는 바로 그와 같은 생각에서 시작된 사업이었다.

하루하우스 내부 아기자기하고 정갈했던 하루하우스 ⓒ 류양선


후니상은 지역 내 '마을 사랑방'으로서, 하루하우스의 위상과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때로는 지적 장애인의 간호시설로, 갈 곳 없는 어르신들의 경로당으로, 육아가 힘든 엄마들의 속풀이 공간으로, 혹은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은 학생들의 쉼터로도 이용된다는 하루하우스.

얼핏 들으면 하루하우스는 우리네의 마을회관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는 그와 같은 공간이 행정의 지원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필요와 열정으로 자신의 집을 공개하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 개인은 70세가 훌쩍 넘은 노인 아니던가. 후니상은 자기 삶의 경험을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든 이와 공유하고자 했고, 지역 주민들이 이에 감응하여 하루하우스를 진정한 커뮤니티 센터로 만들고 있었다.

우리의 노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후니상의 열강 77세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 류양선


하루하우스의 후니상 일본에 좀 더 많은 씨앗을 뿌리시길. ⓒ 이희동


후니상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첫 번째 드는 감정은 '부러움'이었다. 왜 우리 사회의 노인들은 후니상과 같은 일을 하지 못하고, 사회는 그들의 풍부한 경험을 살리지 못하는 것일까? 현재 우리 언론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저 연배의 평범한 노인들은 대개가 '어버이연합' 같이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던가.

사실 일본이나 한국의 70세 이상 노인이라면 각 개인이 모두 대하 역사드라마를 쓸 수 있을 만큼의 극적인 삶의 경험을 가졌다.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 전후 복구와 급격한 산업화 등 격동의 시기를 살아오면서 그들은 숱한 위기를 극복해왔고, 그 결과 현재의 한국과 일본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 사회에는 저런 후니상과 같은 어른들이 눈에 자주 보이지 않는다. 지도층에 앉은 노인들은 권력을 탐하느라 국민과의 소통은 포기한 지 오래이며, 평범한 노인들은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으며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물론 말이야 '초고령 사회' 운운 하면서 그들과의 소통을 이야기하지만 막상 그들이 말을 걸면 젊은 세대들은 자리를 회피하고 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부끄러워졌다. 혹시 나부터 후니상 같은 어르신들과 소통할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닐까? 하루하우스에는 그날 몇 명의 청년들이 함께 일하고 있었는데 과연 난 그들처럼 70세 넘은 어르신을 나의 동료로 인정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어르신들이 현재의 권력으로부터 쉽사리 동원 당하는 것은 어쩌면 지금 정부만큼 그들에게 말을 걸어준 이들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현 정권이 추종해 마지않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은 어쨌든 그들이 가장 잘 나가던 시기로서 국가가 국민을 끊임없이 호명하던 때가 아니던가. 사람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존재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 사회는 후니상과 같은 노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는 것일까? 단순히 젊은이들의 노인 공경심이 없기 때문일까?

마을공동체의 주체가 된 노인을 보고 찡했다

연수단 단체사진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던 하루하우스. ⓒ 류양선


그것은 결국 경제적 능력의 차이인 듯했다. 일본은 1960, 1970년대 고도성장을 누리면서 노인 문제에 대해 대비를 해놓았기에 노인들이 비교적 자신들의 노후를 편안히 보낼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우리 사회는 노인 빈곤율이 세계 최고로서 노인들이 다른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여유가 없다. 먹고 사는 문제만으로도 힘겹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폐지를 줍거나 복지의 혜택을 받는 대상으로 전락한 우리의 어르신들. 그들에게 고작 노인연금 몇 푼 지급해 놓고서 마치 큰일이라도 한 것처럼 큰소리 떵떵 치는 것이 우리의 자화상 아니던가.

지금 내 눈앞에서 자기 삶의 가치를 지역주민들과 어떻게 나누는지 열심히 설명하는 후니상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찡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어르신들을 저 자리에 세울 수 있을까? 사회적 경제와 마을공동체는 어떻게 그들을 당당한 지역의 주체로 견인할 수 있을까?

강의를 듣고 하루하우스를 나오는 길. 후니상은 건물 밖까지 배웅하면서 우리를 환송해 주었고, 1주일 뒤 손수 쓴 편지와 사진을 보내오면서 또 한 번 우리를 감동하게 했다. 태풍·화산·지진 등 온갖 재난·재해로 몸살을 앓는 일본이 그래도 이만큼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타인에 대한 세심한 배려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니상의 정성 연수가 끝나고 1주일 뒤에 온 편지 ⓒ 이희동



○ 편집ㅣ김준수 기자

#일본연수 #하루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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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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