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 아들 공부하는 모습, 마음이 천근만근

[빅맥의 쉐프 도전기 15편]

등록 2015.12.29 10:54수정 2015.12.29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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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헝그리(Hungry)하게 키우지 못한 50대 학부모입니다. 삶의 목표를 잡지 못해 표류하는 아이와, 은퇴 후 삶을 어떻게 보내야 할 지가 현실적인 문제가 된 저의 처지는 일응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지구 반대편 먼 이국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 가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 보면서, 점점 심각해지는 청년 실업문제와 베이비 부머들의 2막 인생에 대해 같이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 기자 말


멜버른 시내는 지도만 있으면 길을 찾는 게 아주 쉽다.

호주 여행 3일째, 평일이 시작되는 첫 번째 날이어서 오늘은 큰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가보기로 했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맬버른의 여름 날씨는 낮에는 더위가 맹위를 떨치지만 밤에는 창문만 열어 두어도 시원하게 잘 수 있는 수준이다.

어릴 때 내가 살던 시골 수준으로 깨끗한 공기가 몸의 회복력을 높여주는지 아침에 일어 날 때는 전날의 피로가 말끔히 사라지고 상쾌한 느낌이 든다. 민박집에는 이케O 침대가 놓여 있었는데, 수수한 외모와는 달리 한국에 가면 하나 사고 싶을 생각이 들 정도로 장시간 누워 있어도 편안하고 안락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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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명으로 표시된 멜버른 시내 지도 -도로명 주소가 의외로 편리했다 ⓒ 정성화


큰애 학교를 가보는 것은 내가 호주에 온 가장 큰 목적이다. 큰애가 다니는 학교는 멜버른 시내 중심가에 있는데, 트램을 타고 가면 된다. 멜버른 시내는 지도만 있으면 길을 찾는 것이 아주 쉽다. 격자형으로 구성된 도로에는 각각의 도로명이 붙어 있어서, 목적지가 어느 도로에 접해 있는 지만 알면 된다.

큰애가 다니는 학교는 킹스 스트리트와 라트로브 스트리트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그리고 우리가 탄 트램은 콜린스 스트리트를 따라가는 노선이므로, 우리는 콜린스 스트리트와 킹스 스트리트가 교차하는 곳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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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앵글리스 건물 전경 -한국의 대학과는 달리 아담한 규모였다. ⓒ 정성화


학교는 킹스 스트리트를 따라 세 블럭만 가면 되므로, 트램을 갈아 타지 않고 걸어 가기로 했다. 러시아워가 지난 거리는 한산했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즐기며 5분 정도 걸어가자 드디어 길 건너 왼쪽 건물 외벽에 윌리엄 앵글리스 인스티튜트의 입간판이 보였다.

그렇게 찾아 간 큰애 학교는 한국의 대학 캠퍼스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내가 아는 종합대학은 넓은 부지에 우선 출입문이 웅장하고, 캠퍼스 가운데 뚫려 있는 큰 도로를 중심으로 각 단과대학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면 혹은 측면에는 큰 운동장이 있는 것이 보통이다.

큰애가 다니는 학교는 한마디로 아담했다. 본 건물과 뒤 편의 부속건물이 있고, 본 건물 앞에는 잔디가 깔린 작은 정원이 있고 거기에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 사이를 지나 건물 1층으로 들어갔다.

손 흔들어주고 돌아서는 발걸음, 천근만근으로 무거웠다

작은 애와 아내는 1층에서 기다리고 나는 학교 내부를 좀더 자세히 구경하고 큰애가 공부하는 모습도 보고 싶어서 건물 내부로 들어 갔다. 건물은 1, 2층에 식당과 학생휴게실이 있고, 3층부터 강의실과 실습실이 배치되어 있다. 건물내부 사정을 잘 모르는 나는 미로와 같은 복도를 무작정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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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과 게시판 -Food, Hospitality, Tourism, Events 4개 학과로 구분되어 있다 ⓒ 정성화


제일 먼저 만난 학교 게시판에는 근무시간과 급여가 적혀 있는 구인메모가 빽빽하게 붙어 있었고, 한쪽에는 학과별 교수진 및 스탭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각종 행사 및 쉐프대회에 대한 포스터, 우수한 성적을 거둔 졸업생들의 수상 내역과 사진도 액자에 전시되어 있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강의실과 요리 실습실이 번갈아 나타났다. 복도를 따라 걸어 가며 학생들이 요리를 하는 모습, 강의를 듣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드디어 큰애를 찾았다.

극장식으로 뒤쪽이 높은 강의실의 맨 끝에 큰애가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같이 손을 흔들어주고 돌아서는 나의 발걸음은 천근만근으로 무거웠다. 눈이 마주치기 직전에 본 큰애의 모습은 강의에 집중하고 있는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강의 내용을 이해하고, 강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질문이 신음처럼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흘러 나왔다.

큰애를 기다리면서 현지 선생님과 학생 그룹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다국적인 그룹의 학생들이 야외 미팅 약속을 하는 건지 즐겁게 웃으며 떠들면서 뭔가를 서로 확인했다. 무슨 내용인지 들어보려 했지만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도 오랜 기간 영어공부를 해왔지만 다른 많은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말하기·듣기에 약하다. 그런데 호주 특유의 액센트가 섞인 영어는 도무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투데이'를 '투다이'로 발음하고…, 대충 뭐 그런 식이다.

큰애는 나보다 더 심하지 않을까? 고등학교까지 별로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고, 워킹 홀리데이를 하면서 배운, 속칭 스트리트 영어가 강의를 듣는 데 도움이 될까? 밥 사먹고, 물건 사고, 트램 타는 정도의 영어수준인 것 같은데, 호주인의 속도로 진행되는 영어 강의를 얼마나 알아 들을 수 있을까? 어학원에서 몇 달간 영어공부를 한 수준으로 강의를 소화할 수 있을까?

큰애가 고등학교 때, 또는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겪었던 상황, 강단에서는 흘러 나오는 알아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다. 2월 9일 입학을 했으니까 이제 겨우 일주일 경과한 시점이다. 내가 너무 성급하게 판단한 것은 아닐까? 끊임없는 이어지는 질문을 뒤로 하고, 나는 복잡하고 우울한 마음으로 아내와 작은애가 기다리는 학생 휴게실로 돌아갔다.
덧붙이는 글 아이를 헝그리(Hungry)하게 키우지 못한 50대 학부모입니다. 삶의 목표를 잡지 못해 표류하는 아이와, 은퇴 후 삶을 어떻게 보내야 할 지가 현실적인 문제가 된 저의 처지는 일응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지구 반대편 먼 이국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 가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 보면서, 점점 심각해지는 청년 실업문제와 베이비 부머들의 2막 인생에 대해 같이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호주유학 #멜버른 #쉐프 #청년실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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