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미래는 '헬조선'의 시간 강사

[리뷰] 대학의 허울을 벗겨버린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등록 2015.12.31 20:04수정 2015.12.3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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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콘강을 건너고 말았다."

며칠 전 스마트폰으로 페이스북에 접속해 이렇게 썼다. 대학원 박사과정 지원원서를 대학원 행정실에 제출하고 난 후였다.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따리라 마음 먹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페이스북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스스로 들어갔다'고 선언한 것은 어떠한 불안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진로 때문에 불안해 본 적이 없었다. 또래들이 어떻게 미래를 살까 불안에 사로잡혀 있을 때,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았다. 길은 이미 정해졌다고 믿었고, 주변 또래들은 나를 부러워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 나이 서른이 다가온다는 부담, 문예창작학과 전공자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평가, 선배가 처한 상황 등이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확고부동한 믿음에 점점 실금이 생겨났다. 그것은 석사 학위를 따고, 돈을 벌어볼 요량으로 대학의 계약직 직원으로 일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직접 번 돈을 손에 쥔다'는 경험은 책을 읽으면서 얻는 깨달음처럼 달콤했다. 그래도 믿음을 완전히 깨뜨리고 불안에 빠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한숨이 습관이 될 만큼, 나를 불안에 사로잡히게 한 것은 하나의 책이었다.

허울을 벗긴 대학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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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책표지 ⓒ 은행나무

바로 '지방시'라고도 불리는,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은행나무, 2015)란 책이다. 지방시는 309동1201호라는 특이한 필명의 저자가 쓴 책으로, 대학 내 대학원생이자 시간강사가 처한 상황을 고발하고 있다.

저자는 특유의 담담한 문체로 글을 풀어내는데, 거기에 가공하거나 미화하지 않은 날것의 내용이 더해지니 어떤 감성적인 글보다도 가슴 깊이 절절함이 박혀들었다. 내가 저자와 같은 처지라 더 공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방시의 절절함을 나만 느낀 것은 아닌 듯하다. 지방시 관련 기사가 언론에서 쏟아지고 있다. 매일 들춰보는 신문들의 오피니언 면에도 연일 관련 칼럼이 게재될 정도다.

대학이라는 허울에 가린 열악한 대학원생과 시간강사의 처우가 충격적이기도 했겠지만, 더 큰 이유는 아마 '시간강사 해고법'이라 불리는 고등교육법 개정안이 다음해 본격적으로 시행될 것이라는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어떤 집단을 보호하겠다며 만든 법안은 모순적이게도 모두 그 집단을 파괴했다. 기간제법, 파견법 등 비정규직 보호법이 그러했다. 시간강사법 역시 유예되기 이전까지 동일한 방향으로 흘렀다. 과거를 답습하는 법의 시행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간신히 입에 풀칠할 정도의 돈으로 연명하던 시간강사 대부분이 해고되고, 지도교수의 애정을 놓고 벌어진 충성경쟁에서 승리한 일부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물론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가 23일 법안심사 소위를 열어 시간강사법 시행을 2년 유예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긴 했다. 아직 국회 본회의가 남아있긴 하지만 사실상 통과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현상유지일 뿐더러, 2년 뒤에는 또 같은 일을 겪어야한다. 나도 2년 뒤 박사 과정을 수료하면 시간강사의 삶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는 처지라, 걱정이다. 이제 '배운 게 도둑질'이라는 말에서 뛰어내리는 것도 쉽지 않다.

지방대 시간강사라도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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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의 대학강사, 곧 닥칠 내 일이다. ⓒ freeimages.com


책을 통해 얼핏 바라본 저자의 삶에서 느낀 것은 '반반'이라는 감정이었다. 등록금이나 밥벌이는 같은 것은 인문계열 전공이라 얼추 비슷했다. 하지만 저자의 대학원 생활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살인적인 것이었다.

나도 조교생활을 해봤지만 저자가 겪은, '5분 대기조'와 같은 군대생활은 아니었다. 또 병원에 갈 만큼 다쳤는데도 일이 커질까 두려워하며 말 못한 적도 없었다. 대학원 생활은 나에게 버거운 것이었지만 저자처럼 자신을 내려놓아야 할 정도로 폭력적이진 않았다.

그러니 혀를 내두를 수밖에. 그에 비하면 나는 천국을 거닌 셈이었다. 제자의 사정을 아는 교수와 좋은 동료 덕에 편한 대학원 생활을 할 수 있었으니까. 저속하지만 이상한 안도감도 들었다.

한편 저자의 시간강사 생활을 엿보며 부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는 이미 시간강사의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책을 통해 본 저자는 좋은 선생이었다. 학생을 이해하려고, 학생을 위하려고 애쓰는 마음을 글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시간강사의 삶을 살 수 있다면 본(本)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내가 시간강사로 활동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2년 뒤 시간강사법이 원안대로 통과될 수도 있고, 내가 속한 학과가 인문계열이라 곧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반반이다. 안도감과 부러움이 교차했다. 지방시가 불러일으킨 긍정과 부정이 뒤섞인 감정이 앞으로 있을 대학원 박사 과정에 대한 확신을 무너뜨리고만 것이다. 이미 지방대 시간강사인 저자가 버티지 못한 삶을 '지방대 시간강사라도 될 수 있을까'라는 불안에 휩싸인 내가 이겨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미 루비콘강을 건넜고, 남은 것은 다가올 캄캄한 미래를 어떻게든 견뎌내는 일뿐이다.

함께 버텨낼 사람만 있다면

"현재진행형이 될 수 있었을 여러 인연들과 나는 점차 이별했다. 내가 기댈 곳은 몸담고 있는 대학원 사회 하나가 전부였다. 하지만 인문계 대학원에는 남자가 부족했고, 있다 하더라도 나와 '또래'인 이들은 거의 없었고, 더욱이 친구가 될 '동갑'은 전혀 없었다."(57쪽)

지방시의 모든 내용에 공감했지만, 유독 눈길이 간 내용은 친구에 관한 것이었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지금 내가 기댈 수 있는 곳은 대학원 사회 하나가 전부다. 내가 몸담고 있는 곳 역시 남자가 부족하고, 또래가 거의 없고, 동갑인 남자는 물론 여자도 전혀 없다. 또래가 아니면 아무래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기 힘들다. 또 관계 없음에서 오는 외로움은 사람을 좀먹고 모든 의욕을 떨어뜨리기 마련이다.

물론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공부한 것을 토대로 서로 대화하고 비판하는 일도 중요한 공부 방법 중 하나다. 또 같은 길을 함께 가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큰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이는 저자가 '꿈을 포기하지 않고 항상 그 자리에서 버텨내고 있었다'는 허벌이란 친구가 존재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만큼 동지적 인간관계는 중요하다.

얼마 전 페이스북을 뒤적거리다 지방시의 저자가 대학을 그만둔다는 소식을 접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공감해줄 것이라 믿었던 동료의 타박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열악한 환경은 견딜 수 있어도 인간적 실망은 버티기 힘든 법이다. 동료에게마저 버림받은 집단에서 아무렇지 않게 생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대학은 한 명의 뛰어난 연구자와 좋은 선생을 함께 잃었다.

앞으로도 대학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편승해 끊임없이 줄이고 자르고 통폐합할 것이다. 또 대학에 적을 둔 사람들은 각자도생을 위해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이렇듯 엄혹한 대학사회에서 살아남는 길은 함께 버텨낼 사람을 찾는 것 외에는 없어 보인다.

두 사람이 체온을 나눌 때 눈보라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와 허벌의 관계처럼, 내게도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친구가 있다. 이 글을 빌어 그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309동1201호 씀/ 은행나무/ 2015. 11/ 정가 12,000원)

이 기사는 본 기자의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309동1201호 지음,
은행나무, 2015


#지방시 #대학사회 #대학원생 #시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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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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