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에는 '보이지 않는' 물길이 있다

[백운동천을 따라 서촌을 걷다 ①] 서촌기행의 출발, 청계천 상류 백운동천

등록 2015.12.26 18:05수정 2016.02.03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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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한반도 역사의 가장 중심에 있는 서울 곳곳을 걸으며 이곳에 켜켜이 쌓여 있을 과거를 상상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두 발로 걸으며 느끼는 과거를 통해 우리의 현재를 가늠하고 미래를 꿈꿔보고자 한다.

서촌은 왜 서촌일까
조선시대 한양도성 안의 마을은 경복궁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도시의 방위(方位)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만일 경복궁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면 소위 '북촌'으로 불리는 가회동 일대는 '동촌'이 돼야 맞을 것이다.


조선시대 북촌은 청계천 이북의 모든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다. 한편, 사료에 의하면 서촌은 지금의 정동 일대를 지칭한다. 그러나 경복궁 서쪽 마을이 워낙 대중적으로 '서촌'이란 명칭으로 인식돼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도 독자들이 이해하기 편리한 '서촌'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이 여행의 시작점은 최근 서울 여행지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소위 '서촌'이다. 그리고 비록 지금은 우리의 눈에서 사라졌지만 여전히 우리 딛고 있는 서울시내 도로 저 밑에 흐르고 있을 청계천 상류인 '백운동천'(일반적으로 우리가 청계천이라 부르는 건 현재 복원돼 있는, 청계광장부터 흐르는 물길을 말한다. 그곳에서 최장 상류층까지는 따로 '백운동천'이라 부른다)을 따라 그 발원지 바로 옆에 위치한 창의문까지 걸을 계획이다.

또 그 출발점은 현재 복원된 청계천 시작점인 청계광장 소라탑이다. 이곳을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서촌을 관통하고 있는 '백운동천'이 이곳까지 흘러와 청계천 본류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사라진 청계천의 물길을 상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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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주변 청계천 상류 경복궁 주변에 흐르던 청계천 지류(바탕지도는 1946년 미군정이 제작한 지도) ⓒ 유영호


백운동천은 창의문이 있는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나는 계곡에서 시작돼 경복궁 서쪽 '자하문로'를 따라 흐르며 경복궁역과 세종문화회관 뒤편을 지난다. 그리고 현대해상화재 건물 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광화문 네거리 동화면세점이 입점해 있는 '광화문빌딩' 밑을 지나 청계광장의 소라탑에 이른다.

한편, 여기서 또 다른 청계천 지류인 '중학천'을 만나는데, 그것은 북악산에서 시작돼 삼청동을 지나 경복궁 동쪽 담장을 타고 내려와 교보문고 뒤로 흐른다. 이렇게 '중학천'과 만나 청계천 본류, 즉 종로와 나란히 동쪽으로 흘러가는 물길을 만드는 것이다.


광화문 네거리, 이곳은 우리가 수없이 지나는 곳이지만 이미 이 일대의 물길은 모두 복개돼 우리는 그 물길을 잊은 채 살아왔다. 그저 건물들 사이로 만들어진 '도로' 위를 걸었을 뿐이다.

하지만 자연은 우리 인간의 인공적 포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단지 그 물길이 조금 더 깊어지고 아스팔트로 포장되면서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집중호우가 오면 두 물길이 합쳐지는 광화문 네거리 일대에서 소위 '병목현상'을 일으켜 도로는 쉽게 물 속에 잠기는 것이다.

청계천과 한양의 풍수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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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성시도(1830) 한양은 한반도의 동고서저 지형과 반대의 서고동저 지형을 갖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도성을 관통하는 내명당수 청계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이러한 지형을 풍수지리에서는 명당이라고 한다. ⓒ 서울시 지도전시관, http://gis.seo


참고로 조선시대 한양 도성은 내사산(백악·낙산·남산·인왕산)을 따라 축조됐다. 그런데 이 산들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서고동저(西高東低)를 이룬다. 한반도의 동고서저(東高西低) 지형과는 반대다. 이로 인해 한양 도성을 관통하고 있는 내명당수 청계천 역시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東出西流) 외명당수 한강과 반대로 흘러 풍수상 좋다고 평가되고 있다.

흔히 풍수지리에서 서출동류(西出東流), 곧 물이 서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을 명당수로 보는 것은 서쪽이 높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나라처럼 북서풍이 부는 곳은 북서쪽 지대가 높아야 찬바람을 막아준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형태로 본다.

이렇게 청계천을 내명당수로 인식하며 도성이 축조됐지만, 한양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명당수 부족과 오염이 점차 큰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당시 풍수가 최양선은 도읍의 명당수는 깨끗해야 하므로 개천에 오수를 버리지 못하게 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학자들은 현실적으로 오염 방지는 불가능하며, 풍수로 도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맞섰다. 논란 끝에 결국 세종은 유학자 편을 들어 도성 안에 사람이 살다 보면 더러워지기 마련이라며 논쟁을 정리했다.

청계천 복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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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0월, 청계천 복개공사를 위해 청계촌 주변의 판자촌이 철거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이렇게 조선왕조 500년이 지나고, 1925년부터 차츰 청계천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백운동천, 옥류천, 사직천 등이 땅 속에 묻히면서 실개천에서 영락없는 하수구로 전락했다. 1920년대 이후 일제 총독부는 여러 차례 청계천 복개 계획을 발표했다. 1926년에는 이를 복개하여 1만 평 택지를 조성하겠다고 했으며, 1935년에는 복개해 도로를 만들고 그 위에는 고가철도를 건설한다는 발표까지 단행했다.

뿐만 아니라 1940년에는 복개해 위로는 전차, 밑으로는 지하철을 부설한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그런데 이런 구상은 모두 당시 조선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육성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총독부의 이런 구상은 재정문제로 구상에 그치고 말았다. 1937년 광화문일대에 약간의 복개만 이뤄졌을 뿐이다.

해방 후 수많은 피난민들이 청계천 주변으로 몰려들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이에 서울시는 전면 복개 결정을 내리고 1958년부터 공사에 착수했다. 1961년 동대문까지 모두 복개해 도로를 개설했다. 그리고 그 후 사대문 밖의 복개도 계속돼 1976년 청계고가도로를 개통한 데 이어 이듬해 청계천 전면 복개 공사가 마무리됐다. 이로써 하천으로서의 청계천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것이다.

(* 다음 글에 계속)
#서촌기행 #청계천 #백운동천 #청계천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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