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여 년 전 일제 '상처' 아직 아프다

[소설]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비극 'Another Holocaust' 32화

등록 2015.12.28 18:51수정 2015.12.28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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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는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어떻게 지내는지는 몰라도 K의 흔적에 대한 실마리라도 찾았으니 말이다. 회사에 돌아와서 그 단서를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일단 검찰에 의해 구금돼 있다는 다케우치의 말에 따라 검찰 측 라인을 살핀다. 데스크한테 문의해 보고, 다른 법조 전문 기자, 심지어 회사 변호사에게도 조언을 구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국가안전보장법 관련 구금이라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답답한 답변뿐이다.

처음으로 새로 만들어진 국가안전보장법 체계라는 괴물이 어떻게 인간을 옥죄는 시스템으로 작동되는지 실감했다. 오로지 권력 핵심부에 있는 사람, 그것도 실세만이 이 문제에 대해 답변을 줄 수 있다. 미키는 다시 아버지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핸드폰을 꺼내든다. 문자가 온 것도 몰랐다. 오하라에게 온 소식이다.


'이토씨, 만나 뵀으면 합니다. 이토씨에게 꼭 알려드릴 말이 있어요. 이토씨 편한 시간과 장소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정신없이 K에 집중해서인지 오하라의 존재에 대해 깜빡 잊고 있었다. 바로 답장한다. 회사에서 나와 전에 오하라를 만난 적 있는 약속 장소로 향한다.

'권력'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 특히 국가나 정부가 국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강제력'이라고 풀이한다. 근대 이후 정치학-사회학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학자 중 한 사람인 막스 베버는 권력을 '사회적 관계에서 한 행위자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는 확률'이라고 정의한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 '사회과학적 및 사회정책적 인식의 객관성' 등 명저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사회과학 및 철학자로서 자리매김된 막스 베버. ⓒ 문예출판사


권력은 행사하는 자와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다. 다케우치와 오하라로 이어지는 명령은 수용소에 묶여있는 K에게 무거운 권력의 힘으로 다가간다.

수감 생활을 시작한 지 첫 외출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수감자들은 수용소라는 갇혀 있는 공간을 처음으로 벗어난다는 사실에 소풍을 앞둔 어린이들처럼 재잘거린다. 대기하고 있는 군용 트럭 5대에 오르면서 말 많은 '1358'은 쉬지 않는다.


"이 길로 오사카까지 갑시다!"

늘 그랬듯 간수들은 진압봉으로 '1358'에게 겁준다. 다시 투덜댄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누가 간대? 그리고 갈 수도 없잖아."

그의 말처럼 수갑에 채워진 상태로 실탄이 장전된 총을 든 감시원의 눈을 피해 달아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마치 수학여행 차량이 일렬로 고속도로를 달리는 듯하다. 재소자를 태운 5대의 트럭이 간수들이 탄 승합차 2대를 앞세우고, 총으로 무장한 감시대가 탄 트럭을 뒤로하고, 지방도에 접어든다.

답답한 공간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해방감을 맛봐서인지 수감자들의 얼굴이 밝아진다. K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치 온 몸에 묻은 일상의 더위를 찬 물로  씻어내고, 에어컨으로 적당히 온도를 내린 거실 소파에서 미키와 함께 차가운 맥주를 마시는 기분이다. 아니면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이, 지난 번 미키가 해안도로를 제한 속도를 무시하면서 달릴 때 느꼈던, 바다 냄새가 부서지는 그것처럼 느껴진다. 모든 것이 미키로 귀결된다. 수용소에서 지내는 날이 많아질수록 미키에 대한 그리움만이 커져가는 것이 병이다.

바람의 자유도 금세 끝난다. 차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멈춘다. 간수들이 내리라고 몰아댄다. 트럭에서 내린 재소자들 수갑은 풀린다. 그들이 처음 본 것은 눈앞에 펼쳐진 것은 전형적인 시골 소읍 풍경이다. 풍경이 아니라 정지 사진이다. 분명 마을은 마을이기는 하다. 하지만 사람은커녕 개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멈춰진 모습이다.

간수들과 감시원들은 무어라고 투덜대며 하얗고 두툼한 옷을 꺼내 입는다. 우주복 같이 생겼다. 이 뜨거운 여름날 공기까지 차단될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우주복을 입은 간수들이 재소자들을 앞세운다. 터덜터덜 걷는 재소자들에게 먼지를 일으키지 말라며 간수 하나가 경찰봉으로 등짝을 후려갈긴다.

뒤로 따라붙는 간수가 하나 밖에 안 보인다. 일상적으로 산에서 작업할 때는 외곽을 경계하는 무장 감시원 이외에 죄수 10명에 최소한 한 명에서 두 명 꼴로 간수가 동행했다. 하지만 보통 때와는 다르게 간수 1명당 30여 명씩 담당하며 뒤따라간다. 총을 든 감시원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평소와는 달리 감시가 상당히 느슨하다. 만일 탈출하기로 작정했다면 최상의 기회다. 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이 분명하다. 수다쟁이 '1358'가 조용하다. 이상한 분위기에 평소 말 없던 꼬맹이 '1233'이 간수에게 묻는다.

"교도관님,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닥치고 가기나 해."

교도관은 귀찮은 듯 대꾸한다. 사실 상당히 귀찮다. 무더운 날 우주복 같은 옷을 입고 말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할 것 같은 하얀 마스크를 뒤집어썼기 때문이다. 간수가 대답이 없자 '1233'이 이번엔 '1358'에게 말한다.

"형님, 지금 어디로 가는 지 혹시 아세요?"

그러나 '1358'이 말이 없다. 낯빛이 안 좋다.

"형님, 형님은 아실 거 아니에요?"
"조용히 해."

무리들은 계속 말없이 걷는다. 

"지금 간수들이 입은 옷이 뭔지 알아?"

'1358'이 부자연스런 적막을 깼다. 아무도 대답 못 한다.

"저 옷은 방호복이야."

"방호복이라뇨?"

"방사능을 막는 방호복이라고. 옛날에 도호쿠 대지진 때 후쿠시마 원전 사고 알지? 그때 사고 수습 때 사람들이 저런 방호복을 입고 작업했잖아. 기억 안 나?"

"아, 그러네요. 그런데 지금 왜 간수들이 방호복을 입었죠?"

"아까 오다가 표지판 못 봤어? 여기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야. 지금 저 새끼들은 지네들만 방호복을 입었지. 그리고 우리는 아무 것도 없이 맨몸으로 작업을 시키려는 거야. 더러운 놈들."

모두 걸음을 멈췄다.

"아, 안돼요. 나는 작업을 할 수 없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1233'이 대열을 벗어난다. 그리고 그를 가로막는 간수를 밀어 넘어뜨린다. 지금까지 온 길을 되돌아 죽어라고 달린다. 트럭으로 향하고 있다. 당황한 감시원 중 하나가 방호복을 입은 상태에서 엉겁결에 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타당!"

두 발의 총성이 울린다. '1233'은 바로 그 자리에 엎드린다. 마치 겁쟁이 닭처럼 머리를 땅에 박아 감추려는 듯한 자세다. 감시원, 간수는 물론 재소자들 모두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모두들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마!"

간수들 중 책임자가 악을 쓴다. 그리고 '1233'에게 다가가 발로 사정없이 짓밟는다. 그러다 분이 덜 풀렸는지 이번에는 세워 놓고 주먹질한다. '1233'은 얼굴이 찢어졌는지, 코피가 터졌는지 피투성이다.

"나머지 새끼들, 얼른 작업에 투입시켜!"

잠시 멈췄던 동북수용소 시계는 다시 돈다. '1233'을 뺀 나머지 모두는 작업에 투입됐다. 트럭에서 무려 2km 정도 떨어진 고교 운동장이 작업 현장이다. 그곳에 말 그대로 여기저기 산만큼이나 많은 일감이 널려 있다. 넓디넓은 오염 지역 방사능 제거 작업에 쓰인 방호복과 작업 도구들을 한 데 모아 시멘트로 만들어진 커다란 컨테이너와 비슷한 곳에 차곡차곡 넣어 쌓는 일이었다.

땀은 쉴 새 없이 흐른다. 나중에는 땀이 말라 몸에서 소금이 묻어난다. 기온만큼 뜨거워진 물은 마시면 그때뿐이다. 여름이라 길디긴 낮처럼 작업시간도 끝날 줄 모른다. 워낙 힘이 들어서인지 K에게서 미키 생각을 잠시 앗아간다. 수용소라면 저녁을 먹어야 하는 시간 오후 6시가 훌쩍 넘어 거의 7시다. 20피트짜리 컨테이너 열 개 넘게 채운 다음에야 겨우 작업이 끝났다. 그들이 방사능에 피폭됐는지 안 됐는지 묻거나 얘기하는 사람은 없다.

수용소로 돌아오는 길이다. 흠씬 두들겨 맞은 '1233'의 얼굴이 엉망이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눈을 더욱 찾기 힘들만큼 눈두덩은 부어올랐다. 눈두덩만큼은 아니더라도 윗입술도 붓기가 가라앉을 생각이 없다. 오키나와 출신 노인네 '1577'이 걱정하는 듯 묻는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말이라도 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아니, 왜 그렇게 대책 없이 간수를 밀어 제치고 도망쳤어? 마치 미친 망아지처럼."
"저는 방사능이 무서워요."

'1233'에게 방사능이라는 말은 어른들이 어린 아이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하는 '에비'와 같다. 도깨비나 호랑이 같은 무서운 것에서 빗댈 수 있을 만큼  겁 먹을 만한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 말의 또 다른 기원은 옛 조선시대 왜란 때 왜군이 자신들의 전과(戰果)를 증명하기 위해 조선 사람들 귀[耳]와 코[鼻]를 사정없이 베어간 데서 '이비(耳鼻)'라는 말이 나왔고, 이것이 변해 '에비'가 됐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방사능은 '1233'에게 그만큼 트라우마가 깃든 단어라는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일제의 징용으로 끌려와 나가사키에서 막일하는 어린 노동자였다. 열다섯살 때인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다리 하나를 잃고 겨우 살아남았다. 그래도 손재주가 좋아 신기료장수를 하며 구두를 기워주고 닦아주며, 돈을 모아 동네에 가게를 냈다. 같은 동네에 살던 일본인 여자와 결혼도 했다. 그녀 역시 원폭으로 귀가 먼 장애인이었다.

할아버지 늘그막 때 아들을 봤다.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아들은 어려서부터 말썽꾸러기였다. 고등학교 때 불장난으로 '1233'을, 같은 학교에 다니던 고2짜리 여학생으로부터 낳고는 집을 나갔다. 그 이후 얼마 안 가 할머니가 죽었다. 집을 떠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할머니는 저녁시간 마을 어귀를 서성이다 자동차 경적 소리를 듣지 못하고 교통사고로 죽은 것이다.

그 후 어린 엄마도 집을 떠났다. 졸지에 할아버지는 혼자 젖먹이 '1233'을 키웠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아들이 할머니를 돌아가시게 만들었다며, 어린 손주 '1233'을 때리면서 '방사능 같은 놈'이라고 구박했다. 그래서 '1233'은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가 자신을 때린 것은 모두 원폭 때 함께 날아든 '방사능' 때문이라고 여겼고, 방사능이라는 말만 들어도 자지러지기 시작했다. 70년이 넘은 태평양전쟁의 업보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매맞아 끙끙대는 '1233'도 걱정이지만 '1358'은 더 심각하다. 자신은 유복자(遺腹子)인데다 독자이기 때문에 반드시 결혼해서 대를 이어야 한다며, 탈출하겠다고 공언한다. 만일 방사능에 피폭된 상태에서 작업을 계속하게 되면, 유전적 결함이 있는 자식을 낳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몇 년 전 김기덕 감독의 영화 <스톱>에서도 후쿠시마에서 기형아 출산을 한 산모가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영화에 녹여 낸다. 영화 주인공 부부도 임신한 아이를 유산시킬 것인지 아니면 그냥 낳을 것인지를 놓고 다툼을 벌인다. 그  와중에 정부는 임산부의 낙태를 종용, 아니 간접적으로 낙태를 하라고 협박하는 상황을 묘사한다. 결국 도쿄 사람들에게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전력회사는 돈벌이를 위해 마구잡이로 원자력 발전소를 지었고, 애꿎은 후쿠시마와 그곳 주민들만이 희생양이 됐다는 일종의 항변이기도 하다.

김기덕 감독 영화 '스톱'에서 동일본 대지진 이후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 후쿠시마를 떠난 임산부(호리 나츠코)와 남편(나카에 츠바사). 정부는 임산부에게 우회적으로 유산시킬 것을 협박한다. ⓒ 영화 '스톱'


"어이, '1901'. 자네는 많이 배운 사람 같은데, 방사능에 대해 좀 알아?"
"저도 잘 몰라요. 다만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 주워들은 정도는 알지만요."

"도대체 그 영향이 어떤 것인지 내게 자세히 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일단 방사능에 쬐면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은 알죠?"

"당연하지. 그러니까 무슨 병에 걸리는 거냐고?"
"우선은 암입니다. 그리고 선천성 기형 같은 유전적 병이고요. 그리고 심혈관에 관한 병이 발생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거 봐. 유전병에 걸리면 큰일이잖아.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그리고 나머지도 모두 다 걸리면 죽는 중병 아니냐고?"
"심하면,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이봐. '1901', 탈출하자. 여기 있으면 죽는다. 여기서 벗어나야 돼."
#김기덕 영화 '스톱' #막스 베버 #후쿠시마 원전 #동일본 대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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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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