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락은 왜 정주영의 대선 출마를 말렸나

[발굴 5] '이후락 가신' 이동휘의 증언, 대선 후 정주영에 대한 정치보복 예견

등록 2015.12.28 16:07수정 2015.12.28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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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유신정권의 몸통 중 한 명인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을 10여 년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조카 이동휘를 만나 숨은 비화를 들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 등 유신이 부활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은 시점에서 '지피지기'의 관점으로 비화를 연재한다.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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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말, 조계종 5대 종정 서옹스님과 전국 불교신도회장으로 있던 이후락, 신도회 조직부장 조카 이동휘(왼쪽 앉은 사람)이 조계사에서 방송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이동휘


박정희 정권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면서 한 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소리를 들으며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이후락(HR· 아래 존칭 생략). 하지만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김종필 등 유신세력들과 함께 구금된 후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몰락의 길을 걸었다. (관련기사 : "임기말 전두환, 이후락에 국가원로회의 동참 요청")

HR은 2009년 85세로 별세할 때까지 30년 가까이 경기도 광주 도자기공장 도평요에서 도자기를 만들고 지내면서 인터뷰 등 언론접촉을 일절 거절하고 함구로 일관했다. 10여 년 동안 HR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조카 이동휘는 "HR에게 오랫동안 중앙지와 방송을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지만 그는 이를 모두 거절했다"고 밝혔다 .

HR이 권좌에서 물러난 후 이동휘는 한일의원연맹 실무자를 지내다 수년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정치학을 공부했다. 일본 로비스트가 꿈이었던 이동휘는 과거 HR로부터 소개받은 일본 정치인들과도 교류하며 꿈을 키워나갔다.

그러던 중 1989년 초, 중학교 동기인 최일학(전 울산상공회의소 회장)으로부터 "외삼촌이 울산에서 일간지를 창간하려는데, 동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당시 권력을 잡은 전두환은 언론통폐합 등 언론의 자유를 억압했지만,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으로 후 6·29 항복 선언으로 집권한 노태우는 전두환이 단행한 언론자유 억압을 일부 해제했다.

이에 울산에서도 지역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첫 일간지 창간을 준비했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온 이동휘는 1989년 5월 창간한 울산최초 일간지 <경상일보> 서울지사장을 거쳐 울산으로 와 상무이사 등을 지냈다. 이동휘는 <경상일보> 1~2대 김상수 대표이사, 3대 이석호 대표이사에 이어 4대 대표이사에 취임하게 된다. 다음은 이동휘의 회상이다.

"일본에서 공부하던 내게 1989년 초 최일학이 '외삼촌과 함께 지역일간지 창간에 동참해달라'고 요청했다. 고심하던 중 도평요에 있던 HR에게 상의하니 '가서 참여해봐라, 단지 지방신문은 100% 로컬화해라. 이웃집에서 누가 박사가 됐다는 식의 지역소식을 전하는 데 주력하라, 중앙기사는 배제하라'고 조언했다. 당시 한 달에 1~2번 경기도 광주로 가 HR과 면담하고 조언을 구했다.


대표이사에 취임하니 한 달 적자액이 5천만 원이나 됐다. 매월 적자를 피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각계로부터 자본금을 유치했지만 160여 명이나 되는 직원들의 월급을 매달 지급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종이신문은 지금처럼 매킨토시 등 컴퓨터로 편집하지 않고 편집·교열을 동판을 이용해 일일이 손으로 작업했다. 따라서 지역신문이라해도 신문을 발간하는 데는 많은 인원이 필요했다. 이동휘가 대표이사로 재직하던 당시 자본금 유치는 향후 <경상일보>의 자산이 늘어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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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 <경상일보> 대표이사로 재직할 당시의 이동휘 ⓒ 이동휘


하지만 이같은 이동휘의 자본금 유치는 비록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도자기를 구우며 생존해 있던 HR의 후광이 큰 역할을 했다는 중평이 있다. 특히 당시는 울산이 대도시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도시개발이 활발하던 때라 자본금을 투자한 기업과의 언경유착이 지적되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일은, 이처럼 이동휘는 HR의 후광으로 신문사 대표이사로 지내면서 각계로부터 자본금을 유치해 신문사를 운영했지만, 후일 신문사 내부로부터 비토를 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본인 또한 신문사를 나온 후 HR의 동생인 아버지 이거락을 모실 집 한 칸 없이 여관생활을 전전한 사실은 권력의 또 다른 이면을 보는 듯하다.

이후락 "정주영이 대선 포기하고 아들 정몽준을 YS에 부탁했으면..."  

전두환에 이어 대통령이 된 노태우의 임기가 끝나가던 1992년 치러진 14대 대선은 우리 현대사의 큰 획을 그었다. 군사정권이 끝나기를 바라던 국민들은 김영삼의 3당 합당으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특히 재벌 정주영의 대선 출마는 정치권을 흔들었다. 당시 정주영은 '권력의 괴롭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출마했다'고 공언한 상태였다. 다음은 이동휘의 증언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HR과 정주영은 각별한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하지만 막상 그가 대통령에 출마한다고 했을 때 HR은 이를 반대했다.

14대 대통령 선거일을 얼마 앞두고 당시 <경상일보> 대표이사이던 나는 서울지사장과 함께 서울에서 정주영을 인터뷰했다. 같은 통일국민당 소속이던 차수명, 정몽준 의원이 배석한 자리였다. 나는 정주영에게 울산 관련 공약을 물었다. 그러자 정주영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울산은 대도시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서울처럼 강변을 잇는 도로를 개설하지 못해 효율성이 없다, 서울 강변도로처럼 울산도 강변도로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이후 현대자동차가 326억을 투입해 태화강 하류를 따라 울산 중구와 동구를 잇는 아산로를 건설해 1996년 12월 28일 개통, 울산시에 기부채납했다. 아산은 정주영의 호다. -기자 말)

서울에서 정주영 대선후보 인터뷰를 마친 후 곧바로 경기도 광주 도평요로 가서 HR을 만났다. 그때 HR은 '정주영이 이번에 대선에 나가면 안 된다, YS(김영삼)에게 아들 정몽준을 다음 대통령으로 부탁하고 후보직을 사퇴해야 한다'고 했다.

HR은 정주영의 당선 가능성이 없고, 선거가 끝난 후 정치보복을 당할 것을 우려했다. HR은 YS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반드시 정치보복으로 정주영을 궁지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나는 HR의 이말에 '속이 깊은 이야기구나, 정감록에 나오는 정도령(진인)이 정몽준이 아닐까' 생각했다. (군사정권 말기이던 당시 국내에서는 마음의 평안을 찾는 '단전호흡'에 관련된 책이나 혹은 앞날을 미리 예측하는 정감록과 같은 예언서를 번역한 책들이 많이 팔려나갔다. - 기자 말)

이후 왕회장(정주영)의 최측근에게 HR의 이같은 뜻을 전했다. 하지만 왕회장은 결국 출마를 강행했고 대선이 끝난 후 세무조사를 받는 등 큰 곤경에 처했다."

1992년 제14대 대선은 81.9%의 투표율을 기록한 가운데 3당합당을 통한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가 997만 7332표(41.96%)를 얻어 당선됐다. 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804만 1284표(33.82%),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는 388만 67표(16.31%)로 3위에 그쳤다.

공교롭게도 대선이 끝난 후 정주영은 극심한 정치보복을 당했고, 공교롭게도 이동휘는 <경상일보>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시사울산>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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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 일간지 노조위원장을 지냄. 2005년 인터넷신문 <시사울산> 창간과 동시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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