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마간산' 패키지 여행? 이렇게 할 수도 있다

[유럽 패키지 여행 ④ 중부유럽 4국] 14) 회고와 반성... 여행기를 쓰며 더 많은 것들을 배웠다

등록 2015.12.29 11:26수정 2015.12.29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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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의 체스키 크룸로프 성탑 ⓒ 이상기


12일 동안 무려 9개국을 여행했다. 베네룩스 3국, 독일과 오스트리아 2국,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의 중부유럽 4국을 다녔다. 인천에서 암스테르담까지 왕복 비행한 시간을 이틀로 잡으면, 순수하게 여행한 기간은 10일이다. 그렇다면 하루에 한 나라씩 다닌 셈이다. 패키지 여행이니 가능한 일이다. 그러다보니 여행이 주마간산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수도와 역사적 현장을 찾아 그 나라의 역사와 지리, 문화와 예술 등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수 없이 듣기만 하던 중부 유럽 4개국을 직접 보고 체험한 것은 큰 소득이었다. 내가 체코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중학교 때다. 1970년쯤 '프라하의 봄(Pražské jaro)'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났는데, 그것을 소련군이 강제로 진압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바르샤바 조약에 대해서도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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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여름 ⓒ 이상기


프라하의 봄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두브체크(Alexander Dubček)가 이끄는 공산당이 1968년 4월부터 민중들의 개혁 요구를 반영해 자유화와 민주화를 추진한 운동이다. 그들 사회지도자와 민중들이 원했던 것은, 사회주의의 전복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얼굴을 한 사회주의였다. 계획경제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시장경제를 도입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러한 계획과 시도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반발을 샀고, 1968년 8월 바르샤바 조약 4개국(소련,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소련은 두브체크를 축출하고 후사크(Gustáv Husák)를 공산당 제1서기로 임명해 개혁정책을 중단케 한다. 이러한 개혁정책이 성공을 거둔 것은 20년이 지난 1989년이다. 하벨(Václav Havel)을 중심으로 일어난 벨벳혁명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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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추밀과 함께 한 관광객 ⓒ 이상기


나는 그러한 혁명의 현장 프라하 뿐 아니라, 릴케나 카프카 문학의 토양이 된 프라하를 찾아볼 수 있었다. 프라하라는 이름은 <프라하의 연인>이라는 드라마를 통해서 또 한 번 부각되었다. 2005년 인천과 프라하 사이 직항이 열리면서 이런 드라마가 나올 수 있었다. 이번 여행기간 동안 드라마의 일부를 보았지만, 여행에 크게 도움이 되는 내용은 없었던 것 같다.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 역시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이곳에서의 한나절이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도나우강, 역사성, 아름다운 도심, 문화와 예술 등이 어우러져 관광객을 감동시키는 매력이 있었다. 볼거리가 많으면서도 상대적으로 물가가 싸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묵어가는 것이 가능한 도시였다. 나중에 방문해 6개월이나 1년 살면서 슬로바키아의 진면모를 소개하고 싶다.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보는 시각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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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의 젊은이 ⓒ 이상기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1956년 일어난 민중봉기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 봉기 역시 공산당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일으킨 민중항쟁이다. 자유를 위한 투쟁과 민주주의를 추구한 혁명이 1956년 10월 23일 부다페스트 대학생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또한 공산당 일당독재를 거부하고 소련군의 철수를 주장했다. 그러나 11월 4일 소련군이 진주했고, 자유를 위한 투쟁은 일주일 후 끝나고 말았다.

그 결과 혁명가담자들 수백 명이 처형되고, 수천 명이 투옥되었으며, 수십만 명의 국민들이 자유를 찾아 서방으로 탈출했다. 이때의 이야기를 시인 김춘수가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라는 시로 표현했다. 이것을 나는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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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의 두나강 ⓒ 이상기


다뉴브강(江)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겨울
가로수(街路樹)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黃昏)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數發)의 쏘련제(製) 탄환(彈丸)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바숴진 네 두부(頭部)는 소스라쳐 삼십 보(三十步) 상공(上空)으로 튀었다.
두부(頭部)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鋪道)를 적시며 흘렀다.

너는 열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 놓아 울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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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 탄 승리의 여인상 ⓒ 이상기


사실 이 시는 지나치게 주지주의적이다. 체험이 아니라 사유(思惟)를 통해 시를 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용에 있어 현실성이 떨어지고 지적인 유희가 심한 편이다. 11월 초 다뉴브강에는 아직 살얼음이 얼지 않는다. 열세 살 소녀가 자유를 추구하다 죽음을 당한 것인지도 의문스럽다. 그리고 이 시를 통해 인간의 비굴함을 이야기한다.

이 시가 당시 교과서에 실린 이유가 뭘까? 민중의 자유의지를 꺾으려는 폭력적인 공권력 또는 외세를 비판하기 위한 걸까? 폭력으로 죽어간 소녀를 보면서도 그 폭력에 굴하고 마는 인류의 양심을 고발하는 걸까? 아니면 말 그대로 반공국시를 대변하는 걸까? 시인 김춘수와 그의 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을 문병란 시인은 '헝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패러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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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광장에 있는 마자르의 영웅들 ⓒ 이상기


헝거리는 어떤 나라일까?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제5공화국 전두환 대통령 밑에서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까지 지낸
무의미의 순수시인
경북대 교수 김춘수(金春洙)씨가 쓴
그 고발, 비판, 저항, 증언의 반공시
인류의 양심 앞에 바친
자유의 숭고함을 노래한 참여시,
30년 교단생활 국어 실력 발휘하여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잘도 외웠지
[…]
지금은 남의 나라 역사 빌려올 필요 없어
광주 금남로에서의 소녀의 죽음
광주 충장로에서의 청년의 죽음
광주는 살아있는 민주교과서
머나먼 헝거리 부다페스트까지 갈 필요가 없어

여행 중 알지 못한 걸, 글을 쓰며 새롭게 발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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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엘리츠카 소금광산에 새겨진 역사 ⓒ 이상기


폴란드의 크라쿠프 지역에서 나는 색다른 문화유산을 볼 수 있었다. 비엘리츠카 소금 광산,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그것이다. 비엘리츠카 소금광산이 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유럽 최초의 산업시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소금의 채굴과 운반이라는 산업적인 측면보다는, 후세에 만들어진 역사 관련 조각들이 더 인상적이었다.

코페르니쿠스, 킹가 공주, 카지미에쉬 3세, 요한 바오로 2세, 이들은 폴란드의 역사인물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현장에서보다 나중에 글을 쓰며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천문학자, 왕비, 왕, 성직자로, 이들이 어떤 일 또는 역할을 했는지는 공부를 통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이처럼 현장에서 피상적으로 보고 듣고 느낀 사실들을 나는 여행기를 쓰며 정확히 정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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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르케나우 수용소 ⓒ 이상기


그리고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도 정말 특별한 문화유산이다. 공권력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한 폭력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의 현장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노예매매 만큼이나 어두운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나는 그러한 내용을 <국립 오시비엥침 박물관.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안내서>라는 책을 통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이처럼 나에게 글쓰기는 카프카처럼 구원을 향한 간절한 기도까지는 아닐지라도, 정리하고 회고하는 시간이 될 수는 있었다. 또 현상의 설명에 그치지 않고, 그 고뇌를 함께 하는 성찰과 반성의 시간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상당수의 문화유산을 처음 보고 아는 체를 했기 때문이다. 곱씹어 만들어낸 여행기, 현장의 삶이 녹아든 여행기를 쓸 날을 기대하며 나는 중부유럽을 떠난다.
덧붙이는 글 [유럽 패키지 여행]을 총 41회 연재했다. ① 개관 1회, ② 베네룩스 3국 6회, ③ 독일, 오스트리아 20회, ④ 중부유럽 4국 14회. 처음에는 30회 정도 연재하려고 했는데, 41회로 늘어났다. 그것은 이번에 만난 문화유산이 너무나 많았고, 그것이 가지는 역사성과 가치를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지나치게 서술적이 된 부분도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유럽으로 난민이 유입되고, 파리에서 테러가 발생해, 유럽여행이 어려워진 측면도 있다. 유럽이 과거처럼 다시 안정되길 기대한다.
#중부 유럽 #프라하 #블라티슬라바 #비엘리츠카 소금광산 #아우슈비츠 비르케나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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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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