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화가 엔화로 바뀌었다,
박정희-박근혜 부녀의 '불법 환전'

[게릴라 칼럼] 법적 책임 묻지 않고 봉합한 한일 회담, 최대 수혜자는 미국

등록 2015.12.30 10:28수정 2015.12.30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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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일본군 성 노예) 문제가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외무대신의 28일 회담에서 타결됐다. 위안부 강제동원이 일본군에 의해 자행됐으며 일본 정부가 이 점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데 양쪽이 공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책임이 법적 구속력을 띠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양측이 공개한 발표문에 따르면, 아베 총리대신이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하는 수준에서 한걸음도 더 나아가지 않았다.

또 양쪽 외무장관은 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위한 재단의 설립책임을 한국 정부에 넘겼다. 일본 정부는 이 재단에 자금을 기부할 뿐이다. 자금 액수와 관련하여 기시다 대신은 "대략 10억 엔 정도를 상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내용은 두 정부가 정말로 강조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핵심은 다른 데 있는 듯하다. 기시다 대신은 "이번 발표를 통해 이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강조했다.

또 윤 장관과 기시다 대신은 똑같이 "앞으로 국제연합 등 국제사회에서 이 문제를 두고 상호 비난·비판을 자제한다"고 약속했다. '앞으로는 이 문제를 재론하지 않으며 이로 인해 양국 관계가 훼손되도록 하지 않겠다'는 언약이 두 정부가 진정으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과거엔 8억 달러, 이번엔 10억 엔으로 '봉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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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모습(가운데).


50년 전인 1965년,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도 이번과 유사한 청구권협정을 체결했다. 이동원 외무장관과 시이나 에쓰사부로 외무대신 명의로 체결된 협정의 제1조에서는, 3억 달러 무상원조 및 2억 달러 유상차관으로 식민지배 문제를 해결한다고 규정했다.


협상 과정에서 양쪽은 3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 제공을 별도로 합의했다. 3억 달러 무상원조와 2억 달러 유상차관과 3억 달러 이상 상업차관을 합한 총 8억 달러로 식민지배 문제를 종결하기로 한 것이다.

50년 뒤인 이번에 기시다 외무대신은 "이번 발표를 통해 이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언급했다. 유사한 표현이 50년 전의 청구권협정 제2조에도 있었다. "(이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음을 확인한다"는 규정이다.

지금이나 그때나, 양쪽이 똑같이 하고 싶은 말은 "이번으로 끝이야!"다. 제대로 해결하지도 않았으면서 항상 그 말이 가장 하고 싶은 것이다. 이 점을 본다면, 지금이나 그때나 양국 정부는 서로를 상대로 합의했다기보다 한국 국민을 상대로 공동의 메시지를 보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아버지 박 대통령은 8억 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식민지배 문제를 봉합했고, 딸 박 대통령은 10억 엔을 받는 조건으로 식민지배 문제에 속하는 위안부 문제를 봉합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한 일은 본질에서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8억 달러와 10억 엔이 아닐까. 달러화가 엔화로 바뀐 것 말고 더 이상의 의미가 있을까?

1965년과 2015년은 50년 차이다. 50년이란 시차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은 게 있다. 50년 전에도 '박 대통령', 50년 후에도 '박 대통령'이라는 점?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그것은 한일 양국 합의의 최대 수혜자가 동일하다는 점이다.

이런 류의 합의를 통해 최대 이익을 얻을 나라는 일본도 아니고 한국도 아니다. 양국이 위안부 문제로 계속 충돌하면, 가장 큰 손실을 입을 나라는 바로 미국이다. 한일이 계속 다투면 한미일 삼각동맹이 훼손되고, 이렇게 되면 동맹의 리더인 미국이 가장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위안부 문제를 봉합하는 이런 합의는 미국에 최대 이익을 부여할 수밖에 없다.

과거와 현재, 한-일 합의 수혜자는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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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세 외교부장관(오른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지난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일본군위안부 관련 한일외교장관회담을 마치고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이희훈


미국은 1945년에 세계 패권을 장악했지만, 50년대 들어 세계 각지에서 도전을 받았다. 동아시아에서는 신생국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고, 유럽에서는 서유럽 국가들이 경제통합운동을 일으켰다. 또 아시아·아프리카 신생 독립국들이 비동맹운동을 통해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냉전질서에 도전장을 내걸었다.   

이로 인해 미국의 영향력이 세계적으로 퇴조하는 속에서, 60년대 들어 동아시아에서는 이런 흐름에 역행하는 현상이 출현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상대적으로 미국의 패권이 강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은 1951년 일본과 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하고 1953년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이런 상태에서 1960년 미일안전보장조약을 미일상호협력안보조약으로 격상시켰다. 상호협력안보조약은 자위대가 개별적·집단적 자위권을 통해 주일미군과 공동보조를 맞출 수 있도록 하는 조약이었다. 1951년 조약은 미군의 일본 주둔을 인정했다는 점에서만 의의가 있었다. 1960년 조약으로 미국은 일본군과의 합동작전으로 동아시아 전략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미국의 지도를 받는 한국과 일본을 한데 묶는 것이었다. 한일 양국이 친해야만 미국이 두 나라를 움직여 동아시아 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된다. 두 나라가 군사동맹을 체결하는 게 최선이지만, 양국 국민의 감정상 이것은 요원한 일이다. 그래서 미국은 양쪽이 수교하는 선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한일 수교가 이루어지려면 식민지배 문제가 어떻게든 봉합되어야 했다. 이때 구원투수 역할을 한 게 아버지 박 대통령이다. 1965년에 그는 8억 달러의 유·무상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식민지배 문제를 봉합하고 한일관계를 정상화했다.

1965년 한일관계 정상화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다는 점은, 1964년 10월 국무성이 윌리엄 번디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를 서울에 보내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지지한다고 공개 천명한 사실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이런 천명으로 미국은 한국 국민의 조약 반대 여론을 잠재우려 했다.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양국관계가 정상화됨에 따라, 높은 수준은 아니지만 낮은 수준에서나마 한미일 삼각동맹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한일 군사동맹이 체결됐다면 높은 수준의 삼각동맹이 작동됐겠지만, 한일 국민감정을 고려하면 이 정도의 성과만 거둔 것도 한·미·일 삼국 정부로서는 대단한 성공이었다.

한일청구권협정에 표기된 이동원 외무장관과 시이나 외무대신의 서명.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한미일 삼각동맹은 낮은 수준에서 이뤄졌지만, 이것은 60년대에 미국과 동아시아 해양세력이 동아시아 대륙세력을 능가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대륙세력에 속한 소련과 중국은 제각각 핵무장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상호 분열한 데 반해, 해양세력에 속한 미국·한국·일본·대만·필리핀 등은 미국이 제공하는 단일한 핵우산 하에 뭉쳐 있다. 이 점도 해양세력의 우위를 가능케 했지만, 한미일 삼각동맹으로 인해 이쪽 진영의 우위는 한층 더 강화되었다.

1960년에 미일동맹이 업그레이드되자, 1961년 북한은 소련 및 중국과의 군사동맹을 강화했다. 하지만 이 동맹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1962년에 소련은 쿠바를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미국 코앞에 핵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다 미국의 전쟁 위협을 받고 계획을 포기했다(쿠바 미사일 위기). 이로 인해 소련에 대한 공산권 국가들의 신뢰도가 크게 떨어졌다. 북한 역시 실망했다.

1964년경부터 중국에서는 중국식 사회주의를 지향한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한미일 삼각동맹이 체결되는 중차대한 상황에서 '다분히 한가하게' 문화대혁명에 빠지는 중국의 모습은 북한 지도부가 볼 때 이만저만 실망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북한의 실망감은 문화혁명 기간에 벌어진 양국 간의 갈등이 잘 증명한다.

이렇게 60년대 전반에 한미일 관계는 더 견고해진 데 반해 북중소 관계는 더 약해졌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미국이 주도하는 해양세력이 북중소 대륙세력보다 상대적으로 강해졌다. 60년대에 북한이 1·21 청와대 기습이나 울진·삼척 침투 같은 무장 도발을 많이 일으킨 데는 이 같은 불리한 역학 구도 속 두려움도 분명히 작용했다.

60년대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해양세력이 우위를 강화한 데는 아버지 박 대통령의 역할이 큰 몫을 했다. 그가 역할을 하지 못했다면 한일관계 정상화는 더뎠을 것이고, 그렇게 됐다면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지장이 초래됐을 수도 있다. 70년대엔 핵개발로 미국에 반기를 드는 듯했지만, 60년대에 박정희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다. 

박근혜, '대한민국 대통령'임을 잊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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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정상 기념촬영 (서울=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11월 2일 청와대에서 정상회담 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오늘날에도 미국은 세계 각지에서 곤경을 겪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김정은 정권의 출범 뒤로 북한은 한층 더 예측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거기다가 중국마저 노골적으로 미국에 도전하는 일이 잦아졌다.

북한이 핵실험을 해도 미국이 어쩌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중국은 난사군도 분쟁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당장에라도 미국과 전쟁을 벌일 것처럼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 중국도 북한을 어느 정도는 모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한일 양국이 위안부 문제로 갈등을 빚게 되면,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힘이 실릴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미국이 곤란한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은 50년 전에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돈 몇 푼' 받는 조건으로 또다시 일본에 면죄부를 제공했다. 아버지가 했던 일을 딸이 또다시 해낸 것이다. '달러화'를 '엔화'로 바꾼 것만 빼면, 65년에 박정희가 한 일과 2015년에 박근혜가 한 일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불법 환전'이라는 점만 빼면 두 부녀의 행위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로 인해 가장 큰 이익을 얻은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한미일 삼각동맹이 약화하는 걸 당분간 면하게 됐기 때문이다. 존 케리 국무장관이 미국 시각으로 28일 공식 논평을 통해 "이번 합의를 이끌어낸 한일 양국 정상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며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를 묶어 칭송하면서 적극적 환영의 뜻을 표시한 사실은 이번 타결의 최대 수혜자가 누구인지를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가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질책했다. 제 역할을 못하고 있기는 박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그는 위안부 문제를 적당히 봉합함으로써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수행을 돕고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국무성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나 미국의 51번째 주지사가 해야 할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이 대한민국 국민의 세금으로 살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환기해야 한다.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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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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